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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後期~近代改革期 平安道의 政治·文物 伸長 硏究 : 조선후기~근대개혁기 평안도의 정치·문물 신장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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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하명준

Advisor
김태웅
Major
사범대학 사회교육과(역사전공)
Issue Date
2016-08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平安道平安道 認識平安道의 文物變動平安道人의 官職進出西京 豊慶宮 建設文化啓蒙運動
Description
학위논문 (박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사회교육과 역사전공, 2016. 8. 김태웅.
Abstract


본고는 18세기 전반 朝鮮 肅宗朝부터 20세기 초반 大韓帝國이 국권을 상실하기까지 평안도의 政治·文物 伸長과 지역위상 변화를 검토한 글이다. 이 기간은 우리 역사에서 이른바 문명사적 전환을 노정하면서 내적으로는 중세적 성격을 탈각하고 근대로 진입하였던 시기에 해당한다. 평안도 사회와 지역민도 이러한 시대적 흐름과 궤를 같이 하고 있었다. 아울러 여기에는 평안도인의 성장과 지역적 특성을 반영한 나름의 획기가 존재하였다. 중앙과 지방의 두 가지 방면에서 진행되는 양상을 시기별·단계별로 상호 연계하여 고찰함으로써 조선시대에 정치·문화적으로 주변 지역이었던 평안도가 근대에 들어와 중심지의 한 축을 형성하게 된 경로를 살피고 그 역사성을 추구하는 것은 우리 역사의 진전과정을 체계적으로 살피기 위한 불가결한 과제이기도 하다.
집권국가인 조선에서 8道는 物産·人口·地形·位相 등을 감안하여 국가·사회적인 기능과 역할을 수행하도록 짜여졌다. 전체 국가 운영에서 道마다 특성과 차이가 있게 된 것은 여기에서 연유하였다. 8도 중에서 평안도는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關防의 重地로서 군사상의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17세기 전반 정묘·병자호란의 패배로 국경지대인 평안도는 청의 간섭을 받아 군사 활동이 전면 금지되었다.
17세기 후반 肅宗朝에는 청의 내정불안과 청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朝廷의 의지가 맞물려 대청전면전이 모색되면서 평안도 방어체제의 본격적인 정비가 가능해졌다. 청과의 전쟁에서 전초기지 역할을 수행하게 될 평안도에는 군사 활동의 중단과 戰後 복구의 성과로 재정이 비축되어 있었다. 평안도의 군사·재정적 중요성이 확장되면서 국왕과 일부 大臣들은 평안도인의 등용 의지를 보다 적극적으로 표명하였다. 하지만 중앙의 官人 다수는 평안도를 尙武之地에 입각해서 다스리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인식 아래 出身地와 土風 등을 근거로 평안도 문인의 등용을 저지하였다. 평안도의 국가 기여도가 커진 상황에서 마주하게 되는 지역 홀대와 차별적인 인식은 평안도 유생들의 불만을 고조시켜 숙종 40년(1714)에 關西辨誣疏 사건이 발생하는 배경이 되었다. 이 사건을 주도한 평안도 유생들은 자기 지역을 夷狄·禽獸로까지 규정하는 土風에 대해 편견과 구조적인 모순에서 야기된 문제임을 환기시켰다. 아울러 여타 지역과 똑같은 백성으로서 一視同仁의 처우를 요구하였다. 지역 홀대를 해소하기 위한 방안으로는 人事·國防의 부면에서 文武竝用을 추구하고 關防을 중첩해서 운용할 것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조정에서는 이와 같은 평안도인의 차별 해소와 지역 발전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다. 이후 純祖 11年 (1811)에 일어난 홍경래의 난을 포함해서 차별을 부각시키는 것은 평안도인을 결집시키는 중요한 기제의 하나로 작동하였다.
18세기 중반 英祖朝에 적대적이던 대청관계가 안정적으로 변화하면서 평안도 사회는 새로운 발전의 轉機를 마련하였다. 대청무역이 국내 상업의 발달과 연계하여 활기를 띠고 진행되었으며, 연쇄적으로 수공업과 광업의 진전이 있게 되었다. 평안도의 사회경제적 번성은 인구의 급증으로 이어져 18세기 후반 英·正祖 시기에 평안도는 전국에서 두 번째로 많은 인구를 보유할 정도였다. 이러한 평안도는 서울의 상업적 발전과 궤를 같이하면서 문화적으로 한층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곧 淸南에서 淸北으로 文風이 확산되어 평안도 전역에서 문과급제자가 배출되고 敎學이 흥기하였다. 그리고 군현을 단위로 자기 지역 문화에 대한 전통을 정리·발굴해서 그 가치를 음미하거나 재조명하는 경향이 읍지 편찬 등을 통해 강하게 대두하고 군현의 독자성이 높아진 것도 새로운 동향이었다. 평안도 내부에서 지역 民人의 분화도 나타났다. 군현과 군현 사이에 地域史 인식이 상충하여 다툼을 벌였고, 그러한 갈등이 홍경래 난 때 물리적인 충돌로 재현되었다. 당시 京鄕分岐의 심화에 따라 반역·반란으로 서울과의 대결 의식을 전면화했던 反京세력과 체제 내에서 지위 상승을 도모한 忠義세력으로 나누어지기도 하였다. 홍경래 난은 이 두 세력이 격돌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충의세력이 승리를 거두게 되면서 忠義는 평안도인이 중앙으로 진출할 수 있는 유력한 근거가 되는 동시에 평안도 사회를 지배·운영하는 강력한 명분과 노선으로 자리매김하였다.
19세기 후반 高宗朝로 접어들면서 평안도 文·武官의 등용이 확대되었고, 중앙에서의 정치 활동과 역할도 증대하였다. 고종조(1863~1894)에 중앙관직을 역임한 평안도 출신 문관 397명의 官歷을 검토하면 당상관은 59명(15%), 당하관은 117명(29%), 참상관은 125명(31%)이 배출되었다. 관인층이 두터워지면서 要職에 발탁되는 기회도 많아지게 되었다. 중앙에서 정치 세력을 형성한 평안도 문관은 언론 활동의 중추가 되는 司憲府·司諫院에 많이 배치되어 時務를 진단하고 방책을 강구하였으며, 특히 1880년대에 이르러 국왕 중심의 정국운영을 지지하고 시무책을 제시함으로써 개화정책을 보조하였다. 한편 향촌에서는 평안도 유림의 宗匠으로 꼽히는 朴文一·朴文五 형제의 주도하에 衛正斥邪를 견지하면서 성리학적 주류 문화에 합류하기 위한 최대의 노력과 성취를 보이고 있었다. 功利를 배격하고 정통 도학을 추구하는 박문일 형제의 학풍은 지방관의 興學 정책에 의해서 뒷받침되어 평안도 전역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평안도인의 정치·문화적 성장은 光武 6年(1902)에 西京 豐慶宮을 건설할 수 있는 형세로 작용했으며, 평안도 출신 전·현직 官人과 儒生, 그리고 지역민은 평안도 지역 위상이 절정에 도달한 상태를 향유하면서 새 수도 건설에 적극 참여하였다. 하지만 광무 8년(1904) 러일전쟁의 발발로 서경 건설 사업은 완수되지 못하였고, 평안도민에게서 거둔 공사대금의 대부분을 관리들이 착복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이 사업은 부정으로 얼룩진 채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韓末 조선은 청일전쟁을 필두로 의화단의 난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격심한 변동을 겪었다. 게다가 을사늑약의 강제로 국권 상실의 위기가 목전에 임박하였다. 이런 형세에서 평안도 현지에서는 기독교와 동학의 교세가 팽창한 것에 대응하여 위정척사를 고수하던 유림의 改新 노력과 함께 新學을 흡수·접목하는 변화가 나타났다. 특히 박문오의 장남 朴東欽은 유학의 쇄신을 절감하고 仍舊就新의 방도를 제창·실천함으로써 평안도에서 위정척사의 학풍이 改新儒學으로 선회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편 서울에서 평안도인들은 西北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서우·서북학회를 설립하고 국권 회복의 일환으로 自强을 강조하면서 문화계몽운동에 진력하였다. 이 과정에서 평안도는 문명화의 선진 지역으로 논의되고 주목받았으며 지역 위상도 제고될 수 있었다. 서우·서북학회를 비롯한 전국의 여러 학회들은 분발과 각성을 촉구하면서 지방간의 경쟁심을 통해 전체적으로 실력을 배양한 뒤 이를 다른 나라에 대한 경쟁심으로 유도하는 것을 하나의 전략으로 공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방간의 주도권 경쟁이 과도해지면서 국권 회복의 의지로 잠복해 있던 지역감정의 문제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도 하였다. 서북지방에서는 조선왕조에서 정권을 장악할 만한 수준의 정치 참여에서 배제된 것을 五百年의 宿怨으로 내세우며 지역 홀대를 부각시켰다. 일부 서북학회의 핵심 인사 중에는 지역갈등을 조장하고 또 이에 편승해서 畿湖勢力 중심의 李完用 內閣을 전복하고 서북인 중심의 安昌浩 내각을 수립하여 정권을 장악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이것은 현실 가능한 구상이었다기보다는 개인적 일탈과 일제 통감부의 분열 책동에 휩쓸린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안창호를 위시한 서북학회의 주류 세력은 내각의 참여를 거부하고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망명길에 올랐다. 이런 속에서 일제는 한일병합을 가속화하여 결국 隆熙 4年(1910)에 대한제국을 강점하였다. 비록 을사늑약 이후 국권 회복의 과제는 실패하였지만, 계몽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구축된 평안도인의 민족의식과 역량은 소멸하지 않고 일제강점기에 3·1운동 등의 항일운동으로 계승되었다.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20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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