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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滉의 四端七情論에 대한 李瀷의 재해석 : Seongho Yi Ik's New Interpretation on Toegye Yi Hwang's Four-Seven Deb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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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박지현

Advisor
허남진
Major
인문대학 철학과(동양철학전공)
Issue Date
2016-02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四端七情論爭所從來理發氣隨氣發理乘人心道心聖人의 七情
Description
학위논문 (박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철학과 동양철학전공, 2016. 2. 허남진.
Abstract
1.
이 논문은 이황의 사단칠정론이 이익에 의해 다시 해석되고 새로운 이론체계로 재구성된 의의를 밝히는데 목적이 있다. 기존의 연구는 근기학파 내부에서 형성된 학통의식과 이익이 스스로 표명한 이황에 대한 계승의식을 근거로 이황과 이익의 학문적 연속성에 주목하였고, 이에 따라 이익이 이황의 학문을 계승한 근기남인 퇴계학파의 종주로 인정한다. 이익은 서학과 전통 성리학이 교차되는 지점에서 뚜렷한 사승관계 없이 家學의 영향 아래에서 학문적 토대를 형성하였다. 당시 정치적으로 진출할 길이 차단된 이익이 선택한 길은 학문이었고, 특히 이황의 사단칠정론을 재해석함으로써 본격적으로 퇴계학에 입문하였다. 그러나 이익은 이황의 사단칠정론을 영남 퇴계학파처럼 그대로 가져가지 않았다. 이익은 이황의 사단칠정론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이론체계로 정립함으로써 자신만의 학문적 토대를 마련하였고, 이후 근기남인 퇴계학파의 종주가 될 수 있었다.

2.
이황은 도덕의 근거가 마음속에 존재한다고 보기 때문에 마음을 理와 氣의 합으로 규정한다. 이황이 마음을 리와 기의 합으로 규정하는 것에는 마음의 중요한 기능인 지각과 주재를 단지 심의 기로만 설명할 수 없다는 의미가 있다. 이에 따라 마음의 體인 性도 理氣之合이고 마음의 用인 情도 리기지합이라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황에게 있어서 마음 본성 그리고 감정은 모두 리와 기의 합이며, 본성과 감정은 마음의 본체와 작용이라는 체용관계로 상정된다. 이러한 전제에서 이황은 理도 발하고 氣도 발한다는 사단칠정 理氣互發說을 제기하였다.

2-1.
사단은 理發氣隨이고 칠정은 氣發理乘이라는 이황의 명제는 존재론적으로 리와 기의 합으로 구성된 情을 그 의미[所指]와 발생과정[所從來]에 따라 구분한 것이다. 이황은 모든 존재와 그 작용은 리와 기가 합해져서 이루어진다고 본다. 여기에는 리가 운용 주재한다는 활동성이 바탕이 된다. 그러나 리의 활동성을 기의 물리적 운동과 동일한 것으로 보는 것은 결코 아니다. 구체적 현실에 있어서 리는 언제나 乘機로서의 마음의 氣를 통해서 그 주재 운용하는 것이므로, 리는 凝結造作이라는 물리적 운동을 하는 기와 달리 無爲하다. 따라서 이황이 理發이라 하더라도 리가 기 없이 自發하는 것은 아니고[理發爲四端, 所資以發者氣耳. 其所以能然, 實理之爲也], 氣發은 기에 대한 리의 주재 운용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氣而無理之乘, 則陷利欲而爲禽獸]. 리와 기는 언제나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황은 말 탄 사람의 비유로 설명하는데, 사단이든 칠정이든, 본연지성이든 기질지성이든 존재론적 구성은 항상 리와 기의 합이다. 따라서 정이나 성은 한 가지 사태로 드러날 뿐이기 때문에 여기서 소주와 소종래의 구분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2-2.
이황은 기대승과 논변과정에서 사단은 理發氣隨, 칠정은 氣發理乘이라는 명제로 정식화하였지만, 이황이 주장하고자 한 것은 사단 리발에 있다. 사단은 맹자가 사람의 마음속에 도덕성의 근거가 있다는 증거로 제시한 것이다. 사단은 리인 본성이 주가 되는[主理] 순수한 리의 발현이므로 본질적으로 선한 감정이다. 칠정은 나의 몸과 관련되므로 나의 利害여부에 따라 기뻐하고 슬퍼하는 것이다. 칠정은 이렇게 나의 몸[욕구와 이해관계]에 얽혀 있는 마음이므로 氣가 주가 되는[主氣] 기발이다.
이황은 사단이라는 본질적으로 선한 감정이 별도로 존재한다는 것을 사단리발로 논증하고, 이로부터 도덕성의 기초를 세우고자 한 것이다. 맹자에 따르면 사람은 나와 관계없는 상황이나 사람에 대해서 측은지심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는 특별한 감정은 리인 본성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므로[理發] 이념적으로 순수하고 도덕적으로 선하여 道心과 같다. 이 특별한 감정의 경험은 나의 형기와 관련된 모든 상황에서 올바른 감정을 내고 올바른 판단과 행위를 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2-3.
이황은 마음속의 리의 발현인 사단 곧 도심이라는 준거를 세워 그 기준에 따라 나의 몸(욕망과 이해)에 얽힌 칠정을 다스리는데 있다. 칠정은 사람이 몸을 가진 이상 누구나 가지게 되는 감정이므로 보편적이며, 이러한 감정은 올바르게 표출되고 올바른 행위로 이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황은 칠정이 몸에 얽힌 감정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 자체로 부정되어야 하거나 악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사단이라는 준거를 세워 칠정을 다스린다는 것은 나의 형기와 관련된 모든 상황에 대해 나의 형기와 관련 없을 때 느꼈던 감정의 경험(사단=도심)이 근거(기준)가 되어, 나의 감정(칠정)을 조절하여 판단하고 행위하는 것이다. 나의 모든 감정(칠정)은 사단이라는 기준에 맞추게 되므로 칠정의 중절이고, 사단은 나의 일상생활의 모든 감정과 그에 따른 행위와 판단의 기준으로 확대되므로 사단의 확충이다. 이와 같이 사단의 확충은 칠정의 중절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지 나의 몸과 관련된 모든 감정이 제거되고 모든 상황에서 사단이라는 특수한 감정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이황은 이것을 마음의 주재로 설명한다.[心爲之宰, 則其動也無不中節矣] 마음의 주재도 지각활동과 마찬가지로 심의 기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리와 기가 합해져야 한다. 리와 기가 합해진 마음이 본성(본연지성/기질지성)에서 드러난 감정을 통괄하여 중절하는 것이 마음의 주재이고 심통성정의 의미가 된다.

3.
기대승에 의하면 현실에서의 리는 기와 섞여있어서 오직 기가 발현하고 유행하는 것에 의해서만 실현되는 것이다. 이황이 이와 기를 지나치게 구분했다, 理의 운동성을 인정했다는 기대승의 비판을 받으면서도 사단과 칠정을 각각 이와 기에 분속하는 것은 사단이 칠정과는 구분되는 도덕적 감정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만일 자신에게 도덕적인 감정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면, 이는 도덕적인 행동을 시작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기대승은 중절여부를 떠나 그 자체만으로 도덕적인 감정이라는 사단의 특별한 지위는 인정되지 않는다.

3-1.
기대승은 우선 칠정이 비록 氣와 관계있는 것 같지만 理 또한 그 가운데에 있다고 말함으로써 칠정에는 리와 기가 섞여 있음을 강조한다. 칠정이 발한 이후 氣에 의해 理가 실현될 가능성과 그렇지 못할 가능성은 함께 존재하며, 그 중에서도 理가 실현된 경우를 사단이라고 할 수 있다. 사단은 氣에 의해서 실현된 理인 동시에 중절한 칠정인 것이다. 기대승은 칠정의 중절여부로 사단과 칠정이 갈리고 선악이 결정된다고 보기 때문에 사단과 칠정을 대립적 관계로 놓고 구분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中節을 이룬 칠정은 未發之中이 실현된 것이므로 和가 된다. 이러한 중화의 상태가 곧 천명지성이자 본연지체가 실현된 상태이므로 이때는 달도(도덕적으로 완전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성인의 칠정은 이렇게 도덕적으로 완전한 상태로 중절한 칠정이며 보통 사람들도 칠정의 중절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기대승이 중절한 칠정을 사단과 같은 도덕적 감정으로 간주하는 것은 칠정에도 도덕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고 그 때문에 오로지 기발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3-2.
기대승은 사단이 리발이라는 것에는 이황과 동의하지만 함의는 완전히 다르다. 기대승은 마음의 기가 자연발현하는데 과불급이 없다면 그 때가 리발이고 사단이라고 한 것이다. 마음의 기가 어떤 때는 본체인 리를 그대로 드러내 주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므로 어디까지나 기가 작용한 결과가 리에 합치한 것이다. 기대승은 감정은 리인 본성이 드러난 것이라고 보는데, 마음의 기가 발현하는 것이므로 기가 리를 드러내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감정은 기만으로 말하거나 리만으로 말할 수 없다고 하여 항상 兼理氣 有善惡으로 설명한다. 兼理氣 유선악의 감정 중에서 결과적으로 사회적 규범에 적합한 감정을 사단이고 중절한 칠정이며 善一邊이라는 것이다.
기대승은 모든 감정의 근원은 리인 본성에 있으므로[發於理], 형기와 관계되는 칠정이라고 해도 氣發로 볼 수 없다고 하였이다. 이것은 기대승이 감정의 발생경로와 근원을 둘로 보지 않은 것이다. 모든 감정은 심의 기가 저절로 발현한 것이고 그 근원이 리인 본성에 있다는 주장이 결국 기가 이다. 그러므로 애초에 사단과 칠정을 구분하여 리와 기로 나누는 것은 성립할 수 없으므로 논변과정에서 기대승이 말하는 리발은 발어리의 의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3-3.
이이는 기대승이 논변을 발전시켜 이황의 사칠론의 호발을 비판하고 이황의 氣發理乘만 가져온다. 그러나 이이의 기발리승은 자신의 철학적 입장에서 이황의 용어를 차용한 것이므로 이황이 말하는 칠정 기발리승과는 함의가 다르다. 이이는 理無爲와 氣有爲에 근거하여 형이하의 기에만 자발적 활동 역량을 인정하므로 정의 발생 과정을 기발리승으로 설명한 것이다. 이이는 마음이 외부 사물의 자극에 움직인 이후 즉 情으로 발한 이후를 문제 삼게 된다. 외부사물의 자극에 마음은 반응하게 되어 있고 이러한 자극-반응의 기제인 지각의 단계는 자연발생적인 것이 정이다. 마음이 지각하고 움직여서 나온 정에서는 사단과 칠정이 사실상 구분되지 않지만 이이는 이러한 정 전체를 칠정으로 본다.
이이는 외부사물의 자극에 의해서 이미 움직인 마음에서 저절로 나온 정 자체에 대해서는 어떠한 제어도 불가능하다고 본다. 이황은 마음이 막 움직이려 할 때를 이이는 마음이 움직인 이후에 주목하는 것에서 차이가 있다. 이것은 이황은 감정의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보고 있다면 이이는 감정자체를 크게 의식하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수양의 문제에 있어서도 이황은 감정의 조절을 중시하여 사단이 마음속에서 잘 유지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이이는 감정의 결과를 판정하는 기준으로써의 리의 인식을 중시한다.
이이는 자연발생적으로 생기는 감정에 의식[意]이라는 판단이 더해져서 도심과 인심이 구분되는 것으로 보았다. 사단은 순수한 천리의 발현인 도심이라고 할 수 있지만 칠정은 심의 총칭이 되므로 단지 인심이라고 할 수 없게 된다. 칠정은 인심도심의 선악을 포함하는 것이고, 사단은 이러한 칠정 중에서 선일변이므로 사단은 도심이면서 선한 인심에도 해당된다. 이이는 정-의식-인심도심으로 구분하기 때문에 정(칠정)은 겸선악으로 사단은 선일변으로 인심도심은 양변설로 논의해야 하므로 이황의 사칠론이 성립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3-4.
이황이 사단과 칠정을 성의 본연과 기품의 관계와 일치시켜 리와 기로 나누는 것을 이이는 성을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의 두 가지로 나눈 것으로 이해한다. 이황이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의 두 가지 성이 있다고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의 소종래를 논의하면서 성에 그 관계를 유비시켰고, 사단이 본연지성에 발한 것이라고 했기 때문에 칠정은 기질지성에서 나온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에 이이가 지적한 문제점이 분명히 있다. 이이는 이황의 사칠론을 내출외감설로 규정하고 그 논거로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을 구분한 것을 들어 호발설을 무력화시킨다. 이 때문에 마음의 근원을 둘로 나눈 것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며, 퇴계학파는 이황의 사칠론에서 가장 이론적으로 취약한 고리로 인식하게 된다.

4.
이익은 현실적인 모든 현상은 기의 발현[氣發理乘一途]이라고 주장하는 이이와 율곡학파에 대해 모든 현상은 리의 발현[理發氣隨一路]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으로 사단과 칠정이 모두 기발리승이라는 이이의 주장을 반박하는 것인데, 이익은 사단은 리발이고 칠정 역시 형기를 매개로 하지만 리가 반응하는 리발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이이의 리무위 기유위도 부정되는데, 이익은 사단이든 칠정이든 모두 리의 작용이라고 주장한다. 리가 기에 대해서 주재력을 가질 뿐 아니라 스스로 작용성을 가지므로 사단과 칠정도 리의 발현이라고 보는 것이다. 리와 기의 작용은 언제나 두 가지가 합해져야 하는 것이며, 이점에 있어서는 이황의 사칠론과 맥락을 같이 한다.

4-1.
이익은 사단이든 칠정이든 외부 사물이 자극이 있어야 반응이 일어난다고 본다. 외부 사물에 자극 받고 반응하는 것은 항상 심속의 리인 본연지성이다. 이익은 사람의 성은 기질지성 하나만 인정하지만 리는 언제나 기에 대해 주재력을 가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는 기질지성만 인정하더라도 성의 핵심에는 주재하는 리가 있어서 기질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모든 감정과 행위는 리가 발한 것이 된다. 결국 모든 정은 하나의 성에서 나온다고 보기 때문에 소종래의 의미는 사라진다. 다만 리가 곧바로 나왔거나 형기를 거치면서 나왔는가에 따라 인심과 도심, 사단과 칠정이 갈릴 뿐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형기와 심기는 기의 측면을 말한 것일 뿐, 실제 마음의 작용은 리와 기가 합해져서 일어나고 그 주도권은 늘 리에게 있다. 이것이 이익이 말하는 리발기수일도설이다.

4-2.
이익은 모든 것이 리의 발현이라는 리의 작용성을 전제로 기발리승도 말하고 있다. 이이는 리는 작용성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기발리승을 말하고 있으며 이때의 리는 기에 영향을 미칠 수 없고, 오직 기의 상태에 따라 은폐되거나 드러날 뿐이다. 그런데 이익의 기발리승은 이이와 다를 뿐만 아니라 이황의 기발리승과도 차이가 있다. 이황의 기발은 기가 주도하는 것인데 이익의 기발은 그런 의미가 없다. 이때도 발하는 주체는 리이고 리가 드러나는 것이지만 형기를 거친다는 의미에서 기발이라고 한 것이다.
이익이 사단은 리발기수이고 칠정은 기발리승이라는 이황의 명제를 따라서 분석하지만, 사단이나 칠정의 근원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 감정의 발생 경로는 본연지성인 리가 형기를 거치지 않고 곧장 심기에서 작용하면 사단이 되고, 형기를 거쳐서 심기에서 작용하면 칠정이 된다.

4-3.
이익은 사단과 칠정은 별도로 존재하며 그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사단은 타인을 향한 감정이며 칠정은 자신의 형기에 입각한 감정이다. 이러한 감정은 함께 있을 수도 있다. 사단은 리가 곧바로 발현한 것이므로 이미 순선함과 완전함이 보장된 것이다. 칠정은 본연지성에서 발현한 것이기 때문에 본래는 선하지만 형기를 거치게 되므로 조절하지 않으면 쉽게 악으로 흐를 수 있다.

4-4.
이황은 미발함양이라는 방법을 통해 지속적으로 오랜 시간 수양을 거쳐서 마음의 주재가 확립되어야 비로소 칠정의 과불급을 조절할 수 있게 된다. 이익도 사단은 칠정과 달리 불학이능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에 저절로 나오는 감정은 아니다. 또한 모든 사람이 사단이 칠정과 동시에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칠정이 없는 사람은 없고 칠정 자체에 사단의 흔적이 있다고 하였다.
사단이 없는 사람이라도 칠정 속에 사단의 흔적이 있으므로, 약간의 노력만 들이면 칠정의 과불급을 제어하고 조절하는 기제는 바로 사태마다 동시에 발현된 사단에서 즉각적으로 찾을 수 있게 된다. 이익이 칠정 밖에 사단이 따로 있다고 하는 것은 감정의 소종래를 찾는 대신 발현된 마음에서 감정을 제어할 수 있는 근거를 찾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황처럼 소주 소종래를 따질 필요가 없어지고 미발함양과 같은 오랜 시간에 걸친 지속적인 노력이 요구 되지도 않는다.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215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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