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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書≫의 ≪史記≫ 變容 樣相을 通해 본 史官의 글쓰기 : 从≪史记≫与≪汉书≫的差异论史官的写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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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양중석

Advisor
오수형
Major
인문대학 중어중문학과
Issue Date
2012-08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司馬遷班固史記漢書史官正史紀傳體
Description
학위논문 (박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중어중문학과, 2012. 8. 오수형.
Abstract
본 논문은 二十五史의 첫머리에 있는 兩大史書인 司馬遷의 ≪史記≫와 班固의 『漢書』에서 동일한 사건을 서술하는 樣相의 차이를 살펴보고, 이를 근거로 두 작품의 경향성을 밝히고자 집필되었다. 前漢 武帝 시기에 司馬遷은 通史인 ≪史記≫를 완성한 지 150여 년이 지난 後漢 明帝 시기에 班固는 斷代史인 ≪漢書≫를 저술했다. 班固는 漢의 성립에서부터 漢 武帝 시기까지의 기록에 대해 대부분 司馬遷의 기록을 답습했으나, 둘 사이에는 일부 주목할 만한 차이점도 발견된다. 本稿에서는 ≪史記≫와 ≪漢書≫에서 보이는 이러한 차이를 실증적으로 고찰하려고 시도했다. 각 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2장에서는 초기 史官의 역할과 역사 서술의 효용에 대한 고찰을 통해서 역사 서술의 본래 목적과 사관의 實體에 대해 살펴보았다. 역사서술은 본래 승자에게 봉사하는 史官들이 남긴 기록이다. 르네상스 시기의 名畵들이나 귀족 문학인 賦와 마찬가지로 사관의 활동이 지속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이들의 작업에서 효용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史官들은 승자의 역사를 진실하고 필연적이라 선전하면서 敗者들을 戱畵化했으며, 勝者에 맞선 敗者들의 행동을 평가할 적에는 유독 엄격한 잣대를 적용했다. 결국 목숨을 걸고 直筆을 지켜내는 史官은 승자의 기록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점을 확인하고자 했다.
3장에서는 司馬遷이 기존 역사서술에 불만을 품고 이를 자신의 방식으로 재구성한 모습을 살펴보았다. 父親의 유언을 계승하여 저술에 착수한 司馬遷은 도중에 겪은 宮刑의 치욕을 참아내고 大業을 완수한다. 기존의 사관들이 勝者 中心의 역사를 서술하려고 했다면 司馬遷은 敗者들의 역사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 司馬遷은 역사서술을 통해 孔子가 ≪春秋≫를 통해서 이루어냈던 작업을 재현하여 인물들에 대해 나름의 포폄을 가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승리자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패배자들의 입장을 대변해 주는 것에 관심을 기울였다는 점은 司馬遷을 기존의 사관들과 구별 짓는 가장 큰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司馬遷은 개별 주인공 입장에서의 서술을 가능하게 만든 紀傳體를 창안하여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기록했다. 왕조에 직접적으로 대항할 수는 없었지만, 『史記』 곳곳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은유적인 방식을 통해 왕조에 거역했던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사실 諸侯나 功臣들에 관한 기록인 世家라는 명칭은 이미 ≪孟子≫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戰國策≫이나 ≪呂氏春秋≫ 등에서 보이는 에피소드 중심의 章節 구분에서도 紀傳體의 萌芽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史記≫의 기전체가 주목받는 이유는 一回性의 사건 서술에 그친 것이 아니라, 司馬遷 이전의 모든 역사시대를 포괄하려는 시도 때문이다. 더구나 자료의 수집과 정리가 쉽지 않았던 시기에 왕조의 후원도 없이 이루어진 개인의 작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史記』의 가치는 더욱 부각된다.
마지막으로 4장에서는 司馬遷과 비교하여 班固의 역사서술 방식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司馬遷 死後에 班固는 ≪史記≫ 紀傳體의 형식을 수용하여 漢의 斷代史를 기술했다. 『漢書』를 저술하는데 있어 ≪史記≫의 형식과 내용을 참고한 것은 사실이지만, 司馬遷과는 다른 삶을 지향했던 班固는 司馬遷이 기술했던 개인의 역사를 王朝 中心의 역사로 정교하게 再編하였다. 2장에서 살펴본 대로 史官의 본래 역할은 후원자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다. 後漢時期 왕조의 요구는 漢 皇室의 정통성을 강화하고 儒家思想으로 대표되는 통치이념을 강조하는 것이었으며, 이를 충실히 구현한 班固의 작업은 사관의 전통적인 역할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司馬遷이 西漢 初 비교적 자유로운 학술 사상적 분위기 속에서 살았던 것에 비해 班固는 劉氏가 王莽에게서 다시 정권을 찾은 지 얼마 되지 않은 東漢 시기를 살았다. 諸子百家의 사상활동이 자유롭게 펼쳐졌던 戰國時代의 향수에 빠져 있던 司馬遷은 一家之言을 이루어 자신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으나, 이미 儒學이 중심이 되어버린 시대를 살았던 班固는 皇室의 역사를 儒家的 觀點에서 서술했다.
이후의 역사 서술은 주로 집단 창작으로 완성되었는데, 그 경우에 인물 별로 나누어 기술하는 기전체 형식은 사관들에게 작업상의 편의를 제공했다. 二十五史의 始祖로 ≪史記≫를 꼽는 것은 단지 후대의 역사 서술이 기전체 형식을 따랐기 때문에 불과하며, 실제로 후대 사관들에게 유용한 모델을 제시한 것은 왕조 중심의 역사 서술이라는 명료하고 안전한 평가의 기준을 세워준 班固의 ≪漢書≫였다.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21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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