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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초기 서울지역 극장문화 형성과정 연구 : A Study on the Formation of Theatre Culture of Early Modern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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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백두산

Advisor
양승국
Major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Issue Date
2017-02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극장극장문화전통연희관객성협률사연흥사원각사단성사장안사광무대창극신연극신파극식민지 근대종족공간
Description
학위논문 (박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국어국문학과, 2017. 2. 양승국.
Abstract
이 논문은 1880년대부터 1910년대의 서울지역 극장관련 자료의 분석을 중심으로 한국의 근대 초기 극장문화의 형성을 둘러싼 사회적 기획과 문화적 효과를 고찰하였다. 이 논문에서는 특히 근대 초기 서울지역의 극장문화가 전통, 근대, 식민지가 혼효되는 과정에서 외래 극장문화의 이식과 수용만이 아닌 전통 연희문화의 지속과 토착화의 과정으로 전개되었으며, 조선인 대중극장은 1900년대에는 도시의 문화적 매력을 대표하는 상류 문화공간으로, 1910년대에는 종족공간으로 형성되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근대 초기 서울지역의 극장문화는 관객성과 관람관습, 극장건설과 자본의 운영, 흥행방식이 형성된 역동적인 시기/공간으로, 근대 초기 문화영역에서 전개된 식민지 근대성의 흐름을 성찰하는 연구대상으로 제기된다.
Ⅱ장에서는 근대 초기 극장문화의 전개를 통시적·내재적 기준으로 조망하고자 18-19세기 한성부의 시정(市井) 민간연희의 전개와 연희인식의 변화 과정을 살펴보았다. 문희연과 사연, 기방, 저자, 성외 경강지역에서 벌어진 조선 후기의 민간연희는 한성의 상업도시화 현상과 궁중연희 축소를 배경으로 번성하였다. 전통예인들은 자생적인 조직체계를 갖추었고, 단속의 주체였던 관(官)은 연희활동에 깊숙이 관여하였다. 지방민 유입에 따른 문화유통 현상과 경강지역 유흥공간의 확대, 기방(妓房)과 저자에서 나타나는 연희의 전파와 확산, 문희연과 같은 대규모 공연활동을 통한 장시간 공연체제 정착, 전기수(傳奇叟)의 구술문화적 특성은 조선 후기 전통 연희문화의 변화 과정으로 주목할 만하다.
상·하층 남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조선 후기 연희 관람자들은 왈자와 기층민의 연희관람에서 보듯 청각을 중심으로 연희를 향유하며, 유희적인 관람성향을 보였다. 극장의 객석은 계층적 위계질서에 의해 구성되었다. 중인 부호층은 문화자본 획득을 희망하며 연희활동의 후원자로 부상하였다. 민간연희의 활성화와 사행(使行) 경험, 중국 희곡의 전파를 배경으로 지식인들의 전통연희에 대한 안목은 높아졌고, 여항문화를 묘사한 한문희곡이 창작되었으며, 극장문화에 대한 관심이 점증하였다. 그러나 궁정사회의 유교적 도덕률에 따라 성내 중심공간의 연희활동은 제한되었고, 상설적 연희공간은 등장하지 않았다.
Ⅲ장에서는 개항기(1876-1910) 한성부의 극장문화를 대상으로 논의를 진행하였다. 한성 개시장 이후 외인들의 공연활동이 유입되었고, 1890년대에는 한성 내 중국인 극장(淸人戲劇場)이 등장하였다. 외인 연희문화는 조선인들의 대중적 연희공간 모색을 자극하여 1899년부터 아현동과 용산에 최초의 상업적 상설 연희공간인 무동연희장(舞童演戲場)이 출현하였다. 용산 무동연희장의 운영은 외인-관권-자본이 결합된 극장설립 모델을 보여주는 징후적 사건이었다. 1902년 등장한 협률사(協律社)는 연희활동을 독점 중개하고 극장연희를 주관한 최초의 연희회사이며, 궁내부 희대(戲臺)는 다목적 회관 건물로 건설되어 중국과 서구극장의 구조를 참조하여 개축한 최초의 대중극장이었다. 창부(倡夫)의 판소리와 관기(官妓)의 가무를 중심으로 공연하였던 협률사는 관람료를 낮추는 등 관객층 확대에 관심을 기울였으나, 동대문 활동사진관이 개장되자(1903) 성세가 꺾였고 영업부진과 전황(錢荒)으로 폐관하였다.
러일전쟁(1904) 이후 본격화된 일제의 침략정책은 한성 극장문화의 전개에 영향을 주었다. 일본인 거류민 증가와 일본식 유흥문화를 배경으로 유곽과 일본인 소극장이 건설되었다. 기존 상회사 체제가 해체되며 자유시장이 된 한성의 극장사업에는 외국인과 협력하여 조선인 대중극장이 들어서게 되었다. 마전(馬田)활동사진관, 장안사(長安社), 광무대(光武臺), 단성사(團成社), 연흥사(演興社)가 건설되어, 희대에 원각사(圓覺社)가 들어선 1907-1908년 경 북촌 조선인 극장가의 골격이 마련되었다. 연극개량론을 배경으로 광무대를 위시한 조선인 대중극장은 단형 창극의 형식을 발전시켰다. 이인직의 신연극 공연(1908)은 창극의 형태를 빌려 민권의식을 담은 정치연설의 감각을 무대에 표현하려는 기획이었으나, 연설의 감수성을 표현하는 본격적인 시도는 1910년대에 이루어졌다.
개항기의 조선인 대중극장은 전통적 관객성과 판소리· 가무 중심의 관람 취향이 지속된 공간이었으며, 극장가기(theatregoing)는 유희공간에 놀러 간다는 인식이 강하였다. 극장의 여성관람층 증가와 기생의 존재는 개항기의 극장문화에 나타나는 관음증의 문화를 형성하였다. 창극의 등장은 개항기 극장개량의 성과로서, 판소리 이외에도 나 광대의 무언극, 중국 전통음악극의 영향이 보인다. 이 시기의 창극은 장·막의 변화를 연결하지 못하는 단형 창극의 형식이었다. 황실을 은유하던 홍보 전략과 대관(大官)의 관람을 통해 개항기 극장은 상류층의 도락(道樂)이자 시골과 대비되는 도시문화로서의 매력을 지닌 문화공간으로 인식되었고, 저녁 무렵 극장가에 울려 퍼진 취주(吹奏)는 일군의 유희적 관객을 자극하는 도시의 사운드스케이프(soundscape)로 작용하였다.
Ⅳ장에서는 1910년대 경성의 극장문화를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하였다. 한일합방 이후 경성의 남촌지역은 정치·경제·문화적 중심지로 조성되어 유곽과 전문활동사진관이 남촌을 중심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거주공간 및 유흥공간은 일본/조선인 공간으로 나뉘어 남·북촌 사이에는 점차 경제·문화·종족적 경계가 형성되었다. 1910년대 근대적 여가공간의 등장은 여가(leisure) 개념의 확산을 가져왔고, 일제의 극장통제와 검열 과정은 여가의 합리화 과정을 표방하며 위생과 풍속의 논리에 따라 일본식 극장문화를 이식할 것을 유도하였다. 1910년대 전문활동사진관 건설과 배급망 독점으로 확립된 일본계 자본 중심의 경성 극장 흥행업의 구도는 조선인들의 활동사진 흥행과 극장흥행업 진출을 어렵게 하였다. 1910년 초·중반 북촌의 극장은 속속 폐관되었다. 극장환경의 악화로 1910년대 중반 이후 신파극의 경성 공연활동은 위축되었으나, 구파 연희는 기생의 조직적 활동과 광무대의 존속을 바탕으로 요리점과 야외 가설무대로 공연공간을 넓혀가며 1910년대 주요 극장공연 형식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조선 신파극과 활동사진의 변사는 연설조의 독특한 음성연기로 계몽적 분위기를 극장 내에 구현하였고, 조선인 극장에는 일본식 무대기술과 공연방식이 도입되었다. 이 시기 해설자 관습과 무대배경·장치 도입을 바탕으로 극서사는 장편화되었고, 신파조 음성연기를 통해 관객은 대사에 집중할 수 있었으며, 이후 일본 가정비극류 신파극 공연을 거쳐 연기양식이 정착되었다. 구파 연희 역시 신파양식에 정착된 무대기술과 공연 구성방식을 수용하여 전통연희를 혁신한 레퍼토리를 제작하였다. 조선인 극장의 공연예제는 혼효되어, 재담과 신파희극은 신ㆍ구파 극단의 공연예제로 각광받았다. 조선식 마찌마와리나 극장에서의 취주 관습은 조선인 극장문화의 고유한 특징으로 남았다. 신·구파 연희의 레퍼토리 역시 실화·전설의 극화, 신소설·고전소설의 각색을 통해 점차 조선 관객들의 기대지평에 맞추어 토착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1910년대 입장료 인하, 신문연재소설의 공연, 연예면을 다루는 신문매체의 전략, 서양연극예제 공연은 극장 관객층의 확대에 기여하였다. 1910년대 극장은 여전히 소란한 공간이었으나, 신파극 공연에 나타나는눈물의 반응과 관람위계의 형성, 임검순사의 존재를 통해 극장은 점차 근대적 관람관습을 훈육하는 공간이 되었다. 레퍼토리와 극장관습이 토착화되고, 구파연희가 활발히 공연되었던 1910년대 조선인 대중극장은 종족적 공간으로 편성되어 갔다. 한편으로 종족공간으로서의 근대 초기 극장은 임검순사와 일본인 종업원으로 대표되는 식민지의 위계질서 경험을 내포한 공간이었다. 1910년대의 극장공간의 특징은 일제강점기 식민지 근대의 문화적 풍경과 종족공간의 형성을 보여준다.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2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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