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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1971년 대학 학생운동 연구 : A Study on University Student Movements in Korean from 1960 to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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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오제연

Advisor
김인걸
Major
인문대학 국사학과
Issue Date
2014-02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학생운동대학대학생대학문화민족주의이념서클후진성민중
Description
학위논문 (박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국사학과, 2014. 2. 김인걸.
Abstract
1960~1971년 대학 학생운동 연구

오제연

본고는 1960년 4월혁명 이후 약 30여 년 동안 민주화를 비롯한 한국사회의 주요 논점들을 제기하고 이를 관철시킨 대학 학생운동의 초기 국면(주로 1960년대)을, 그 주체인 대학생들의 존재조건, 경험, 문화, 이념, 조직 등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1950년대 대학생들은 대학이라는 공간 속에서 지도적 엘리트로 규정되어 사회를 선도할 잠재력을 갖췄고, 대학의 급속한 팽창 과정에서 그 수가 급증하여 집단으로서 물리력도 함께 갖게 되었다. 또한 당시 대학생들은 학도호국단의 통제와 동원에 시달리면서도 정치적으로 물리적 힘을 사용하는 법을 익혔다. 1950년대 그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취급했던 외부의 규정으로 인해, 또 그들 내부에서 새롭게 등장한 축제와 같은 대학문화를 통해 대학생들의 집단정체성이 강화되면서 이러한 물리력이 결집하여 분출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그리고 모의국회나 토론회 같은 학술 행사를 통해 지도적 엘리트에 걸맞는 정치적 훈련과 각성의 기회, 그리고 대학생 상호의 접촉과 교류의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이는 학생운동의 필요조건이 될 수 있었지만 충분조건은 될 수 없었다. 오히려 1950년대 대학과 대학생의 존재조건은 모순된 면이 있었고, 그들의 정치적 경험과 문화도 학생운동의 구심력이 아니라 원심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었다.
1950년대 대학은 국가 발전에 필요한 전인적 지도자 양성 기관으로 규정되었으나, 실제 대학은 국가의 통제에 시달리며 동시에 병역기피자와 모리배의 소굴이라는 지탄을 받고 있었다. 대학생들 역시 질적으로 하락하고 나약하고 무기력하다는 비판을 자주 들었다. 학도호국단의 통제와 동원이 대학생들의 자치적인 활동을 크게 제약하고 그들을 체제 순응적인 방향으로 이끄는 힘도 강했다. 대학생의 양적 급증이 자연스럽게 그들의 집단정체성을 약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도 있었고, 모의국회나 토론회 같은 학술 행사는 학생들을 관심과 활동의 폭을 학술이라는 틀 안으로 제한함으로써 오히려 학생들을 탈정치화할 수 있는 가능성도 있었다. 따라서 1950년대 대학생들 사이에서 형성된 학생운동의 필요조건들이 실제 학생운동으로 분출하기 위해서는, 그 조건들을 학생운동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매개, 즉 선진적인 이념과 조직이 필요했다. 그리고 미약하나마 그 매개로서 이념서클이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다.
1950년대 중반 이후 미소의 평화공존과 제3세계 비동맹운동이라는 국제적 차원의 냉전체제 변화 속에서, 일부 진보적인 대학생들이 1945년 영국 노동당 집권과 1951년 프랑크푸르트 선언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민주사회주의를 대안적 이념으로 적극 수용하면서 드디어 대학 내에 이념서클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서울대 문리대의 신진회, 서울대 법대의 신조회, 고려대의 협진회와 같은 민주사회주의 이념서클들은 서클 멤버들이 다른 곳에서는 하기 힘든 진보적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또 구하기 힘든 진보적 서적들을 접할 수 있는 의미 있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아직 이념서클의 영향력은 미약한 상황이었다.
1960년 4월혁명이 일어났을 때 대학생들은 뒤늦게 전면에 나섰지만 결국 이승만 정권을 붕괴시켰다. 대학생들은 순수와 질서를 앞세워 도시빈민들을 배제하고 혁명의 주체를 자임했다. 그리고 이 나라의 지도적 엘리트로서 근대적 국민국가 완성을 위해 적극적인 현실참여를 시도했다. 현실참여가 대학생의 당위가 될 수 있었던 중요한 근거는 한국이 신생국, 후진국이라는 사실이었다. 대학생들의 현실참여 의지는 후진성 탈피라는 당면 과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민족주의 고양과 민족주체성에 대한 갈망으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학생들은 자신들의 현실참여 의지를 실천하기 위해 집단적 힘을 가지고 본격적인 학생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4월혁명 직후 학생들은 학원민주화운동과 계몽운동에 나섰다. 계몽운동은 대학생들이 혁명주체로서 4월혁명의 완수를 위해 전개한 하나의 방법론이었다. 그 궁극적인 목표는 자립경제 수립으로 후진성을 극복하여 국민국가를 완성하는 데 있었다. 당시 계몽운동은 객관적인 여건이 성숙되지 않은 상태에서 학생들의 의지만을 가지고 추진되었기 때문에 큰 성과를 거두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 성과와는 별개로 계몽운동은 학원민주화운동과 함께 학생들이 목표 달성을 위해 보다 근본적인 방법론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정치적 경험이 되었다.
후진성의 근본원인으로 분단이 지목되었을 때 그 해결책은 통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 분단이 외세에 의한 것이라고 했을 때 자주적인 통일을 추구하게 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계몽운동 과정에서 한국사회 후진성 극복의 구체적 방안으로 제시된 자립경제 수립은, 통일논의에서도 핵심적인 주장으로 제시되었다. 때문에 통일 문제는 곧 대학생들 사이에서 주요 관심사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1950년대부터 활성화된 각종 토론회와 강연회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대학생들의 통일운동 과정에서 이 운동을 주도하는 조직으로 서울대를 비롯한 각 대학에 민족통일연맹(민통련)이 만들어졌다. 민통련은 빠른 속도로 조직을 확장시켜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힘을 확보했으나, 동시에 조직적 균열도 심화되었다. 이 균열은 그들이 함께 추구한 민족주의 이면에 자리 잡은 민족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차이, 역시 그들이 함께 주장한 남북협상론 이면에 자리 잡은 非美非蘇 평화공존과 제3세계 민족해방 사이의 강조점 차이, 그리고 혁신계와의 연계에 대한 입장 차이 등으로 인해 발생했다.
곧바로 일어난 5.16쿠데타로 민통련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대학의 존재조건도 크게 바뀌었다. 학생운동은 새로운 존재조건 속에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대학생들은 민족적 민주주의를 내세운 군사정권에 대해 일정한 기대를 갖고 협력도 하였으나, 한일회담반대운동을 계기로 박정희 정권과 학생들의 민족주의 사이에는 균열과 분화가 뚜렷해졌다.
박정희 정권은 민족주의를 근대화, 정확히 말하면 경제성장, 생산력증진을 위한 국민 동원 수단으로 활용했다. 이는 한국인들 사이의 점증하는 민족주의를 경제건설의 동력으로 이용하고자 한 1960년대 미국의 대한정책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즉 통일문제와 민주주의 문제를 배제하고 오직 산업화만 강조하는 근대화론이 박정희 정권의 민족주의의 실내용이었던 것이다. 반면 학생들은 4월혁명 이후 통일운동 과정에서 확산된 三反(반봉건, 반외세, 반매판)테제에 입각한 민족혁명론적 지향을 가지고, 비민주적이고 불평등적인, 외세의존적이고 반통일적인, 예속적이고 매판적인 현실에 저항하며 박정희 정권과 대립하였다.
쿠데타로 인해 능동적인 현실참여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대학생들은 우선 학내 행사에 주력했다. 특히 이 시기 각 대학에 축제가 확산되었는데, 이 축제에서 거행된 몇몇 정치풍자 프로그램들은 학생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고 자연스럽게 정부에 대한 학생들의 비판의식도 커졌다. 또한 군사정권은 대학생들을 농촌운동에 동원하여 그들의 현실참여 의지를 순치하려 했으나 이 운동은 농촌으로 상징되는 강력한 민족주의 이념에 따라 한일협정반대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넓히는 측면도 있었다. 미군범죄에 항의하며 쿠데타 이후 최초로 전개한 한미행정협정 촉구시위 역시, 학생들 스스로 이 시위가 반미나 반정부가 아님을 분명했지만 학생들의 민족의식과 주체적 역량을 끌어올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1962년 한미행정협정체결 촉구시위에 앞장섰던 학생들을 중심으로 각 대학에 민족주의를 앞세운 이념서클들이 속속 만들어지면서 학생운동의 역량은 크게 신장되었다. 그리고 이들 이념서클의 주도 하에 1964년부터 박정희 정권의 굴욕적인 한일회담 추진을 반대하는 거대한 항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똑같은 반외세, 반매판의 민족주의를 앞세웠지만, 이념서클 혹은 회원들 사이에는 과거 민통련의 균열과 마찬가지로 그 바탕에 깔린 이념적 기반의 차이가 존재했다. 결국 한일회담반대운동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이들 이념서클은 해체되거나 큰 타격을 입어 학생운동이 일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박정희 정권이 권력을 강화하고 양적 경제성장을 추진하면서 한국사회의 구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경제성장이라는 사회경제적 변화에 따라 국가가 대학에 요구하는 목적이 기존의 전인적 지도자 양성에서 고급 기술인력 양성으로 바뀌면서, 대학생들의 위상도 지도적 엘리트에서 기능적 엘리트로 점차 변화하기 시작했다.
사회경제적 구조와 대학의 존재조건이 변화하면서 학생들의 의식도 미묘한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4월혁명 이후 확립된 대학생들의 엘리트로서의 자신감과 사명감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고민도 함께 등장하고 있었다. 특히 대학생들은 경제개발 과정에서 심화된 빈부격차와 부정부패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이는 경제성장의 이면에서 발생한 문제들을 대학생들이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1960년대 후반기 학생운동이 사회 전반에 대한 민주화를 지향했던 근본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또한 대학생들은 민족주체성과 민족문화 진흥과 같은 박정희 정권의 지배논리를 일정정도 공유하면서도 정권에 의해 배제된 민속에 주목했고, 자신이 직접 탈춤을 배워 이를 연행하면서 민속의 주체인 민중에 대한 문제의식을 심화시켰다. 그리고 새로운 문화 창조와 민중에 대한 관심은 학생들을 복고주의가 아닌 현실참여로 나아가게 했다. 이 과정에서 문화는 정치의 우회로로서 학생운동에서 점차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1960년대 후반 학생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집회나 시위에 대한 처벌 강화는 물론 일상적인 행사에까지 개입하여 학원을 통제하려 했다. 특히 안보위기를 거치면서 대학에 교련수업을 도입하고 이를 강화하면서 학원 병영화까지 시도했다. 학생들은 이에 반발하며 교련반대운동을 전개했다. 교련반대운동은 결국 학원 민주화를 거쳐 민중의 생존권을 옹호하고 부정부패를 비판하는 사회 민주화로 나아가는 시작점이었다.
사회 민주화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경제개발로 인해 심화된 불평등의 모순으로 고통당하는 민중에 대한 학생운동의 관심은 조금씩 커졌다. 특히 전태일 분신사건과 광주대단지사건은 이를 촉진시켰다. 이제 학생운동의 이념으로 기존의 민주, 민족과 더불어 민중이 자리 잡을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4월혁명으로 정립된 1960년대의 三反(반봉건, 반외세, 반매판)은 박정희 정권의 독재 권력 강화와 양적 경제성장의 모순이 심화되면서 1970년대에 들어와 三民(민중, 민주, 민족)으로 그 중심이 옮겨졌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1960년대 후반 각 대학에서 재편성 된 이념서클이 있었다.
1964년 계엄령, 1965년 위수령으로 침체되었던 민족주의 이념서클은 1960년대 후반 다시 활성화되었고, 상호간의 접촉과 교류, 연대와 조직화를 촉진시켰다. 그러나 1971년 10월 15일 박정희 정권의 위수령 발동으로 학생운동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약 10년간의 학생운동 초기 단계는 이렇게 마무리 되었다. 이제 학생운동은 그동안의 공개적인 이념서클을 위주로 한 활동을 접고, 보다 은밀하게 지하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전의 이념서클 보다 훨씬 더 체계적인 사회과학 학습으로 무장한 새로운 언더서클들이 등장하여 유신체제의 사찰과 탄압을 피해 학생운동을 이끌었다. 학생운동의 새로운 국면이 열린 것이다.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2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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