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owse

新羅 眞骨 硏究

Cited 0 time in Web of Science Cited 0 time in Scopus
Authors
이재환
Advisor
송기호
Major
인문대학 국사학과
Issue Date
2015-02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眞骨王位繼承貴族官僚制會議國學
Description
학위논문 (박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국사학과, 2015. 2. 송기호.
Abstract
신라의 骨은 일상 생활 및 정치적 영역에서 그 외의 집단과 격절되는 특권을 인정받는 최상위 신분층이었다. 大阿飡에서 伊伐飡까지의 최고위 官等을 다른 宗은 받을 수 없도록 한 규정을 통해서 骨들은 최상위 官職들을 독점할 수 있었다. 7세기 초에 薛罽頭가 用人에 있어서 骨品을 논하는 데 대한 불만을 표한 바 있으므로, 이 시기에는 이미 官人 등용에 있어서 ‘骨’과 ‘非骨’의 차별이 제도화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眞興王代에 활동한 斯多含의 계통이 진골에서 나왔다는 기록과 중고기 왕의 골이 문제가 되는 상황을 감안하면 진흥왕 이전의 어느 시점에는 이미 후대에 골로 분류되는 집단이 형성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들은 喙部와 沙喙部의 지배층을 중심으로 하여 6部 중 나머지 4部와 기타 새롭게 병합된 小國의 지배층 일부를 흡수하여 형성된 신라의 최상위 지배층이 상호 유대를 강화하며 이하의 계층과 격절되는 집단적 정체성을 표방한 것으로, 단일한 父系 親族集團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었다.
이후 골 가운데 일부가 ‘聖骨’을 표방함으로써 다른 骨, 곧 眞骨들과 스스로를 분리시키고자 하였다. 성골은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조건으로 간주되었으므로, 성골의 설정은 ‘王室’ 혹은 ‘王族’의 범주를 규정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현존 자료의 한계로 인하여 그러한 관념을 창출한 시점의 上限을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려운데, 늦어도 眞平王 재위 기간 중에는 이미 그러한 관념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 진평왕 사망 후 다음 왕의 자격 조건으로 거론될 정도에 이르렀음이 인정된다.
처음 성골로 설정된 집단의 범위 또한 현재로서는 확실히 복원할 수 없으나, 적어도 中古의 왕들은 성골이었다는 인식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진평왕 사망 당시 다른 중고기 왕의 자손들이 존재하였음에도 성골 남성으로 인정받지 못했음은 성골의 신분이 부모-자식의 혈연관계를 통해 전달되지만, 경우에 따라 계승이 인정되지 않는 다른 조건이 개입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성골 신분 전달을 위한 조건은 중고기의 성골 창출과 유사하게 진골로부터 ‘왕실’ 혹은 ‘왕족’의 분리를 시도했던 정황을 전해주고 있다고 여겨지는《新唐書》新羅傳의 제1골·제2골 기사로부터 유추할 수 있다. 동일한 골 간의 혼인이 이루어지지 못할 경우 자손이 해당 골의 신분을 유지할 수 없게 하는 ‘族降의 원리’를 통해 두 개의 골 사이에 신분의 격차를 구분해 냈던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성골과 진골 사이뿐 아니라, 진골과 두품층 간에도 적용되었다고 생각된다.
‘족강의 원리’ 하에서 성골의 재생산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남·녀의 수가 일정하게 확보되어야 하는데, 좁은 범위 내에서 혼인이 이루어지다 보니 혼인할 성골 상대자가 없어지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두 여왕의 즉위를 통해 성골만이 왕위에 오를 수 있다는 원칙을 얼마간 연장하였지만, 새로운 성골이 탄생하지 못하자 결국 왕통이 진골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惠恭王代를 전후하여 왕위를 독점해 오던 武烈王 직계 자손들 중 일부가 앞 시기의 성골 창출과 유사하게 다른 진골들과 구분되는 ‘왕족’으로서의 집단적 정체성을 표방하였을 가능성이 상정된다. 그러나 무열왕에서 敬順王에 이르기까지를 모두 진골로 간주하는 인식이 존재하였으며, 신라말 崔致遠의 신분 계층 인식에서도 최상위 신분층은 ‘聖而眞骨’로서, 두 개의 品으로 구분되지 않았음을 보면, 이 때의 제1골 의식이 前後 시기에 실질적으로 기능하지는 못했다고 여겨진다. 아울러 중대의 무열왕 계통과 하대의 元聖王 계통은 서로 통혼이 가능한 관계였으므로, 특정 가계를 중심으로 다른 진골들과 구분되는 통혼권을 이루는 신분 집단이 확립되었다고는 보기 어렵다.
기존에는 진골이 단일한 父系 친족집단에서 여러 개의 家系 및 小家系로 분지화해 나갔고, 하대에 들어서면 이렇게 형성된 小家系들의 대표자들이 왕위를 두고 서로 경쟁하였다고 보아 왔다. 그런데 중대 말·하대 초에 왕위를 둘러싼 대립이 첨예화되어 무력 분쟁에 이른 것은 사실이지만, 그 과정에서 특정 조상을 공유하는 家系가 세력 단위로 표방된 사례는 확인되지 않는다.
왕위 계승에서 나타나는 신라의 특수성은 家系의 분지화가 아니라 사위(女婿)를 통한 왕통의 전달을 인정하는 데 있었다. 사위의 왕위계승권은 상고기의 왕위 계승에 관한 전승에서 나타나며, 이후에도 憲安王의 사위로서 즉위한 景文王의 경우처럼 사위의 자격으로 왕위를 이어받았던 사례들이 보인다. 神德王이나 경순왕 또한 憲康王의 사위와 외손이라는 관계가 왕위 계승의 근거가 되었음을 五廟 배향자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지금까지 분지화한 家系가 왕위를 차지하기 위하여 충돌한 대표적인 사례로 여겨져 왔던 興德王 사후의 왕위계승 분쟁 또한 계승권자인 忠恭의 아들과 사위들이 왕위를 놓고 충돌한 것으로서, 소가계 분지화의 사례로는 보기 어렵다.
사위의 왕위 계승권 인정은 신라 정치 운영의 특징적인 면모로서 기능하였다. 관직 제수에 있어서 왕과의 親屬에 기반한 班序가 중시되었으므로, 왕 또는 왕의 至親과 혼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고위 관직에 오를 수 있는 중요한 기반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왕과의 혼인뿐 아니라 ‘족강의 원리’ 하에서 다른 진골과의 혼인 관계를 맺는 데 실패할 경우, 그 후손은 관직 임명·승진에 있어서의 특권 또한 상실하게 된다. 이러한 체제 하에서 진골은 기본적으로 왕이나 다른 진골과 정권을 다투는 경쟁자였다기보다는 일종의 운명 공동체였다고 할 수 있다.
무열왕 즉위 이후 진골 중에서 왕이 나오게 되었다고 해도, 차기 왕위 계승에 연관될 수 있는 것은 진골 중에서도 왕의 가까운 親屬이나 왕과 혼인 관계를 맺을 수 있을 만큼의 친분을 가지고 있던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정치적 영역에서 나머지 모든 진골들의 정체성은 臣下로서 왕의 휘하에서 국정의 운영을 돕는 官人이라는 데 있었다. 왕의 至親들 또한 직접 왕위에 오르거나 太子로 冊封되어 東宮으로 들어가기 이전까지는 관등과 관직을 띠고 官界에서 활동하는 관인이라는 점에서는 다른 진골들과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기존에는 진골 ‘귀족’이 ‘귀족회의’를 통해 왕위 계승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고 이해해 왔다. ‘귀족회의’를 주재하였던 ‘귀족’ 세력의 대표자가 곧 상대등이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며, 정당한 왕위계승자가 없을 경우 상대등이 왕위를 계승할 제1의 후보자 자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하대에 상대등을 거쳐 왕위에 오른 사례가 많이 확인되는 것은 하대에 왕에게 자식이 없어 상당한 관력을 쌓고 있던 왕의 親屬이 태자로 책봉되거나 왕위에 오른 사례가 많이 발생한 데 따른 결과에 불과하며, 상대등이 ‘귀족회의’를 주재하였을 것이라는 추정도 사료에 근거하였다고 인정하기 어렵다.
지금까지 왕을 제외한 ‘귀족’ 세력들이 모여서 자신들과 관련된 문제를 논의하여 의견을 모으는 회의와, 왕이 다른 ‘귀족’과 동등하게 한 명의 ‘귀족’으로서 참여하여 함께 의논하는 회의를 모두 ‘귀족회의’라 지칭해 왔는데, ‘귀족’들이 자신들의 권익과 관련해서 의견을 제시한 사례는 보이지 않으며, 왕이 회의에 참가하지 않은 경우는 왕의 사망 시점뿐이었다. 왕이 참가한 회의는 다시 ‘회의’와 ‘합의’로 구분할 수 있는데, 통치자가 중요한 문제를 두고 ‘회의’를 열어 다양한 의견을 청취하는 것은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현상으로서 ‘귀족회의’라고 특수화시킬 수 없다. 회의 참석자들의 의견 일치를 전제로 하는 ‘합의’의 경우, 나 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으나, 에 이미 王이 敎의 단독 주체로 분리되어 大衆等에게 敎를 내리고 있음이 확인되므로, 이후의 기록에 보이는 회의가 ‘합의체’라고 볼 근거는 될 수 없다.
진골들은 ‘귀족’들의 의결 기구인 ‘귀족회의’를 통해서가 아니라, 관인의 일원으로서 제도화된 방식에 의해 국정 운영에 참가하였다. 대다수의 진골들이 특정 사안에 대해서 하나의 세력 집단으로서 동일한 의견을 냈던 것도 아니었다. 진골들 내에서도 다양한 입장이 존재하였으며, 진골 신분에 해당하지 않은 이들 또한 여러 가지 이유로 각 입장에 호응하여 함께 세력을 형성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국정 운영 양상을 신라의 특징적인 면모라고는 할 수 없다.
신라의 정치 운영에 있어서의 특별함은 ‘귀족회의’가 아니라 親屬에 근거한 승진이 용인되었다는 점에 있었다고 하겠다. 신라에서는 왕의 至親을 정치로부터 배제한 것이 아니라, 왕과의 親屬 관계가 建官의 기준 중 하나로 중요시되었다. 실제로 왕의 至親들이 관계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신라 국가의 명운을 건 전쟁 기간 동안 外交 활동 및 실질적인 전쟁의 수행에서 이들의 역할은 두드러진 것이었다. 이후에도 늘어난 인구와 영토를 통제·관리하여 신라로부터 이탈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현안으로 떠오른 이후에도 왕과 가까운 親屬 관계를 가진 이들의 역할은 여전히 중요했다.
기존에는 중대에 ‘전제왕권’과 결탁한 ‘관료’ 세력으로서 六頭品을 상정하고, 진골은 왕권에 의하여 주도된 ‘관료화’에 저항하는 존재로 간주해 왔다. 급증한 文人 官僚 수요를 확보하기 위해 설치된 國學이 頭品層을 주요 대상으로 하는 교육 기관이었다고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라의 국학은 최상위 계층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기관으로서, 기본적으로는 진골의 고위층 자제들이 주로 입학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국학에서 수학을 마쳐야만 지방관으로 임명될 수 있다는 규정이 존재하였으며, 왕과 혈연적으로 가까운 진골 고위층 또한 국학을 거쳐서 지방관으로 官歷을 시작하였음이 확인된다.
결국 진골들은 그 자체가 국학에서 교육을 받아 학문적 소양을 갖춘 관인으로서, ‘(전제)왕권’이나 ‘관료제’, 유교정치이념과 육두품 등의 ‘中代’적 지향에 저항하는 세력으로 설정할 수 없다. 신라에서 관부의 분화나 관직의 체계화 등 ‘관료제적 요소’의 진전은 장기적 전쟁의 수행이나 증가한 영토·인구의 관리 등 변화하는 정치적 상황에 대응한 국가 운영 방식의 발전일 뿐, 그 자체가 ‘강력한 왕권’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중대 ‘왕권’이 진골 ‘귀족’들의 권력을 제한하기 위하여 ‘관료화’를 추구하며 시도했다는 ‘개혁’으로 간주되어 온 景德王代 지명·官號의 변경 및 혜공왕대의 ‘復古’ 또한 실질적인 조치였다기보다는, 연이은 災異를 해소하기 위해서 정치 쇄신을 상징적으로 표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진골은 신라말까지 이하의 신분층과 구분되는 상위 신분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였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官人으로 활동하는 길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들 중 일부가 지방세력화했을 가능성도 있으나, 진골 신분을 유지하고 있던 이들의 대부분은 왕경의 다른 진골과의 관계를 확고히 함으로써 기존의 특권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小京과 州治는 신라 중앙이 지방을 통제·장악하는 거점 지역으로서, 지방 중에서는 가장 많은 왕경인 진골이 거주하고 있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眞聖王 3년(889)의 농민 반란 직후 신라로부터 이탈하는 움직임을 가장 먼저 보인 것이 주치와 소경이었으며, 독자세력화의 주체 또한 지방 거주 진골이나 왕경에서 파견된 지방관 출신이 아니었다. 신라의 지방이 혼란에 빠지는 순간, 위기에 봉착한 진골들이 쉽게 거주지나 파견지를 放棄한 것은 소경과 9州가 그들에게 거주지였을 뿐 연고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在地官班을 이루고 있던 村主層들은 자신들의 지역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군사력을 결집하거나, 강한 군사적 능력을 가진 이에게 의탁해야 했다. 지방인 출신으로서 개인적인 武的 능력에 기반하여 召募兵으로서 府나 州의 군대에서 활동하던 이들은 이 틈에 동료들을 규합하여 해당 지역의 군사권을 장악하면서 세력화하였다. 이 과정에서 단기간에 신라는 왕경을 중심으로 한 좁은 영역에 고립되면서 멸망으로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리고 신라 국가의 멸망과 동시에 오랜 기간 동안 최상위 신분층으로서의 지위를 누리던 진골 집단 또한 해체·소멸되기에 이르렀다.
Language
Korean
URI
http://hdl.handle.net/10371/121737
Files in This Item:
Appears in Collections:
College of Humanities (인문대학)Korean History (국사학과)Theses (Ph.D. / Sc.D._국사학과)
  • mendeley

Items in S-Space are protected by copyright, with all rights reserved, unless otherwise indicated.

Brow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