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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말 20세기초 압록강 하구 황초평 분쟁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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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오병한
Advisor
이상찬
Major
인문대학 국사학과
Issue Date
2016-08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황초평압록강한국일본영토 및 국경문제
Description
학위논문 (박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국사학과, 2016. 8. 이상찬.
Abstract
본고의 목적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압록강 하구의 황초평 분쟁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한국과 중국의 압록강 국경의 형성 과정을 밝히는데 있다. 그리고 황초평 형성과 변화 과정, 한국과 청의 황초평 소속에 대한 주장과 논리, 그리고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황초평 분쟁에 개입하는 과정과 그 배경을 이해하려 하였다.
황초평은 정확한 형성 시기를 알 수 없다. 황초평은 압록강의 홍수로 형성된 습지 혹은 갈대밭에서 출발하여 압록강 하구의 섬이 되었다. 황초평은 대소 황초평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이 가운데 소황초평은 1810년부터 1850년까지의 사이에 형성되었다. 대황초평은 소황초평이 압록강 홍수와 조수의 영향으로 그 위치가 한국 연안에서 청 연안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1890년대에 형성되었다. 1900년대가 되면 황초평은 압록강을 중심으로 청 연안에 가까운 섬이 되었다.
황초평 형성과 거의 같은 시기에 만주 봉금이 이완되고 조청 접경지역에 사람의 거주와 개간이 시작되었다. 청 정부는 18세기 중엽부터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를 포함한 만주 전역에 봉금을 실시하고 개간과 거주를 금지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중엽부터 중국의 정치적 혼란과 그 여파로 발생한 유민들이 만주로 이주하여 개간을 진행하였다. 조선과 청 정부는 압록강 일대에서 증가한 인구와 토지 관리를 위하여 군읍과 주현을 설치하였다. 황초평 분쟁은 근대 국민국가 형성 과정에서 변경지역이었던 압록강 하구가 조선과 청의 영토로 편입되기 시작한 시기에 발생하였다.
황초평 분쟁은 19세기 중엽 이후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화와 특성을 반영한다. 1883년 황초평 교섭은 당시 조선과 청 사이에 ‘조공책봉체제’가 아직 유효한 상황에서 진행된 불평등한 교섭이었다. 반면에 1901년부터 시작된 황초평 교섭 당시 한국은 청과의 종래 사대관계를 청한하고 대등한 외교관계를 수립한 상황이었다. 1901년부터 한국은 정부 차원에서 황초평이 한국 소속임을 주장하면서 1895년 이후 청인들의 황초평 침입하여 채취해 간 갈대에 대한 배상과 청인들의 침입 재발을 요구하였다. 한국 정부는 1901년 이후 황초평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소유권을 주장하고 정부간의 교섭을 통하여 이를 확인받으려 하였다.
황초평 분쟁은 19세기 후반 근대 국민국가 형성 과정에서 영토와 국경문제에 대한 관심 고조와 한국 정부의 적극적 영토 정책을 보여준다. 이 시기 한국 정부는 ‘근대화’를 위한 개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변경지역을 포함한 국토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수집하였다. 1895년 이후 전국의 읍지와 읍사례 및 지도가 수집, 그리고 1899년부터 1904년까지 지계양전사업 실시가 그것이다. 1902년부터 1904년 러일전쟁 발발 이전까지 한국 정부는 간도관리사 이범윤을 파견과 황초평 교섭을 위한 사감위원 파견은 이 당시 판국 정부의 한청 국경문제에 대하여 적극적 정책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 정부의 정책은 1904년 러일전쟁의 발발과 그 해 6월 한청변계선후장정 체결에 따라 모두 무산되었다. 변계선후장정 체결로 간도관리사 이범윤의 소환이 결정되었다. 한국 정부가 그 해 5월에 파견하였던 황초평 사감위원의 활동도 1905년 8월 경 아무런 성과 없이 종결되었다. 러일전쟁 발발과 그에 따른 주변 정세의 변화에 따라 한국 정부흔 한청 국경문제의 독자 해결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1906년부터 일본이 한국 정부를 대신하여 황초평 분쟁에 개입하였다. 압록강 하구에서 황초평의 전략적·경제적 가치를 인식하고 황초평의 영토화를 진행한 것은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었다. 러일전쟁을 계기로 압록강 하구를 장악한 일본은 장래 한국에 대한 지배와 압록강 하구 개발을 염두에 두고 황초평에 주목하였다. 1906년 일본군 안동현군정서 용암포파출소장 成田正 소장과 통감부의 통역 前間恭作의 보고서 등은 당시 일본의 황초평에 대한 관심과 계획을 잘 보여준다.
일본은 1906년 11월 이후부터 황초평 분쟁에 공식적으로 개입하였다. 일본은 청 정부와의 외교적 분쟁을 피하면서 황초평을 한국 영토로 만들기 위하여 골몰하였다. 그 결과 당시 청인들이 점유하고 있던 대황초평 갈대 채취권을 매입하고 그 권리를 한인들에게 이전하여 황초평에 대한 지상권을 확립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일본 정부의 방침은 청 정부가 황초평의 전략적 가치를 인식하지 못하고 틈을 이용하여 갈대 채취권을 신속하게 매입한다는 것이었다. 통감부는 1906년 12월말부터 이듬해 4월까지 안동영사관의 岡部三郞 영사의 주도 아래 청인과 영사관의 직원을 동원하여 갈대 채취권 매입을 진행하였다. 그 과정에서 岡部三郞 영사는 청인 손경당의 반발로 갈대 채취권 매입이 난관에 부딪히자 만주의군 출신 柴田麟次郞 등을 동원하기도 하였다.
岡部三郞 영사는 1907년 4월경 갈대 채취권 매입을 중단하고 다시 황초평 ‘공동경영안’을 수립하였다. 이는 일진회와 일본인 柴田麟次郞 등을 계약서상 甲乙로 하여 한인들의 황초평으로 이주와 개간을 진행한다는 계획이었다. 아래 하여 岡部三郞 영사는 다시 계약이 성립한지 3개월이 안되어 일진회가 계약서의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다는 구실로 계약서상 갑을 관계를 변경하였다. 이로써 공동경영안의 주도권은은 통감부에 넘어가고한국 정부나 한인들의 황초평에 대한 권리 주장을 할 수 없었다.
이후 통감부는 다시 갈대 채취권 매입 작업을 진행하여 마침내 1908년 2월 청인 주주들로부터 갈대 채취권을 매입하였다. 이는 형식상 통감부가 황초평의 갈대 채취권을 매입하는 대신 이전의 황초평 주주 36명은 황초평이 한국 소속임을 인정하고 황초평을 10년 동안 임대한다는 계약이었다. 여기에는 압록강 국경문제가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지만 일본은 황초평 갈대 채취권 매입으로 압록강 국경문제에서 유리한 위치가 되었다. 통감부는 갈대 채취권 매입을 계기로 황초평을 한국의 영토로 귀속시키기 위한 후속 작업을 진행하였다. 동시에 청 정부의 황촢여 교섭 요구에 대해서는 무대응으로 일관하였다.
러일전쟁 이전 한국과 청 정부 황초평의 ‘영토화’보다 황초평 갈대의 경제적 가치에 주목하였다. 전근대 시기 갈대는 한국과 중국에서 다양한 용도를 가진 자원이자 징세의 대상이었다. 1883년 황초평 교섭부터 1926년 황초평이 식민지 조선의 영토로 편입될 때까지 황초평과 갈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1901년 이후 황초평 분쟁에서 한국 정부는 청 정부에 대하여 황초평에 대한 소유권 주장과 함께 당시까지 청인들이 채취해 간 황초평 갈대에 대한 배상을 계속 요구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황초평 분쟁은 근대국가가 형성되어 가는 시기에 자원분쟁의 성격이 강한 영토분쟁이었다.
Language
Korean
URI
http://hdl.handle.net/10371/12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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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ars in Collections:
College of Humanities (인문대학)Korean History (국사학과)Theses (Ph.D. / Sc.D._국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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