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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기 법전의 '僧' 연구
A Study on Buddhist Monks/僧 through the Codes of the Early Jose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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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양혜원
Advisor
남동신
Major
인문대학 국사학과
Issue Date
2017-02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승(僧)승려(僧侶)경제육전(經濟六典)경국대전(經國大典)도승(度僧)도첩(度牒)도첩승(度牒僧)무도첩승(無度牒)승직(僧職)
Description
학위논문 (박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국사학과, 2017. 2. 남동신.
Abstract
본 연구에서는 조선초기의 ‘僧’ 관련 용어와 그들에 대한 법적 규정을 추출하여 검토하였다. 본고에서 ‘조선초기’는 조선이 개창된 14세기 말에서 《經國大典》 최종본이 완성된 15세기 후반까지를 의미한다. 이 시기 편찬된 공식 법전으로 《經濟六典》과《경국대전》이 있으며 여기에는 승과 관련한 다양한 조문이 수록되어 있다. 조선초기 승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들 조문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조선시대는 일반적으로 儒學을 숭상하던 시기로 알려져 불교와 관련된 분야가 연구 주제에서 소외되어 온 경향이 있다. 그러나 조선 개창 이전까지 불교는 약 천 년 동안 지배적 이념으로 작용하였고 수많은 정신적·물질적 유산을 남기고 있어 사회의 불교적 요소들을 단기간에 없애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실제로 조선초기에는 불교에 대한 숭상과 억압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존재하던 불교적 전통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조선 초 사회에 널리 퍼져있던 불교적 전통 중 하나는 출가하여 승이 되는 것이었다. 승은 불교계를 구성하는 핵심적 존재이자 조선초기 국정 운영의 주된 논란 대상이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이 시기 승의 존재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였으며 그들이 누구인지에 대한 구체적 고찰도 거의 없는 실정이다. 조선후기적 시각 혹은 연구사적 선입견 속에서 승은 賤人 신분으로 잘못 이해되어 오기도 하였다.
과연 조선초기 사회에서 승은 어떤 존재였는가, 법적 제도 안에서 규정된 승은 어떤 특징을 갖는가, 이들의 존재는 왜 문제가 되었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 본고에서는 《朝鮮王朝實錄》의 기록들과 조선초기에 성립한 두 법전 《경제육전》·《경국대전》을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특히 이 두 법전은 개국 초 체제 정비 기간에 爲政者들이 추구한 통치 체제를 상징한다는 면에서 유의미하며, 시간적 선후 관계를 가지고 같은 사안에 대한 조문의 변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 이에 개국 직후 太祖代에 처음 성립된 《경제육전》과 15세기 후반 成宗代에 최종 완성된 《경국대전》의 승 관련 조문을 복원·추출하여 그 전문을 제시하고 의미를 분석하는 작업을 시도한 것이다.
조선 개창 후 15세기에 僧은 매우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었다. 고려시기까지 치성했던 불교의 영향으로 조선초 승의 수는 백성의 3/10이라고 거론될 만큼 과다하게 증가한 상태였다. 이미 고려말부터 지적되어 오던 수많은 승의 존재는 조선초기 정부가 직면한 심각한 사회 문제 중 한 가지였다. 사회에 승이 많다는 사실이 문제가 되는 까닭은 그들이 갖는 다음과 같은 독특한 특징 때문이었다.
‘僧’이란 원래 집을 나와 수행에 전념하는 불교도를 뜻한다. 이들은 불교에서 가장 중시하는 佛·法·僧의 三寶 중 하나로, 불교의 人的 토대라고 할 수 있다. 승은 세속의 인연을 끊는다는 의미로 집을 떠나 수행 공동체에 들어가므로, 승이 되는 것을 ‘出家’라고 표현한다. 또한 世間을 떠난 자들이라는 의미로 ‘出世間’의 존재라고도 부른다. 출가한 승은 머리를 삭발하고 검은 옷을 입는 특징을 지니는데, 이는 불교의 전래와 함께 생겨난 독특한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승은 ‘세간을 떠난’ 존재이므로 세간의 질서, 대표적으로 국가의 役에서 제외된다는 인식이 전통적으로 존재하였다. 승의 이러한 성격은 국가의 통치 체제와 갈등을 일으킬 소지가 있다. 승의 수가 크게 증가할 경우 국가 입장에서 그 모두를 역 부과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국가에서 승을 출가시키는 절차를 규정하였는데 그것이 이른바 ‘度僧’의 제도이다. 조선초 정부는 度僧의 제도를 통해 ‘度牒’을 발부하고 ‘도첩을 지닌 승[度牒僧]’만을 ‘제도적 출세간’으로 간주하고자 하였다. 조선초기 도첩은 그 소지자가 도승의 제도를 통해 출가한 승이라는 증빙이며 제도적 출세간으로서 역 부과 대상에서 제외되는 근거가 되었다. 도첩이 없는 승[無度牒僧]은 관행적으로 역이 면제되곤 하였으나 제도적으로 역을 면제받을 근거는 없었으며, 국가의 강제력에 의해 환속될 수 있는 존재였다.
즉, 조선초기에 ‘도첩승’이 된다는 것은 ‘제도적 승’의 지위를 획득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면역 대상이 되는 것이었으므로, 도첩 발급 대상을 통제하는 일은 체제 정비 과정에서 중요한 논의 사항 중 하나였다. 전체 승의 규모는 국가의 役 운영과 연동되는 문제였고 역은 신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개인의 출가에 불교 교단 외에 국가가 제도적으로 간섭하였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결국, 출가하여 도첩승이 되는 것에 대한 규정은 명시적 법조문으로 성립하여 법전에 오르게 된다. 그것이 《경제육전》과 《경국대전》에 수록된 ‘度僧’의 조문이다.
조선은 개창 직후 국가 체제 운영을 위한 법전의 편찬에 착수하는데, 그 결과로 太祖 6년(1397) 《경제육전》이 탄생되었다. 이 법전의 경우 4차례의 수정 간행이 이루어지는데, 현재 책이 전혀 전해지지 않아 원형의 완벽한 복원은 불가능하다. 때문에 그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경제육전》의 조문을 인용한 《朝鮮王朝實錄》의 기록을 일일이 찾아 분석해야 한다. 본 연구에서는 기존의 《경제육전》 복원을 위한 연구 성과들을 참조하되 불교 및 승 관련 내용에 집중하여 최대한 상세하고 많은 조문을 복원, 추출하고자 하였다. (복원·추출한 《경제육전》 조문은 논문 끝 ≪부록 1≫로 수록)
《경제육전》은 다시 오랜 논의를 통해 지속적인 수정을 거듭하여 거의 백 년 후인 成宗 15년(1485)에, 조선시대 법의 근간이 되는 《경국대전》으로 완성되었다. 《경국대전》은 기존 법전의 受敎集 체제에서 벗어나 전체적 틀이 재구성되고 조문은 더욱 간명해 졌다. 성종 15년 최종본 간행 이후 원문의 수정을 금지하면서 명실상부한 조선 萬歲의 成法으로 자리매김하였다.
《경국대전》은 최근 유통되는 成宗 15년 간행본이 유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1990년대에 발견된 성종 1년(1470) 간행본이 존재한다. 이 두 《경국대전》은 15세기 후반 도승법의 중요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은 기존 학계에 소개된 적이 없어 본고에서 최초로 내용을 분석하고 승 관련 조문을 추출하였다.(추출한 조문은 논문 끝 《부록 2》로 수록)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첫째, 조선초 대규모로 존재하던 승은 국가로부터 ‘度牒’을 받은 ‘度牒僧’과 받지 못한 ‘無度牒僧’의 두 부류로 크게 나뉜다. 도첩 소지에 따른 이 둘의 핵심적 차이는 법적으로 國役을 면제받는가의 여부이다. 둘째, 《경제육전》 체제에서 도첩을 받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자격 요건은 ‘兩班 자제’라는 상층 신분과 ‘丁錢’을 납부할 수 있는 경제력이었다. 度牒僧은 시험을 통해 僧職에 오를 수 있었으며, 환속할 경우 시험 없이 세속의 官職에 나갈 수 있는 권리를 법으로 보장받았다. 셋째, 《경국대전》 체제에서 도첩을 받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자격 요건은 지정된 불교경전에 대한 암송과 정전을 납부할 수 있는 경제력이었다. 度僧의 조문에서 도첩 발급의 신분 제한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나, 度牒式에서 도첩승을 ‘學生’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과연 이 도첩식이 賤口에게 발급될 수 있었을지 의심의 여지가 있다. 아울러 기존 규정에 비해 僧職 선발 규모를 줄였으며 승의 법적 지위는 갈수록 하락하는 경향을 보인다.
승이 제도적으로 위와 같은 존재였다는 구체적 사실의 파악은 이 시기 사회의 특질을 이해하기 위한 단서 중 하나이다. 조선사회의 변화는 儒佛의 단순한 사상적 도식을 넘어, 이미 오랜 역사를 가지고 현실 속에 녹아든 불교적 특질을 이해한 위에서 평가될 필요가 있다. 조선초기 법전에서 승과 관련한 조문은 다양하고 세세한 편이었으며, 승이 될 자의 신분과 경제력, 관련 지식의 정도, 환속 후의 지위까지 규정되고 그 내용이 점차 변화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사회의 변동과 법 규정의 변화가 밀고 당기며 제도적 승의 조건과 지위는 이전 시기의 그것과 상이하게 규정되어 갔다.
Language
Korean
URI
http://hdl.handle.net/10371/12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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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ars in Collections:
College of Humanities (인문대학)Korean History (국사학과)Theses (Ph.D. / Sc.D._국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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