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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祖代 宮中繪畫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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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유재빈

Advisor
장진성
Major
인문대학 고고미술사학과
Issue Date
2016-02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正祖宮中繪畫差備待令畵員御眞契屛華城園幸圖屛정치적 미술
Description
학위논문 (박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고고미술사학과 미술사전공, 2016. 2. 장진성.
Abstract
본 논문은 正祖代(1776-1800)의 궁중회화를 실질적인 제작 주체인 국왕의 관점에서 조망한 시도이다. 정조는 어느 국왕보다 시각물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으며, 그림의 제작과 관람을 둘러싼 환경을 통제함으로써 그 효과를 극대화하였다. 본 논문은 정조대 궁중회화의 작품 뿐 아니라 이러한 환경의 변화를 다각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궁중회화를 둘러싼 제도, 의례, 분급 방식에 관심을 기울였다. 연구 범위는 정조의 화원 제도 개혁, 御眞과 신하 초상의 제작 과정과 의례, 궁중행사도의 제작 주체와 회화적 분석에 집중하였다.
정조는 재위 7년(1783), 奎章閣내에 差備待令畵員制를 설립함으로써 圖畵署와 더불어 이원적인 화원 제도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정조 국정 운영의 핵심 기구인 규장각에 소속된 차비대령화원은 국왕이 직접 관장할 수 있는 화원의 출범을 의미하였다. 정조는 차비대령화원을 단지 동원인력으로 비축하지 않고 자신의 계획 사업에 적합하도록 교육하고 훈련하였다. 이렇게 훈련된 차비대령화원은 御製 印札, 御筆 碑文 조성, 규장각 도서 출간 등을 전담하였으며 도감 사역에서도 冊·寶·銘旌 등 왕실 상징물의 제작에 중점적으로 배치되었다.
어진 도사 사업은 숙종대 이후 왕실의 가장 큰 繪事였다. 정조는 기본적으로는 肅宗과 英祖의 어진 제작 전통을 이었지만 先王의 어진을 모사하고 복구하는 사업보다 現王의 어진에 대한 영향력을 키우는 방향으로 변화하였다. 정조는 어진과 신하 초상의 제작을 연계하고 어진이 관전되는 방식을 혁신함으로써 어진의 정치적 영향력을 증대하였다. 어진은 제작 기간 동안 瞻望을 통해 군신 관계에 대한 담론의 장을 마련하였다. 완성된 어진에게는 절하는 의식이 포함된 瞻拜를 행하게 하였는데, 봉안 의례를 통해 정조의 초상화는 어진으로 거듭날 수 있었으며, 정기적인 봉심 의례를 통해 국왕이 규장각에 현현하는 것을 재현할 수 있었다.
정조의 어진 도사는 왕의 초상만이 아니라 신하 초상을 위한 자리를 마련함으로써 초상을 통한 군신관계의 논의를 확대하였다. 어진을 논하는 같은 자리에서 신하 초상이 열람되었으며, 어진을 제작한 화사에 의해 감동각신의 초상이 제작되었다. 정조는 신하 초상을 회유와 견제의 방편으로 사용하였고, 이를 통해 적극적으로 신하의 응답을 이끌어내기도 하였다. 결국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정조의 조정에서 초상화는 죽은 자를 추모하는 기념물에서 나아가 현재의 군신관계를 정립하는 매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궁중행사도는 지금까지 내용상 왕실 의례를 다루었음이 강조되었을 뿐 왕실의 취지와는 무관화게 설명되었다. 이는 대부분의 궁중행사도가 관원들이 주체가 된 契屛의 형식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조 연간의 계병은 계병이란 이름과 관행을 왕실에서 전용하여, 관련 관청으로 하여금 우회적으로 제작하게 하였다고 추측되는 사례가 다수 발견된다. 본 논문은 정조대의 계병 중에 행사 장면을 주제로 한 계병 4점 (1783), (1784), (1784), (1785)을 주 분석대상으로 삼았다. 1783년에서 1785년 사이에 제작된 이 계병들은 문효세자의 탄생, 교육, 책봉, 권위 부여 등과 관련되어 있다. 이들의 계병은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지녔다. 첫째, 이 계병을 발의하거나 분하 받은 일원들은 정조가 세자를 위해 계획한 각 행사에서 국왕의 입장을 지지하거나 응수하기 위해 계병을 제작하였다. 둘째로 궁중행사의 행사 장면과 배경은 각 행사의 정치적 의도를 강화하기 위해 정교하게 고안되었다. 행사장면은 의주를 그대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세자의 권위와 세자와 국왕의 긴밀한 관계를 시각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편집과 보정이 이루어졌다. 마지막으로 이들 4점의 계병은 발의자에 따라 서로 다른 양식과 수준으로 제작되었다. 이는 계병이 당시 공적 소통의 매체로 사용되었지만 정조 전기에는 아직 제작 수준이나 화원들의 양식까지 통제된 것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정조는 재위 20년(1795) 《華城園幸圖屛》의 제작을 기점으로 국가에서 궁중행사도 제작을 주관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제작 경로의 변화는 행사의 취지를 시각적으로 보다 적합하게 전달하며 혁신적인 도안과 화풍의 감행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정조는 국가 편찬물에 지속적으로 판화의 양과 질을 키워 나감으로써 화원의 역량을 강화시켰다. 특히 思悼世子 추숭 사업과 관련한 의궤를 비롯한 일련의 시각매체는 《화성원행도병》의 제작에 큰 영향을 미쳤다.
《화성원행도병》은 양식적 혁신성 뿐 아니라 내용의 구성력 또한 뛰어난 작품이다. 본 병풍은 화성 원행시에 베풀어진 행사를 시간순서가 아니라 정조가 본래 의도하였던 바대로 재배열함으로써 행사 전체의 의미를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였다. 혜경궁에게 올린 진연과 민간에 하사된 잔치, 문묘의 향사와 군사훈련, 군신 의리와 만민 통합의 행사를 유기적이고 단계적으로 배치함으로써 일회적인 행사의 기록이 아니라 이상적인 치세의 상징으로 형상화하였다.
《화성원행도병》은 모두 21건이 제작되어 궁중에 보관되었을 뿐 아니라, 행사를 담당한 참석자 15명에게 하사되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작은 병풍과 족자 형태의 시각물이 제작되어 141명에 달하는 정리소 관원 전원에게 지급되었다. 이처럼 국가가 직접 행사도 제작의 주체가 된 것은 처음이었을 뿐 아니라 관여한 인사 전원에게 지급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렇게 배포된 《화성원행도병》은 당대에 을묘년 원행의 정치적 영향력을 각인시켰을 뿐 아니라 이 후 민간에서 모사되고 전승됨으로써 정조대의 국왕의 권위와 향수를 재생산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이처럼 정조는 국왕 직속의 화원제도를 운영하여 시각 매체에 대한 통제력을 높였을 뿐 아니라, 초상화와 궁중회화의 제작 전반에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관여하였다. 그리고 신하에게 어진을 공개하고 궁중행사도를 분하함으로써 그 시각적 영향력을 확대하였다고 할 수 있다.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2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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