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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帝强占期 大邱商業會議所의 構成과 請願運動 : The composition and petition movement of Daegu Chamber of Commerce during Japanese Colonization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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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김희진

Advisor
김태웅
Major
사범대학 사회교육과
Issue Date
2014-08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대구대구상업회의소지역상업회의소재조일본인청원운동지역철도부설운동전기부영화
Description
학위논문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사회교육과, 2014. 8. 김태웅.
Abstract
개항 이후 大邱에 이주해 온 일본인 상공업자들은 조선총독부의 庇護와 자본력을 바탕으로 전통적인 조선인 상권을 침탈하고 지역 경제계의 우위에 섰다. 이 과정에서 조선인과 일본인 상인은 각자의 민족적․경제적 이해를 보호하기 위해 상업회의소를 설립하였다. 민족별로 이원화되어있던 상업회의소는 1915년 조선총독부의 「조선상업회의소령」 발포 이후 일본인 상업회의소를 중심으로 통합되었다.
통합된 대구상업회의소는 회원 구성과 운영 면에서 민족 차별적 성격을 띠었다. 府營業稅 일정액 이상으로 규정된 회원 자격은 다수의 조선인 영세 상공업자의 가입을 제한하였다. 또한, 상업회의소의 활동 방향과 각종 규정의 개폐를 결정하는 평의원 20명 중 조선인은 4~5명에 불과하여 구조적으로 지역의 조선인과 조선인 상공업자의 이해는 배제될 수 밖 에 없었다. 소수의 상층 조선인 상공업자가 상업회의소 내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이기도 하지만 이들은 민족적 이해관계보다는 같은 업종의 이익을 우위에 두었다.
대구 상업회의소의 역할은 다양했으나 본 연구에서 특히 주목한 것은 지역사회를 대표하는 압력기구의 역할이다. 일제강점기 지역상업회의소는 지역 사회를 대표하여 지방관청이나 조선총독부를 향해 특정 정책의 실행을 압박하는 請願運動을 전개하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慶東線, 邱安線 등의 地域鐵道敷設運動과 電氣府營化 논의였다.
개항장 부산과 지리적으로 인접한 까닭에 대구는 개항 직후부터 빠른 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점차 부산의 상권에 蠶食 되었을 뿐 아니라, 경상도의 내륙 중심지로서 가지고 있던 전통적인 상업도시로서의 集散力을 인근 철도역이 설치된 지역에 빼앗기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위기 상황을 맞이하여 대구상업회의소는 191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에 걸쳐 지역철도부설운동을 전개하였다. 포항과 울산이라는 동해안 항구를 대구와 私設 鐵道로 연결하여 대구의 독자적 外港을 확보함으로써 경상북도 지역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있던 부산 상인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교통이 불편하였던 경상북도 북부지역으로 상권을 확장하기 위하여 邱安線(大邱-安東)의 부설을 조선총독부에 지속해서 請願하였으며 지역 여론을 환기하고 다른 지역과 연대하는 방식으로 총독부를 압박하였다.
이 같은 지역 개발․지역 성장에 관한 사안은 조선인 상공업자뿐만 아니라 지역주민 전체를 회유하고 포섭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조선인․일본인을 막론하고 상업회의소 내 대부분의 상공업자는 지역철도부설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慶東線(대구-포항)의 성공적인 부설을 바탕으로 대구를 중심으로 하는 다양한 철도 노선 부설을 위한 청원운동을 지속해서 전개하였다.
한편 대구상업회의소 내부에는 大興電氣株式會社를 중심으로 상호 출자와 중역 겸임으로 연결된 電氣派라는 파벌이 존재하였다. 이에 대항하는 미곡유통․정미업자로 구성된 非電氣派는 상업회의소와 지역 경제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전기파와 치열하게 경쟁․갈등하고 있었다. 두 파벌은 업종을 기준으로 조선인․일본인의 구분 없이 구성되어 있었으며 2년마다 상업회의소 회원들의 투표로 선출되는 20석의 평의원직과 임원직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였다. 이 때문에 1929년 상업회의소 평의원 선거에서는 30여 명의 전기파 조선인들이 같은 파벌의 일본인에게 투표하는 흔치 않은 현상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특히 非전기파에 속한 회원들은 1920년대 후반에서 30년대 초반까지 전개된 電氣料金引下 및 電氣府營化 논의에서 역시 민족 구분 없이 연대하여, 논란을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며 전기파를 압박하였다. 이 같은 모습은 상업회의소 구성원들의 중층적․복합적인 이해관계가 지역 사회의 현안을 통해 표출된 대표적인 사례였다.
이상에서 정리한 것처럼 상업회의소의 동향은 조선총독부, 그리고 지역 사회와 밀접한 영향을 주고받고 있었다. 지역 개발․성장을 뒷받침할 철도 부설을 위해서는 민족과 업종의 구별 없이 연대하여 조선총독부를 향한 활발한 請願運動의 구심점이 되었다. 한편 지역사회 내에서 전기부영화 여론이 팽배할 때는 업종별 이해의 충돌로 분열하여 갈등하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 이처럼 사안에 따라 연대․갈등하는 상업회의소 구성원들의 모습은 당시 지역사회의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27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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