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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 新義州 木材業界의 변동과 木材商組合의 활동(1910~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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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이미경

Advisor
김태웅
Major
사범대학 사회교육과
Issue Date
2016-08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신의주압록강제재업영림창(영림서)목재상조합목재 관세
Description
학위논문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사회교육과 역사전공, 2016. 8. 김태웅.
Abstract
신의주는 목재의 도시였다. 1907년 영림창이 설립된 이래 일본인 자본의 투자와 인구 유입이 증가하였던 것 자체가 압록강 상류에서 떠내려 보내 신의주에 집재하는 목재 때문이었다. 동시에 신의주는 경의선 부설을 시작으로 목재 자원의 수송을 위한 철도와 교통이 일찍이 발달한 국경의 요충이었다.
1920년 회사령이 폐지되자 일본인 대자본은 압록강 일대의 삼림 자원에 더욱 주목하였다. 영림창도 또한 관용 수요의 목재를 우선적으로 공급하는 한편으로 점차 직영의 제재소를 늘려 나갔다. 왕자제지 조선공장은 영림창 벌채량의 절반을 선점하였다. 나머지 절반가량은 불하되어야 했으나 영림창 제재 사업의 확장 추세 속에 민간 제재공장의 자재로 공급될 목재는 예전보다 줄어들었다. 이를 배경으로 민간업자들은 직접 목재를 벌채하거나 유벌하는 데에도 참여하여 생산량을 늘렸다.
1차 세계대전의 호황기에 힘입어 조선총독부의 정책적 지원과 더불어 신의주의 민간 목재상은 꾸준히 상세를 키웠고 제재업자 또한 생산능력을 신장시키며 관영인 영림창과 생산단가의 격차를 좁혀갔다.
본 논문은 영림창의 생산에 대치하고 조선총독부의 삼림 지배 정책에 대응하면서 성장한 신의주의 목재업 발전 과정에 초점을 두었다. 신의주의 산업 중에서 가장 우위를 점하였던 목재‧제재업이라는 개별 산업사의 연구 작업을 통해 근대 도시 신의주의 역사상에 다가가며 도시 전체의 자본주의 성장 과정의 특징을 밝히고자 하였다.
이에 만주사변이 발발한 1931년을 기점으로 일제강점기 초기와 만주국 수립 이후라는 두 시기로 나누어 신의주의 민간 제재업계의 각종 요구와 그 실현을 위한 관련 업자들의 움직임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조선인 제재업 자본가들에게 미친 영향을 구명하고자 하였다.
목재 및 제재 생산능력이 조선 내의 자급자족을 실현할 단계에 이르렀던 1920년대 후반에 그간 무관세의 특례가 적용되었던 중국 안동의 수입 목재에 대해 과세를 시행하였다. 이는 조선총독부의 정책 방향과 신의주의 관련 업자들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실현하고자 쏟은 노력이 부합한 결과였다. 안동 목재의 수입 증가로 자재 가격이 하락하자 압록강산 목재가 경쟁력을 잃고 수익을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주국 수립 이후 관세 개정 운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만주국 건설 수요의 급증으로 조선이 대만주 원목 공급 기지로 변모하자 자재를 구할 수 없었던 제재업계와 공급 물량 부족을 겪은 목재상들이 다 같이 반발하였다. 이 시기 만주국 관세를 일본 본국과 같이 개정해 줄 것을 청원하였던 신의주 상공회의소의 주도 세력은 목재 관련업의 자본가들이었다.
한편 영림서의 중앙집권적 사업관행이 영림서 제재부의 제 4공장 설립으로 이어지자 신의주 목재상조합은 조선총독부를 상대로 한 청원운동을 전개하였다. 여기에는 앞서의 특례 폐지 운동 단계에서 반대로 맞섰던 안동의 목재계도 보조를 맞출 정도로 영림서 위주의 목재 공급은 반(半)독점에 가까웠다.
이상에서 살펴본 여러 운동의 과정에서 역량을 강화한 신의주의 민간 목재업 자본가들은 자신의 이익 수호를 위한 상업단체로서 신의주 목재상조합을 비롯한 동업자조직을 설립하였다. 거기에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은 영업세 납부액이나 자본금 규모에서 절대적 우위에 있었던 일본인 자본가들이었다. 조선인 영세 공장은 단지 이들을 따라가는 위치에 있었으며 목재 및 제재업의 성장의 결실 역시 일본인들의 차지가 되었다. 1920년대 후반까지도 조선인 소유의 제재공장은 설립을 볼 수 없었고 1930년대 초에야 하나 둘씩 설립되어 갔다.
목재 자원 개발을 계기로 하여 급설된 도시로서 신의주는 인구의 대부분이 노동자였다. 그러나 벌채에서부터 제재 단계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에서 노동력을 투입한 조선인 노동자들은 생존 수준의 저임금에 시달렸다. 식민지의 산업 조건 속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은 일본인 노동자와 차별을 받았으며 국경도시의 특성상 다수가 유입되었던 중국인 노동자와의 경쟁으로 인해 상황은 더욱 열악하였다.
풍부한 삼림자원 및 편리한 교통과 수운, 대량으로 공급되는 저렴한 노동력을 배경으로 신의주의 목재‧제재업은 일제강점기 초부터 신의주 재계를 이끌었다. 조선공업화의 과정에 이어지며 목재의 전시 수요가 부각되었던 1930년대 후반에 일본인 대자본은 영세한 조선인 공장을 규합하는 통폐합을 거쳐 대규모 공장으로 도약하였다.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27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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