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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帝强占初 農業學校의 設立·運營과 卒業生의 就業實態
An Analysis on Chosŏn Agricultural Schools: The Establishment, Operation and Graduate Employment Patterns in the Early Japanese Colonial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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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朴芝媛
Advisor
金泰雄
Major
사범대학 사회교육과(역사전공)
Issue Date
2012-08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農業學校農業敎育實業敎育篤農家卒業生의 就業
Description
학위논문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사회교육과(역사전공), 2012. 8. 金泰雄.
Abstract
본 논문은 日帝强占初 농업학교의 설립 경위와 교육 목표, 학제와 교습 실태를 파악하고, 이와 더불어 졸업생 진로의 실태를 진단함으로써 그것이 갖는 특징과 의미를 검토한 것이다.
대한제국은 殖産興業政策의 일환으로 商工 중심의 실업 교육을 실시하였다. 산업을 보호·육성하고, 국가 운영과 산업 진흥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함으로써 국권 상실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을사늑약이 강제되고 통감부가 들어서면서 대한제국기에 전개된 실업교육은 변질되었다. 통감부는 문명 진보의 수단으로 실업 교육을 선전하였고, 정치색이 가미된 인문교육을 가급적 배제시킴으로써 조선인의 민족적 저항을 무마·약화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농・공・상의 실업 교육 중에서도 농업 교육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내용과 방향을 전환하였다. 조선의 米穀을 개량・증산하여 이를 일본에 반출하는데 농업 교육이 가장 긴요했기 때문이었다.
농업 교육의 필요성이 제고되면서 일제는 각 道에 농업학교를 설립하였다. 통감부가 구상한 초기의 농업학교는 농업 개량을 추진하고, 토지조사사업 및 지역의 從業者를 양성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농업학교는 강점 이후에 한층 변모되었다. 이 시기 농업학교는 일제의 농사 개량 정책을 잘 이해하고, 스스로 모범적인 농업 경영을 하면서, 조선 농민에게도 개량 농법을 지도·장려할 수 있는 篤農家를 양성하는 기관으로 정비되었다. 아울러 학생들에게 “충량한 농민”, “성실 근면한 농민”으로서의 품성을 갖추게 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이는 궁극적으로 총독부의 농사 개량 정책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한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농업학교의 교육 목표는 그 學制와 敎習 실태의 분석을 통해 보다 명확히 파악할 수 있다. 강점 초기에 농업학교에서는 졸업 후 實業自營者의 자질을 갖춘 학생을 선발하고자 하였으며, 교육 과정에 있어서도 조선총독부의 농업 정책에 보조를 맞추면서 농사 현장에서 필요한 내용을 교습하는 데에 치중하였다. 농업학교 학생들은 근검, 성실 등 일제가 조선 농민에게 요구했던 각종 덕목과 조선 농업의 ‘개량’, ‘진보’에 기여할 만한 것으로 特定된 지식 기능을 학습하였다.
그리고 조선의 농업학교에는 지역 사정에 따라 교육 내용을 탄력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던 일본과는 달리 응용적이고 근시일 내에 생산력의 증대를 가져올 수 있는 농업 교과목과 교육과정이 강제되었다. 특히 ‘優良種’(일본 품종)의 보급을 위해 ‘作物’ 과목의 비중을 높게 책정하였다. 이 모든 교육 과정은 완전한 농사 과정을 배우는 실습을 통해 학생들에게 體化되었다.
하지만 농업학교가 모범농을 배출하는 본래의 교육 목표를 온전히 수행하기는 어려운 實情이었다. 농업학교 학생들은 道內의 秀才들로서 중등 본위의 교육을 받고자 했으며 그 나름의 사회적 신분 상승을 도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졸업생은 해마다 관공직을 비롯해서 다양한 직종에 진출하고 있었는데, 이는 농업에 종사하는 졸업생의 2배 이상에 달하는 수준이었다. 이와 같은 조선인 농업학교 졸업생의 취업 현황은 일본 농업학교 졸업자와 비교할 때 확연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일본 농업학교 졸업자들의 약 80%는 졸업 후 곧바로 實業에 종사했지만, 관청 봉직자는 소수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이 초래된 이유는 조선의 교육적 여건이 일본과 현격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초등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진학할 수 있는 중등 교육 기관이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던 반면에 조선에서는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농업학교가 지역 내에서 거의 유일한 중등 교육 기관이었다. 이에 농업학교는 해당 지역에 필요한 인력을 공급하는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일제의 정책 수행을 보조할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조선인 농업학교 졸업자들은 부차적인 職務이지만 다양한 방면으로 취직할 수 있었다.
이와 더불어 농업학교 졸업생들이 농업에 종사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았던 것도 취업으로 나아가는 커다란 동인이 되었다. 농업학교 졸업생 중에는 학교에서 습득한 개량 농법을 적용해서 생산력을 증대시키고 지역 사회에 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토지 소유 기반이 취약했던 대부분의 학생은 졸업 후 농업 경영을 하는 것보다 職業을 얻어 가계 수입을 늘리는 것이 유리하였다. 이에 농업학교에서는 졸업생의 자가 영농에 대해 근본적이고 적극적인 차원에서 지원해 주지 못하고 미온적으로 영농을 권유하는 정도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가운데 조선의 농업학교는 관직으로의 등용문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1910년대 후반을 지나면서 졸업생들이 사회적 수요에 따라 관공직으로 취업하는 행보는 막기 어려운 상항이었고, 권업 방면으로 진출한 학생에 대해서는 본래의 농업학교 설립 목적과 다소 차이가 있더라도 조선의 농업 개량에 一助하는 것으로 인정하는 모습도 나타났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조선의 농업학교는 이후로도 모범 농민 양성 기관을 표방하면서 실질적으로는 관공리 등의 진출 통로가 되는 복합적인 면모를 지니게 되었다.
이상에서 일제 강점 초 농업학교의 설립・운영과 졸업생의 취업 실태를 진단하였다. 강점 후 농업학교는 지주층을 중심으로 추진되던 조선총독부의 농업 정책에 따라 篤農家를 양성하기 위한 실업 교육 기관이었다. 하지만 농업학교는 사회적 수요에 부합하면서 더욱 포괄적인 기능과 역할을 담당했던 중등 교육 기관의 하나이기도 했다. 조선인 학생들은 일제하 지주제의 현실 속에서 각자의 처지에 따라 다양하게 사회로 진출하였다. 이는 일제의 농업 정책 및 교육 정책이 기층 조선 사회와 충돌하면서 빚어진 현상이었다.
This article discusses the agricultural policy of the Chosŏn Ch’ongdokpu (朝鮮總督府, Government-General of Chosŏn) by examining the establishment, educational goals and operation of Chosŏn agricultural schools in the Early Japanese Colonial Period. In addition, the conditions of education conducted in Chosŏn were analyzed through the status of agricultural schools and patterns of its graduate employment.
Chosŏn agricultural schools were first established by T’onggambu (統監府, Japanese Residency-general) to train survey-assistants required in the Chosŏn land survey project, but after the Japanese annexation of Chosŏn in 1910, it was modified and became an elite-farmer (篤農家) training institution. The foremost reason of the Japanese annexation of Chosŏn was a need to find a solution for its domestic food shortage, and on this account, Japan exerted every effort to enhance agricultural production in Chosŏn, including the promotion of new agricultural techniques. Elite-farmers trained in agricultural schools were expected to be a mediator between the government and general farmers, by being well-acquainted with Chosŏn Ch’ongdokpu’s agricultural improvement policy, and by encouraging and instructing other Chosŏn farmers to apply new techniques.
In this article, two characteristics of Chosŏn agricultural schools were examined. First, it was based on a low-leveled (低度), simple (簡易) education school system. Only the knowledge and skills directly related to the improvement policy, especially the usage of ‘improved seeds’ (優良種), were included in the curriculum. In addition, the primary method of this education was practical training. Second, it was the highest secondary school in most of the Chosŏn provinces, resulting from the fact that Chosŏn Ch’ongdokpu strictly controlled the installation of other secondary educational institutions, such as high common schools (高等普通學校), or various teacher training institutions.
The second factor led to mass employment of Chosŏn agricultural school graduates in various low-level positions. Of all graduates, about 60% were employed and became minor government and public officials or teachers, whereas only about 25% became farmers. This was a phenomenon that differed very markedly from Japanese agricultural schools. 80% of the graduates from there became farmers.
This pattern in graduate employment, conflicting with the school’s educational purpose, was caused by two structural factors. The first factor is the poor educational environment of Chosŏn. Because of it, the status of Chosŏn agricultural schools was naturally elevated. The second factor is that agricultural school graduates were driven to escape the farmlands under the socio-economic structure of Chosŏn agriculture, including the landlord system under Japanese occupation. Only graduates from families who were large-scaled landowners could benefit from new agricultural techniques. Others did not possess sufficient farmlands to succeed, thus the prospect of a fixed income was a huge incentive for employment.
In conclusion, the pattern in Chosŏn agricultural school graduate employment was a result of the contradiction between Chosŏn Ch’ongdokpu’s agricultural policy and the educational and socio-economic conditions of Chosŏn in the early Japanese colonial period.
Language
Korean
URI
http://hdl.handle.net/10371/127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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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ars in Collections:
College of Education (사범대학)Dept. of Social Studies Education (사회교육과)History (역사전공)Theses (Master's Degree_역사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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