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료의 재배열과 기억의 공진 작용에 관한 시각적 표현 연구

Abstract

우리가 사는 세계와 우리의 삶은 생성과 소멸이라는 우주적 질서(cosmos)가 바탕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예술가는 내재적 관념의 표상인 작업으로 새로운 질서를 이 세상에 드러내 놓는다. 나는 생성과 소멸이라는 근원적인 관점을 작업의 출발점으로 삼고 작업을 관통하는 일련의 과정에 주목한다. 여기서 과정이라 함은 작업의 형식을 이루는 물질(질료)의 재배열과 작업의 내용을 이루는 기억(경험)의 재배열을 지칭한다. 이러한 과정을 살펴보는 일은 예술이란 무엇이며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라는 예술관의 개념과 상통한다. 나의 작업은 물질과 기억의 재배열 및 파편화를 통해 작업의 본질적인 의미를 찾아보려는 시도이며, 나를 나이게 하는 과거의 기억들을 환기하고, 존재의 의미를 되짚어보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다. 나의 예술관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한정된 질료(質料)를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재배열(再配列) 하는 것 으로 압축된다. 어떤 질료를 언제, 어디에, 어떻게, 무엇을 위해, 배열 할 것인지에 대한 사유가 곧 그 작업의 전부이다. 작업이란 각각 개별적으로 무관계 속에 방치된 파편들이 작가의 의도에 의해 재배열되어, 유기적인 구조를 지니며 새로운 질서 위에 관계를 형성하게 되는 지점에 존재한다. 물질의 재배열을 주제로 한 작업들은 개념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탈부착이 가능한 유리병을 이용하였다. 유리병 작업(혼합매체)과 더불어 유화작업을 연작으로 구성하여 유리병 안의 질료와 캔버스에 고착화된 질료가 대조를 이루며 작업의도가 더욱 부각되도록 하였다. 밀폐된 유리병안의 물감은 시간이 지나면서 물과 안료가 분리되어 이미지가 사라지게 되는데 이때 회화에서 환영(일루져니즘)의 실체와 유물론적 관점이 동시에 드러나게 된다. 각각의 유리병은 질료의 물성을 잃지 않은 채 탈공간화 함으로써 또 다른 시공간에서 열린 구조를 갖는 동시에 거시적 시간성 위에서 열역학 제 2법칙(엔트로피의 증가)에 따라 파편화 되어 소멸될 것임을 암시한다. 기억과 경험은 작업에 있어 마음속에 부유하는 소재들이다. 내면에 흩어져있던 기억들은 시간 속에서 모양을 바꾸며 이합집산을 반복하다가 작가의 동인에 의해 선택되어질 때 그것이 곧 작업의 시발점이 된다. 나는 무수히 많은 기억의 파편들 속에 특정 기억이 선택되는 인과성을 기억의 공진(共振)으로 명명하고 작업으로 표현하였다. 앞선 작업이 유물론적 관점으로 시간과 결부된 과정 중심의 혼합매체 작업이었다면, 기억의 재배열을 다룬 작업은 관념 중심적이며 전통적 재료인 캔버스와 유화를 사용해 고전적인 스타일의 회화작업으로 표현 하였다. 앞서 유리병이 질료(물질)를 밀폐시켰던 것처럼 회화작업에서는 유리관(종)이 기억의 상징물을 밀폐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다른 작업에서는 유리병-유리관(종)을 대신해 밀폐와 차단, 보호와 단절의 함축적 상징으로 방과 장식장, 벽이 소재로 등장한다. 감각을 통해 인식과 인지의 과정을 거쳐 어디엔가 저장되는 기억의 메커니즘을 상기해볼 때 밀폐와 보존 기능의 소재는 중요한 형식적 요소이다. 질서와 무질서가 혼재된 듯 파편화된 기억의 총체물은 연작 형식을 통해 내러티브를 갖거나, 각기 다른 구조물을 표현함으로써 시간과 상황에 따른 기억의 재배열과 기억의 불확실성을 나타낸다. 유리병에 담긴 물감과 분절된 text. 평면회화작업의 상징과 은유는 특정한 시간과 공간속에서 타자와의 소통을 시도한다. 그러한 시도들은 타자의 기억을 공진시켜 과거의 기억을 호출해내고 재배열하여 다시 저장하며, 이 과정에서 작가의 것과는 별개의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질 것이다. 따라서 이 작업들은 감상자에게 특정한 감정적·심리적 반응을 기대하거나 요구하지 않는다. 물질과 기억의 재배열이란 과정을 살펴보면 그 끝엔 물질(질서)의 소멸과 기억의 망각이라는 정해진 결말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인간이 부여한 물질의 질서는 시간 속에서 파편화되어 무질서로 수렴될 것이고, 기억 또한 반복적으로 상기하지 않으면 파편화 되어져 인식 속에서 멀어져 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피해갈 수 없는 결정론의 한 단면이 의미 있는 이유는, 그 기억의 층위 위에 서있는 자신과 이 순간 내가 속한 시간·공간을 주목하고 인식하게 하는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