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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자신의 봄을 볼 수 있는가? -후설 현상학의 대상과 방법에 대한 미셸 앙리의 삶의 현상학의 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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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정성경

Advisor
이남인
Major
인문대학 철학과
Issue Date
2016-08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물질현상학정감성자기-촉발현상학적 환원직관명증감정생명내재로고스
Description
학위논문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철학과 서양철학전공, 2016. 8. 이남인.
Abstract
이 논문은 후설 현상학의 대상과 방법에 대한 앙리의 『물질현상학』 2부의 비판을 내적으로 재구성하고 그 현상학적 의의와 한계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목적을 추구함으로써 우리는 후설의 지향성과 다른 정감성(Affectivité) 개념이 주체성의 본질로서 앙리의 삶의 현상학에서 차지하는 고유한 지위를 드러내고, 그것이 현상학의 토대라는 앙리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고자 노력할 것이며, 이러한 노력 끝에 불투명하게 남아 있는 지점들에 대한 비판 또한 시도해볼 것이다.

현상학은 객관주의에 경도된 철학들로부터 그 모든 객관성의 근원인 주체성으로 되돌아오려는 시도이며, 주체성으로부터 출발하여 모든 객관성들을 주체성의 토대 위에 올바르게 정초하려는 기획이다. 주체성의 본질은 무엇이며, 어떤 원리에 입각할 때 현상학의 이러한 기획이 가장 일관적이고 성공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가? 이는 후설과 앙리의 현상학이 각기 묻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상이한 대답에 따라 이 둘의 현상학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전개된다. 상이한 두 현상학의 전반적인 모습을 그리는 것은 본고의 범위를 벗어난다. 우리는 다만 현상학적 환원이라는 후설 현상학의 방법과 그에 대한 방법론적 고찰, 그를 통해 규정되는 현상학의 대상에 대한 미셸 앙리의 문제제기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저 문제에 간접적으로 대답하고자 한다. 본고는 후설의 현상학을 비판하는 기본적인 논조에서는 앙리의 입장을 충실히 따르되, 앙리가 분명하게 지적하지 않는 근거들과 관련해서는 그의 논의의 일관성을 해치지 않는 한에서 재구성할 것이다.
우리는 앙리의 정감성 개념이 지향성을 주축으로 한 후설 현상학의 체계 속에 한 부분으로서 덧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정감성을 토대로 삼아 현상학 전체를 전복하고 갱신하려는 기획임을 드러내기 위해 현상학의 전반적인 모습에 대해서 다소 무게감 있게 다룰 필요가 있었다. 1부가 현상학적 보편존재론으로 이해되는 제일철학으로서의 현상학의 이념을 소개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후설에 고유한 명증의 이념과 이로 인해 방법적인 탐구가 핵심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되는 흐름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까닭이다. 이어지는 2부에서는 후설 현상학의 방법인 현상학적 환원과, 현상학적 환원의 환원이라 일컬어지는 방법론적 고찰이 해당 텍스트에 밀착하여 충실히 소개된다. 후설의 현상학적 환원과 관련해서는 1907년 강의인 『현상학의 이념』이 채택되어 앙리의 비판이 겨냥하고 있는 대상의 전모를 드러내고 있다. 방법론적 탐구와 관련해서는 오이겐 핑크의 『제6 데카르트적 성찰』이 채택된다. 이는 현상학적 환원을 전개하는 후설 자신에게 의식되지 못한 채로 있었던 내적 균열이 방법론적인 철저화를 지향하는 후설적인 현상학 안에서 해소될 가능성이 난망함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에서 첨가된 것이다.
두터운 배경적 고찰을 거친 이후 3부에 이르러서야 후설 현상학에 대한 미셸 앙리의 비판이 적극적으로 다루어진다. 앙리는 현상학적 대상을 명증하게 보인 것으로 만들기 위한 방법적인 절차로서의 현상학적 환원에 대해, 반(反)-환원을 수행하면서 cogitatio라는 토대로 되돌아간다. 후설의 초월론적 현상학이 이미 데카르트와 더불어 발견했던 바 있는 cogitatio를 후설은 명증하게 보고자 했으며, 자기 밖으로 나가 자신에 대해 마주 선 대상들을 만나는 지향성이라는 본질을 지닌 것으로 규정했지만, 앙리에게 cogitatio는 결코 명증하게 보인 것이 될 수 없는 비가시적인 삶이며, 자기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고 자기 안에 온전히 머물러 있는 순수 내재적인 것이다. 앙리에서 순수 내재적인 삶은 보이지 않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이미 가장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으며, 보이는 것을 명증하게 보는 것은 이 드러남의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다. 후설적인 명증의 이념은 오히려 이 삶의 확실함에 정초되어 있으며, 모든 것의 토대로서 보이기 전에도 스스로 드러나고 있는 삶의 본질은 바로 정감성이다. 앙리는 지향성이 아니라 정감성이 제일철학으로서의 현상학의 진정한 토대라고 주장한다.
앙리는 현상학의 의의를 철저하게 근본적으로 계승하려는 현상학자로서, 시초에 현상학이 나타난 것으로서의 현상이 아니라 나타남의 방식, 즉 현상성을 문제 삼는 바로 그 이념을 현상학의 근본 의미로서 받아들인다. 진정한 의미의 철학으로서의 현상학은 개별과학의 탐구대상인 개별 존재자가 아니라 개별 존재자들을 나타나게끔 하는 나타남의 방식(Wie)을 자신의 주제로 삼아 탐구를 전개해 나가는 학문이다. 그런데 후설에서는 이 나타남의 방식이, 이 나타남의 방식을 또 하나의, 그러나 탁월한, 나타난 것으로서 보기 위한 방법의 매개를 통해서만 이해되는 것이 된다. 그러나 현상학적인 전제에 대해서 다시 묻는 앙리는 현상학의 방법을 현상학의 대상으로 되돌릴 것을 주장한다. 그는 현상학이 자신의 원리 상 문제 삼는 고유한 대상은 나타남의 방식임을, 이러한 현상학의 대상은 학에 고유한 방법적인 매개 없이 그 스스로 드러나는 것임을 주장한다. 앙리에서 이 나타남의 방식은 삶을 반성하는 명증한 봄의 방식조차 자신 안에 포괄하는 삶 그 자체의 방식이다. 이 삶이 바로 현상학의 대상, 명증하게 객관화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는 대상이 아니라고도 할 수 있는 대상이다.
봄에 의해 보인 것으로서의 대상과 진정한 현상학적 대상인 삶의 구분을 앙리는 나타남의 이중성 테제를 통해 정당화한다. 이 테제에 입각하여 앙리는 보인 것을 보는 봄이 세계 안의 존재자를 보는 지향성이라는 본질을 지닌 반면, 봄의 작용 그 자체가 귀속되는 더 근원적인 것으로서의 삶은 나타남 그 자체임을 밝힌다. 나타난 것인 존재자 이전에, 또한 존재자의 나타남보다도 이전에, 그 토대로서 나타남의 자기나타남이 있다. 이 자기나타남에서는 나타남의 작용과 나타난 것이 둘로 구분되지 않고 하나의 동일한 것이다. 앙리에서 이 자기나타남이 바로 주체성의 나타남으로서 곧 삶이다. 이것은 자기 외부의 어떤 것의 나타남 혹은 자기와 다른 어떤 것과 관계를 맺는 나타남과 구분되며, 다른 어떤 것의 나타남 없이도 스스로 나타남으로써 다른 모든 것의 나타남을 존재론적으로 정초짓는 초월론적 조건이다.
본고의 4부는 앙리의 삶의 현상학에서 이 자기나타남으로서의 삶의 본질이 정감성(Affectivité)이라는 점을 적극적으로 해명하면서, 그 현상학적 함의와 이론적인 난점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 정감성(Affectivité)은 자기-촉발(auto-affection)의 본질로서, 감정(sentiment)의 힘을 의미한다. 모든 종류의 타자-촉발(hétéro-affection)은 스스로 겪는 자기느낌인 이 자기-촉발의 토대 위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 후설의 현상학은 주체성의 본질을 세계를 나타나게 하는 본질인 지향성 한 가지로만 상정해 왔지만, 주체성의 나타남에는 이원성이 있고, 주체성의 본질은 타자-촉발인 지향성보다 더 근원적으로 정감성이다. 지향성은 주체가 타자성을 만나는 본질인 반면, 정감성은 타자성과 만나기 이전에 있는 내재적인 주체성 그 자체, 즉 자기성(Ipséité)을 이루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촉발하는 삶은 비가시적이다. 비가시적인 삶은 가시성을 이루는 세계 이전에 있으면서, 세계를 가능케 하는 것이다. 가시적인 세계를 구성하기 이전에 그 자체로 비가시적으로 있는 삶을 드러내려고 하는 앙리의 현상학의 기획은 세계 없는 내적 삶의 현상학이라고 명명될 수 있다. 이 내적 삶은 어떤 경우에도 객관화되지 않고 이념으로서 존재하지 않으며, 언제나 스스로를 직접적으로 느끼는 정감적인 삶이다. 순수 내재적인 삶의 정감성은 우리가 자기 밖으로 나가 타자를 만나고 세계를 구성하는 가운데서도 자신을 빠져나가거나 소진되지 않고 자기 안에 온전히 그 자체로 머물러 있다. 이 있음은 곧 스스로 나타남이다. 삶의 자기나타남은 로고스의 근원적인 의미를 담지하는 삶의 말이다. 이 삶의 말은 어떤 것을 명증하게 직관하는 사유를 통해서는 포착될 수 없는 비가시적인 것이지만, 그 자신 가장 확실하여 결코 의심할 수 없는 것이다. 지성적 사유의 눈으로 재단할 때에만 모호하고 신뢰할 수 없는 것이 되는 이 비가시적 삶이, 그 삶 안에서 나타나는 모든 개별적인 존재자들의 토대가 된다. 정감적 삶을 토대로 삼는 앙리의 현상학은 보편존재론으로서의 제일철학의 이념을 가진 현상학의 가장 일관적인 전개이며 가장 근본적인 현상학의 성립이다.
4부의 말미는 정감성을 토대로 삼는 앙리의 현상학 안에서는 간과되고 있는 몇 가지 물음들을 드러내는 데에 할애되고 있다. 한 가지 문제는 비가시적인 삶이라는 사태에 대한 철학적 사유의 지위와 관련된 문제이다. 어떤 것을 명증하게 볼 수 있는 봄의 힘, 그것은 사유의 힘으로 여겨져 왔다. 철학하는 삶은 사유와 더불어 시작하며, 사유는 삶 자체에 대해 서술한다. 앙리가 삶의 현상학을 통해 사유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에 삶을 다시 놓음으로써 삶과 사유를 정초관계를 재정립한다고 할 때, 사유 자신이 고유하게 지닌 대상영역을 밝혀주는 힘, 모호하여 분명히 드러나지 않던 문제를 객관적으로 명시화하여 해결가능성을 열어주는 힘은 궁극적인 토대인 삶과의 관계에서 어떤 중요한 지위도 차지하지 못하는가? 앙리의 삶의 현상학의 경우라 할지라도 삶에 대한 철학적 사유는 삶 자체와 구분되는 고유한 층위를 지니며, 앙리 역시 이 철학적 사유에 힘입어 자신의 삶의 현상학을 전개해 나가지 않았는가? 우리는 삶이 아니라 삶에 대한 사유의 층위에서, 삶의 언어이기보다는 사유의 언어로, 저술이나 토론의 형태로 철학적 담론을 주고받기에, 이 철학적 사유의 층위에서 사태에 대해 진실하게 말하기 위한 조건으로서 후설적인 명증의 이념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 않은가?
위의 물음이 사유에 대한 삶의 토대적 지위까지는 손상시키지 못하는 부차적인 질문일 수 있다면, 앙리 역시 인정하는 삶의 또 한 가지 본질과 관련된 문제는 보다 근본적이다. 이는 타자성과 관련되어 있다. 타자성을 만나는 주체의 본질인 지향성 개념과 정감성 개념은 현상학의 토대로서의 지위를 둘러싸고 쉽게 끝나지 않을 싸움을 벌일 것이다. 이성적 사유의 학적인 대상화 이전에도 우리의 사실적인 삶은 늘 세계 안에서, 세계 내의 사물들을 바라보고, 대상화하고 명명하고, 판단하고, 그에 대해서 말하는 가운데 있다. 우리의 자기느낌, 자기-촉발(auto-affection)은 항상 우리 밖에 있는 어떤 것들에 의한 촉발(hétéro-affection)과 더불어 일어나고 있다. 만일 자기-촉발 없는 타자-촉발이 가능하지 않은 것처럼 도대체 타자-촉발이 없는 자기-촉발 또한 가능하지 않다면, 즉 타자-촉발에 대한 자기-촉발의 독립성이 가능하지 않다면, 어떻게 우리는 자기-촉발이 타자-촉발에 대해서 토대적인 우위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의문들에 대해서, 그리고 그로 인해 암시되는 실천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본고는 간략히 언급할 뿐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지는 않다. 이는 추후 진행될 탐구들의 실마리가 될 것이다.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3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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