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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중후반 준가르의 정치 -셍게(Sengge)의 집권기(1653-70)를 중심으로- : 十七世纪中后期准噶尔的政治 -以僧格的统治时期(1653-70)为中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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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윤성제

Advisor
김호동
Major
인문대학 동양사학과
Issue Date
2014-08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오이라드준가르갈단셍게할하
Description
학위논문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동양사학과, 2014. 8. 김호동.
Abstract
본고는 셍게의 집권기(1653-70)를 중심으로 17세기 중후반 준가
르의 정치에 대해 서술한 글이다. 天山北方에서 활동하던 4오이라드
의 한 부족인 준가르는 17세기 후반이 되면 天山南北에 걸친 유목
제국을 건설했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4오이라드를 통합한 갈단의 업
적에 주목하여 그 전임자인 셍게와의 차이를 강조했다. 셍게는 집권
기간 동안 유산 분배를 두고 형제들과의 갈등에 시달리다 암살된
인물로, 갈단은 종교적 카리스마와 세속의 권력을 두루 갖춘 군주로
대비되었다. 하지만 그간의 연구에서 밝혀진 몇 가지 사실만 종합해
보아도 셍게는 17년의 집권기 동안 수차례의 내전과 대외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고 준가르의 역량을 강화시켜 다른 부족들에 대한 우위
를 확립했다. 이에 본고에서는 셍게의 집권기를 재조명함으로써 이
시기가 준가르의 패권 형성에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살펴볼 것이다.
셍게가 십여 명에 이르는 형제들을 제치고 바투르 홍타이지의 후
계자가 된 것은 그의 모계 혈통 및 준가르와 호쇼드 두 부족 간의
동맹관계 때문이었다. 그는 티베트를 정복하고 달라이라마의 보증을
받은 구시 칸의 외손이었으며, 호쇼드 수령 오치르투의 사위였다.
바투르는 部衆을 둘로 나누어 후계자인 셍게에게는 우익을, 나머지
여덟 명의 자식들에게는 좌익을 맡겼다. 이는 바투르 홍타이지의 아
내들 가운데 셍게의 모친인 아민 다라가 가장 서열이 높았다는 사실뿐
아니라, 호쇼드와의 지정학적 관계와도 관련이 있다. 준가르의
우익의 목지는 일리 계곡과 그 일대였으며, 좌익의 목지는 이르티스
상류와 호복사르의 지역이었다.
바투르 홍타이지가 사망하고 4년 후인 1557년에 준가르에서는
우익과 좌익 간의 내전이 벌어졌으나 셍게는 장인인 오치르투와 숙
부인 추쿠르 우바시의 도움으로 2년 만에 좌익의 형제들을 진압했
다. 이어 1661년 호쇼드에서 내전이 발생하자 셍게는 호이드의 솔
톤 타이시와 함께 오치르투를 지원하여 그의 이복형제인 아블라이
를 제압했다. 준가르와 호쇼드에서 발생했던 내전은 모두 남북 간의
대치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는 각각 호복 사르 지역과 타르
바가타이 산맥에 근거하고 있던 바투르 홍타이지와 오치르투 타이
지가 일리 지역으로 남하한 것과 관련 있다.
일리 지역은 지형이나 목지의 질, 농경의 도입에 유리한 조건을
두루 갖추었을 뿐 아니라, 정주 지역인 타림 분지의 오아시스로 접
근이 용이했다. 오이라드가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天山北方의 유목
민들은 일리 지역을 중심으로 타림 분지를 지배함으로써 국가의 건
설과 유지에 필요한 물자와 인력을 취해왔다. 이와 더불어 4오이라
드와 티베트의 관계가 밀접해지면서 일리 지역은 양자 간의 주요
교통로로도 활용되었다.
동몽골의 정세가 급변하자 셍게는 근거지를 북쪽으로 옮기게 된
다. 1662년에 호트고이드의 수령 롭장 에린친이 자삭투 칸인 왕축
을 살해하고 투셰투 칸의 공격을 피해 알타이 산맥 쪽으로 이동한
것이다. 준가르에서는 러시아가 호트고이드를 군사적으로 지원하는
상황을 우려했다. 셍게는 바투르 홍타이지 이후 소원해졌던 러시아
와의 접촉을 재개했으며 할하 우익의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셍
게는 호트고이드를 공격하고 屬民들과 營地를 병합했다. 또한 살해
당한 왕축을 대신해서 그의 동생 쳉군을 새로운 자삭투 칸으로 세
웠다. 준가르는 과거 자신들에게 야사를 바치던 속민들의 귀속 문제로
러시아를 압박했고, 시베리아의 일부 요새를 공격하기도 했다.
이처럼 준가르는 북방에서의 군사 행동을 벌여 예니세이河 유역까
지 영역을 넓히는가 하면 수많은 속민들을 확보했다. 또한 모굴 칸
국에 대한 원정을 통해 天山 이남 진출에 적극적이었던 호이드와
그가 지원하는 이스마일의 군대를 물리치고, 압둘라 칸의 아들 욜바
르스의 카쉬가르와 야르칸드 장악을 지원하면서 정주 지역인 모굴
칸국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세금을 거두었다. 이처럼 남북을 오가며
벌인 원정으로 준가르는 수많은 물적·인적 자원을 확보했고 이는 향
후 호쇼드 등 4오이라드의 다른 부족들을 압도하는 토대가 되었다.
하지만 여러 세력들이 복잡한 구도로 경쟁하는 오이라드 내에서
남북으로 동시에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은 약점으로 작용하기도 했
다. 셍게는 초쿠르 우바시의 세력을 효과적으로 제어하지 못했다.
그로 인해 이르티쉬河 주변에서 벌어진 분쟁의 와중에 모굴 칸국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했으며, 급기야 異母兄인 초드바 바투르
에게 암살되고 말았다. 셍게가 사망하자 동생 갈단이 준가르의 수령
자리를 이어받았다. 엔사 후툭투의 轉生이라는 종교적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던 갈단은 오이라드의 다른 부족들에 대한 병탄을 실행
하여 준가르의 단일 패권을 확립했다. 타림 분지의 오아시스 도시들
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모굴 칸국 신비주의 교단의 하나인 白山黨과
손잡은 것은 셍게의 행적을 답습하는 것이었다. 또한 할하의 분열에
대한 개입은 셍게의 호트고이드 원정 및 할하 우익과의 관계 구축
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는 등 갈단의 대외 정책 중 많은 부분은 셍
게가 시도했던 방향과 유사하게 이루어졌다.
셍게의 대외 활동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칭기스 일족의 칸을 두
명이나 즉위시켰다는 것이다. 한때 동쪽으로는 할하, 남쪽으로는 모
굴 칸국, 서쪽으로는 카자크라는 칭기스 일족들의 틈바구니에서 살
아남기에 급급했던 준가르가 셍게의 시대에는 자삭투 칸과 모굴 칸
을 세울 정도로 그 역량이 성장했던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셍게의 집권기는 이후 갈단이 통일 군주가 되고 준가르가 유목
제국으로 발돋움하는 데 중요한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3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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