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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후기 朝廷의 浮上과 '學問'의 역할
徳川後期における朝廷の浮上と「学問」の役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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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김형진
Advisor
朴薰
Major
인문대학 동양사학과
Issue Date
2015-02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天皇朝廷公家尊王思想(尊王論)學的 네트워크水戶學(미토학)
Description
학위논문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동양사학과, 2015. 2. 朴薰.
Abstract
도쿠가와(德川) 시대 현실정치로부터 遊離되어 있던 朝廷은, 안세이(安政) 5(1858)년의 美日修好通商條約 勅許問題를 기점으로 정치적으로 ‘浮上’하게 된다. 그러나 조정이 정치적으로 ‘부상’할 여건이, 이 시기에 이르러 갑자기 조성된 것은 아니다. 본 碩士學位 論文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도쿠가와 후기에서 그 토대를 찾아야 한다는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조정이 ‘부상’하는 배경에는, ‘國家大事’에 대한 조정의 관심・참여가 당위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는 사실이 있다. 이를 ‘政治意識’의 자각 내지 명확화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이 ‘學問’의 정치적 역할이다.
기존의 조정 연구에서 학문의 문제를 다룰 경우, 古制・儀式의 고증 등 이른바 ‘有職故實’적 지식이 중요히 다뤄져 왔다. 그러나 통치이념, 현실정치에 대한 의식과 관련해서는, 중국・한반도의 王室・士大夫가 그러했듯 經史, 즉 유학과 역사의 학습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본고의 I.에서 초점을 맞춘 것은 天皇을 중심으로 한 宮中에서의 학습 양상이다. 도쿠가와 시대의 천황에게는 ‘禁中幷公家諸法度’의 첫 조항으로 상징되듯이, 관념적으로는 학문에 힘쓸 것이 표방・강조되었다. 그러나 구체적 양상을 보면 經史의 학습은 와카(和歌) 등 文學에 비해 그다지 중요시되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덴메이(天明)・간세이(寬政) 연간(1781-1801)이 되면 御所의 재조영 등을 계기로 조정에서 ‘復古’의 기운이 무르익는다. 당시 고카쿠(光格) 천황은 강렬한 ‘君主意識’을 가졌다고 평가되는데, 그 배경으로서는 학문에 대한 관심 또한 거론된다. 단 본고에서는 기존 연구에서 거의 조명되지 못한 고사쿠라마치(後櫻町) 상황의 역할에도 주목하였다.
고사쿠라마치 상황은 朝幕 관계의 원만한 유지에 힘쓰며, 모내기・수확 儀式의 御覽에서 보이듯이 民의 생활상에도 관심을 보인다. 또한 그녀는 기록의 공백기를 제외하더라도 20년 이상을 지속하여, 紀傳道・明經道를 각각 家業으로 하는 스가와라(菅原) 씨(菅家)・기요하라(淸原) 씨 계열의 공가들로부터 經書의 강의를 들었으며, 『左傳』의 會讀을 시행하기도 했다.
고사쿠라마치 상황은 간세이 11(1799)년 고카쿠 천황에게 서한을 보내 유학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天下萬民을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이는 고사쿠라마치 상황이 학문에의 관심에 입각한 輔導를 통해 고카쿠 천황의 ‘군주의식’에도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
학문에 대한 관심은 닌코(仁孝) 천황 재위기에 한층 상승하고 있다. 분세이(文政) 연간(1818-30)의 궁중에서는 『後漢書』 등 중국 正史의 會讀이 이뤄지기 시작한다. 고사쿠라마치 상황 시기와 같이, 이 또한 菅家・기요하라 씨의 주재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5명 가량의 近臣이 함께 참가한 회독이라는 학습 방법은, 고사쿠라마치 상황의 경서 진강과는 구분된다.
고사쿠라마치 상황 시기의 『좌전』회독은 일시적으로만 행해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닌코 천황의 역사서 회독은 정례화된 행사로서 재위기를 통틀어 계속되며, 그 운영 또한 면밀해지고 있다. 정사를 시대순으로 읽는다는 면에서, 커리큘럼 또한 체계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덴포(天保) 연간(1830-44)에는 『日本書紀』를 비롯한 六國史를 회독하는 和御會 또한 이뤄지게 된다. 기존의 漢御會와 달리 和御會는 스가와라・기요하라 씨의 주재가 아니었고, 다른 공가들이 보다 능동적으로 참여할 여지가 있었다. 참석 인원수의 증가로 和御會를 3그룹으로 분반하여 운영하기로 하는 등, 회독 참여는 다양한 층위의 공가에게도 확대되고 있다. 참가자들이 텍스트 판본의 교감을 행하는 등 학습의 수준 또한 상승하고 있었다.
덴포 10(1839)년 이후의 漢御會에서는 정사 대신 朱熹의 『資治通鑑綱目』이 채택된다. 南朝正統論을 채택한 미토 번(水戶藩)의 『大日本史』 헌상이나 궁중에서 역사서 회독과 병행된 경서의 진강 등과 아울러 생각해보면, 조정에 대한 朱子學・正統論的 이념의 영향력이 증대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닌코 천황은 회독 등의 행사에 형식적・수동적으로 임한 것이 아니었다. 기존 연구에서 닌코 천황의 존재는 부친인 고카쿠 천황이나 아들인 고메이(孝明) 천황에 비해 부각되지 않으나, 조정에서 經史를 중심으로 한 학문의 활성화는 닌코 천황 본인의 적극성으로 인해 가능했다.
관백 다카쓰카사 마사미치(鷹司政通)는, 닌코 천황이 國史 등을 좋아하며 武家의 대두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식을 갖고 萬事의 처리에 임했음을 증언한다. 이전부터 있었던 ‘복고’ 의식이 역사의 학습과 맞물리며 한층 상승한 것이다. 또한 닌코 천황 재위기에는 공가 교육기관인 學習院 설립이 발의・추진된다. 이들 사례는 학문에 대한 천황의 관심이 개인적 ‘好學’에 머무르지 않았고, 조정 전체의 의식 제고를 시야에 넣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조정이 幕府에 내세운 학습원 설립의 명분은, 공가사회의 기강이 해이해졌고 그 원인이 교육의 부족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공가의 품행 문제는 결코 이 시기에 새삼스레 나타난 것이 아니다. 학습원의 설립 목적이 단순히 젊은 공가들의 非行을 矯正한다는 차원에만 머무른다고 보기는 힘들다. 여기서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 尊王思想의 확산이라는 외부 사회의 동향이 조정의 ‘학문’ 열기와 갖는 관계이다. 본론의 II.가 이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이다.
존왕사상에서 궁극적으로 崇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천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왕사상에 대한 사상사적 연구와, 존왕사상의 한쪽 ‘당사자’라 할 수 있는 천황・조정의 연구는 서로 접합되지 못해 왔다. 존왕사상 확산이라는 사회/사상동향과의 관계 규명을 통해, 조정 내부에서의 ‘학문’ 열기 상승이 갖는 의미 또한 더욱 명확히 드러날 수 있다.
본론의 II-1.에서는 우선 조정의 사회적 권위 상승이나 막부의 對 조정 방침 변화 등 존왕사상 확산의 배경들을 살펴보고, 이어서 在野의 尊王論者 지식인층과 공가의 ‘學的 네트워크’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는 역시 오쿠보 도시아키(大久保利謙) 등의 선행연구에서 언급되는 바이나 그 의미부여가 충분하지 못했다고 보이며, 본고에서 이를 종합・보완하려 하였다.
덴포 후기가 되면, 존왕론자들의 공가사회 접근 양상이 뚜렷해진다. 고카(弘化) 4(1847)년 학습원 개강 이후 그 영향은 더욱 확대된다. 학습원 강사의 다수는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齋)・아사미 게이사이(淺見絅齋)의 계보를 이었으며, 강렬한 주자학적 명분론과 천황 존숭으로 알려진 기몬 학파(崎門學派)와 관련되어 있다. 이들은 교육만 담당했던 것이 아니라, 페리 내항 이후에는 조정에 정치적 조언을 행하는 등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고 평가된다.
그리고 이 시기, 조정 구성원의 말단인 지게관인(地下官人) 출신인 사이다 고레사다(座田維貞)라는 인물은 皇統意識과 水土論에 입각하여 일본에서는 중국과 같은 放伐・革命論이 적용될 수 없음을 강조하는 ‘和魂漢才’說의 유포에 힘썼다. 그는 관백이나 스가와라・기요하라 일족, 학습원 강사 등 조정 관계자들과 두루 인맥을 형성하며, 와케노 기요마로(和氣淸麻呂)의 추증 등 조정의 정책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존왕론자 지식인들은 당시의 사료에서는 ‘和魂의 무리’나 ‘王室家’ 등으로 비유되고 있다. 이들이 조정에까지 접근하는 상황은 재야의 존왕론자 본인들이나, 쇼군(將軍)의 宗親인 도쿠가와 나리아키(德川齊昭)와 같은 무가 상층부에까지 인지되고 있었다.
II-2.에서는 조정과 미토 번과의 관계에 주목하였다. 미토 번의 후기미토학(後期水戶學)이 사상적으로 막말의 尊王攘夷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음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페리 내항이나 특히 안세이 대옥(安政大獄)의 발단이 되는 戊午의 密勅 이전의 미토-조정 관계는 그리 주목되지 않았기에, 존왕사상의 조정 유입과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이를 규명하려 하였다.
藩主 도쿠가와 나리아키는 조정과 긴밀한 혼척관계를 가졌다. 아리스가와노미야(有栖川宮) 親王家의 여식을 正室로 맞이하였으며, 이 외에도 측실 다수가 조정 출신이었다. 또한 나리아키의 누이 둘은 각각 관백 다카쓰카사 마사미치와 역시 섭관가인 니조(二條)의 정실이었다.
나리아키 집권기 이후, 미토와 조정은 여러 가지 사안에서 정치적으로 접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告志篇』 등 나리아키의 대외적 修辭에서는 항상 조정을 존경해야 하는 것으로 논해진다. 그러나 나리아키는 다른 곳에서 “天朝는 君, 막부는 宗家”라고 표현했듯이 명백히 천황을 ‘君主’로 인식하였고, 막부의 內情에 대한 極秘 정보를 조정에 제공하는 등, 그의 조정 접근이 단순히 막부를 위하기 때문이라는 차원에 머무른다고 보기는 힘들다.
나리아키와 황족・공가들의 혼인관계 또한, 단순히 우호의 상징이나 형식・의례의 영역에 머문 것이 아니다. 혼인관계를 매개로 하는 조정과 미토의 비공식적 연락망이, 양자 간의 의사 교환에 실질적으로 역할하고 있었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미토의 학문・사상 또한 조정에 유입되어 갔다. 『八洲文藻』 등 미토 번의 저작이 잇달아 조정에 헌상된 것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저작의 헌상에서는 上表文이 첨부되기도 했는데, 나리아키가 미리 관백 마사미치에게 草案을 보여주며 협의하는 등, 이 또한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가진 행위였다.
고메이 천황 즉위 이후 나리아키는 조정에서 ‘國學을 비롯한 皇朝의 學問’에 더욱 관심을 가질 것을 조언했다. 이 시기에는 海防 勅書에서 보이듯이 조정의 대외적 위기의식이 상승하는데, 나리아키 또한 地球儀 등을 헌상하며 해외정세에 대한 조정의 관심을 촉구하고 있었다.
나리아키가 조정에 접근한 궁극적 의도는 확실치 않지만, 결과적으로 王政復古로 이어지는 조정의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음은 분명하다. 메이지(明治) 천황의 즉위식에서 일본의 國威를 四海로 떨치라는 나리아키의 바람이 상기되며 미토에서 헌상했던 지구의가 사용되었다는 사실이, 그 영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조정의 ‘浮上’ 과정에서 ‘학문’이 담지한 정치적 역할은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는가.
고카 3년 고메이 천황의 海防 勅書 이후부터, 학문에 대한 관심이 대외적 위기감의 고조와 맞물리며 ‘정치의식’이 상승할 단서가 마련되기 시작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본격적인 공가들의 정치적 견해 표출이나 천황・조정의 정치적 ‘부상’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페리 내항이나 통상조약 칙허문제라는 외적 자극이 추가로 필요했다.
따라서 페리 내항 이전에 한정한다면, ‘학문’을 통한 조정 구성원의 의식 변화는 ‘政治化’나 ‘정치의식’ 등으로 표현될 수는 없다. 본격적인 ‘정치의식’ 발현의 전 단계로서, 그 토대로서의 의미를 갖는 ‘治者意識’의 상승 내지 명확화로서 규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전 시기의 조정에서 스스로가 일본의 통치자라는, 혹은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는 자기인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도쿠가와 후기, 經史를 중심으로 한 ‘학문’에 대한 관심과 외부로부터의 존왕사상 유입으로, 조정의 ‘치자의식’은 한층 도약하였다고 볼 수 있다.
Language
Korean
URI
http://hdl.handle.net/10371/13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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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ars in Collections:
College of Humanities (인문대학)Asian History (동양사학과)Theses (Master's Degree_동양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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