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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말민초 요하수운의 성쇠와 동북사회
The Rise and Decline of the Liao River Transportation and its Impact in Manchuria in the Late 19th to Early 20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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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김도진
Advisor
김형종
Major
인문대학 동양사학과
Issue Date
2015-08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요하수운영구만철대두무역요하준설요하공정국
Description
학위논문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동양사학과, 2015. 8. 김형종.
Abstract
본 연구의 목적은 淸末 遼河水運이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이 무엇이었는지 고찰해 보는 동시에 요하수운의 구체적인 운영방식을 살펴봄으로써 그간 크게 중시되지 않았던 요하수운을 재조명해보고자 한 것이다. 또한 민국 시기 요하수운이 쇠락해 가는 와중에 보인 지방 정부와 상인계층의 대처방식과 이로 인해 야기된 사회갈등의 사례들을 분석해 보는 것을 통해 당시 동북 지역사회가 어떠한 특수성 내지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는지 알아보고자 하였다.
19세기 중엽 동북지역은 점진적인 封禁의 해제, 移民의 증가, 그리고 天津條約의 체결로 인한 營口의 開港 등으로 인해 이미 상당한 사회변화를 경험하고 있었다. 봉금의 해제와 이민의 증가는 동북지역의 농경지 면적 및 농업생산량을 급속히 증가시켰다. 특히 요하 상류 유역에 위치한 요녕성과 길림성의 接境地域이 開放되기 시작하면서 이곳이 동북지역의 새로운 농업 생산지역으로 부각되기 시작하였으며, 鐵嶺 등이 이러한 생산물의 집산지로 번성하게 되었다. 또한 요하 河口에 위치한 營口는 1861년 개항한 이래 동북지역의 유일한 대외무역항으로써 점차 발전하였다. 요하의 상류와 하류에서 거의 비슷한 시기 생겨난 변화, 즉 상류의 농업생산물 집산지의 형성과 하류의 대외무역항의 발전은 자연히 요하수운이 동북지역의 대표적인 운송로로써 자리 잡을 수 있게 하였다.
동북지역에서 생산되던 大豆 및 그 가공품인 콩깻묵이 일본을 비롯한 외국으로 활발히 수출되기 시작하였던 1890년대 이후 요하수운은 그 전성기를 맞이한 것으로 보인다. 요하수운의 상ㆍ하류에 산재해 있던 각 나루터에는 여러 船店이 영업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주로 농산품의 구입ㆍ저장ㆍ판매, 船戶를 통한 상품의 운송, 세금 납부 대행 등을 담당하였다. 船店은 보통 상인과 船戶를 연결해주는 역할을 수행하였으나, 규모가 큰 곳에서는 자체적으로 선단을 조직하여 市況에 따라 자유로이 상품을 매매하기도 하였다. 상류로부터 운송된 여러 상품들 (주로 大豆 등의 穀類나 羊毛ㆍ牛馬皮)은 영구에서 가공ㆍ저장된 뒤 선박에 실려 타지로 판매되었다. 또 영구를 통해 수입된 상품(주로 소금, 布匹, 도자기, 설탕, 밀가루, 석유 등 雜貨類)은 요하수운을 통해 봉천ㆍ철령 등의 인구밀집지역으로 운반되었다.
그러나 1906년 滿鐵이 영업을 시작하고 大連이 개항하자 요하수운은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에 지방정부와 영구 상인, 그리고 요하수운업자들은 요하수운의 쇠락을 막기 위한 自救策을 마련하는데 고심하였다. 당시 요하수운의 쇠퇴는 滿鐵과 大連이라는 외부의 요인 외에도 요하의 불량한 河道 상태로 인한 빈번한 閉塞이라는 내부적인 요인으로 인한 점도 있었다. 또한 1889년의 대홍수 이래 생겨난 요하의 지류인 雙臺子河로 요하 河水가 흘러들어가는 정도가 점차 심해져 遼河本流의 水量이 계속 감소하였던 것도 큰 문제로 인식되었다. 이에 영구 상인을 중심으로 滿鐵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우선 쌍대자하 입구에 둑을 설치하는 한편 요하본류에 준설공사를 행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지방정부도 1906년 奉天將軍 趙爾巽이 요하준설을 위한 대책을 마련한 것을 시작으로 1907년 東三省總督 徐世昌이 본격적인 계획을 수립하는 등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청말의 이러한 시도들은 재정의 부족과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 좀 더 본격적인 요하준설공사가 이루어진 것은 1914년 遼河工程局이 설치된 이후였으며 1928년에 이르러서야 쌍대자하 하구에 제방이 설치되고 기존의 요하하도를 대신하는 새로운 운하가 만들어지기는 등의 성과를 보게 되었다.
요하수운의 쇠락을 막기 위해 상인조직 내부에서도 요하수운의 적폐를 해소함으로써 만철에 대한 요하수운의 경쟁력을 보다 높이고자 노력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 ‘水濕大豆’의 퇴치운동을 들 수 있다. 당시 요하수운업자 사이에서는 요하를 통해 운반되던 대표적인 상품인 대두에 고의로 물을 뿌려 그 무게를 늘림으로써 이득을 취하고자 하였던 폐단이 만연해있었다. 사실 적당한 수분을 함유한 대두는 완전히 건조된 대두에 비해 搾油에 더 용이하였기 때문에 영구 근방에 자리잡은 油房과 거래를 할 때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외국으로 판매될 경우 ‘수습대두’는 운반도중 선박 내에서 부패하기 쉬웠다. 결국 ‘수습대두’의 폐단은 營口發 大豆에 대한 신용을 잃게 만들었다. 이에 영구의 상인들 및 요하수운업자들은 자체적으로 규약을 정하고 ‘수습대두’를 비롯한 각종 폐단에 대해 나름의 처벌과 감시를 행함으로써 다시금 신용을 회복하고자 노력하였다.
한편 요하수운의 쇠락을 막기 위한 여러 시도들은 동북지역 내에서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집단간ㆍ지역간의 갈등을 야기하기도 하였다. 우선 쌍대자하의 하구를 막아 요하 본류의 수량을 유지하고자 했던 일련의 시도들은 쌍대자하 유역에 위치한 반산현 주민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미 약 십여 년 간 쌍대자하를 이용해오던 반산현 주민들은 쌍대자하 하구를 막을 경우 이 지역의 생업이 위협받을 뿐만 아니라 홍수가 나면 강이 쉽게 범람하게 될 것이라며 크게 반대하였다. 급기야는 공사가 시작되자 주민들을 모아 무력으로 둑을 파괴하고 측량원을 폭행하기까지 하였다. 이처럼 거센 반대에 직면하자 서세창과 휴즈에 의해 계획된 공사는 거의 진행되지 못하게 되었다. 1920년 요하공정국에 의해 다시 요하준설계획이 시작되었을 때에도 반산현의 반대는 여전하였다. 때문에 준설공사를 맡은 岡崎文吉은 기존의 계획을 수정하고 반산현 주민들이 어느 정도 쌍대자하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중재안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그 결과 생겨난 이도교자-협심자 간 운하 및 수문은 요하 수량의 감소 문제를 충분히 해결할 수 없는 불완전한 것이었다.
요하수운을 둘러싸고 사회갈등이 발생한 또 다른 예로 철령과 개원 사이에 벌어진 철도 부설 경쟁을 들 수 있다. 철령은 요하 상류지역에서 생산된 농산품의 집산지이자 요하의 주요 나루터가 위치한 곳으로 요하수운의 발전과 더불어 성장한 지역이었다. 반면 개원은 ‘만철’의 주요역 중 하나로 철도의 영향을 크게 받는 곳이었다. 즉 철령과 개원은 각각 요하수운과 ‘만철’이라는 상이한 운송체계 아래에서 좀 더 많은 운송물량을 확보하기 위해 서로 경쟁할 수 밖에 없는 관계였다. 광서34년(1908년) 이래 海龍ㆍ西豊ㆍ東豊 일대에 부설될 철도를 철령과 개원 중 어느 곳과 연결시킬 것인가를 두고 벌어진 갈등은 이러한 두 지역간의 이해관계를 좀 더 명확히 보여준다 할 수 있겠다. 海龍ㆍ西豊ㆍ東豊 지역과 개원 사이에 철도가 부설된다면, 철령의 상업적 영향력이 크게 줄어들뿐 만 아니라 요하수운의 명맥을 보존하는 데에도 큰 위협이 되었다. 반면 철령에 이들 철도가 연결된다면 요하수운의 영향력은 계속 유지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때문에 철령의 상인들 및 요하수운업자들은 이들 철도가 개원이 아닌 철령과 연결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요청하였다. 그러나 철도부설을 둘러싼 철령과 개원의 요청은 지방정부에 의해 모두 거부되었으며 더 이상의 분쟁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명이 내려졌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요하수운의 발전과 쇠락의 역사는 동북지역의 급격했던 정치적, 사회경제적 변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요하수운의 발전은 청말 동북지역의 농업 및 여러 산업이 발전하고 개항이 이루어지면서 장거리 운송수단의 필요성이 부각되자 자연히 요하가 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요하수운의 급속한 쇠락은 철도의 부설과 외국자본, 특히 일본의 세력 확대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 결과라 볼 수 있겠다. 요하수운의 쇠락을 막기 위한 여러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이러한 시도들은 청말민초의 정치적 혼란과 재정 부족, 그리고 각 지역간의 이해관계의 충돌과 갈등 등으로 최선의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였다.
Language
Korean
URI
http://hdl.handle.net/10371/13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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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ars in Collections:
College of Humanities (인문대학)Asian History (동양사학과)Theses (Master's Degree_동양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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