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豊臣 정권 起請文의 특징과 그 기능
豊臣政権起請文の特徴とその機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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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김건우
Advisor
박수철
Major
인문대학 동양사학과
Issue Date
2016-02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豊臣秀吉起請文聚樂第行幸霊社上卷起請文
Description
학위논문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동양사학과, 2016. 2. 박수철.
Abstract
起請文이란 일본 중세를 상징하는 문서 형식의 하나이다. 때문에 지금까지의 起請文 연구는 중세의 起請文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戰國時代 및 近世의 起請文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戰國大名의 起請文 활용에 대한 연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선행 연구에서는 戰國時代와 近世의 사이에 위치하는 織豊 정권의 起請文에 관한 연구는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豊臣 정권의 경우 1593년(文禄四) 이후의 起請文에 대한 연구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豊臣秀吉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순간마다 起請文을 활용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그 원인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고, 1593년부터 ‘霊社上巻起請文’이라는 형식의 起請文을 거두어들이는데, 그 이유 또한 명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이와 같은 의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秀吉이 작성한 起請文과 豊臣 정권이 징수한 起請文들을 대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 우선 戰國時代 起請文의 특징을 확인하고, 그것을 전제로 織田政權期 秀吉이 작성한 起請文의 특징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戰國時代에는 武士 간 上下 관계 또는 對等한 관계를 바탕으로 起請文을 교환하였다. 이 때, 血判은 해당 문서의 진위 여부를 파악하기 위하여 활용되었다. 수신인을 기재하는 행위는 해당 서약의 당사자가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는 戰國時代에 起請文이 ‘사람 간의 계약을 기록하기 위하여’ 작성하는 문서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다만, 神佛 앞에서 서약하는 문서 형식은 부정되지 않았다는 점으로부터 神佛의 권위가 부정당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한편, 秀吉이 작성한 起請文으로서 현재 확인 가능한 문서는 총 4통이다. 작성 시기는 1577년(天正五)부터 1582년까지이다. 이를 분석한 결과, 그의 起請文 활용 방식은 戰國大名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평가할 수 있다. 다만 神文에 勸請한 神佛의 수가 점차 증가하는 경향을 보이고, 지역성이 없는 神佛을 勸請하였으며, 京都의 정세를 수습하는 지위에 올라서야 佛敎界의 神佛을 勸請하기 시작하였다는 점은 특징적이다.
 1588년(天正十五) 後陽成 天皇의 聚楽第 行幸에서 諸大名이 작성한 起請文은 秀吉과 後陽成天皇 간에서 이루어진 계약을 諸大名이 준수하겠다고 서약한 문서이다. 그 내용은 行幸에 참가한 것에 대한 감사인사, 天皇家에게 바치고 公家 및 門跡들에게 내린 토지와 세금 징수권 등을 諸大名이 영원토록 지키겠다는 서약, 이후로도 關白의 명령을 따르겠다는 서약, 세 가지이다.
 「聚樂第行幸記」에 의하면, 해당 起請文은 秀吉의 명령하여 작성한 것으로, 그 수신인은 後陽成天皇이다. 해당 起請文의 특징은 총 세 가지이다. 하나는 대부분의 諸大名이 豊臣氏를 칭했다는 점이다. 이는 秀吉이 개인적으로 바친 토지 및 세금 징수권 등에 諸大名이 관여할 수 있도록 마련한 장치라이다. 두 번째는 起請文의 案文이나 답변에 대항하는 문서가 없다는 점이다. 이는 諸大名이 해당 계약의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諸大名은 제삼자로서, 해당 계약을 준수하겠다고 서약하였다. 이는 神文에 秀吉과 天皇과 관련 있는 존재만 勸請되었다는 사실로부터도 확인할 수 있다. 때문에 해당 문서는 諸大名이 天皇과 關白의 명령을 따르겠다고 서약한 일종의 충성 서약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세 번째는 行幸에서 起請文을 작성한 사례가 없다는 것이다. 秀吉은 諸大名을 擬制的으로나마 豊臣家의 一門으로 만들고, 天皇―關白―諸大名으로 이어지는 지휘체계를 만들어냈다. 이를 위하여 그는 선례를 지키지 않고, 본래 3일 예정이었던 行幸을 5일로 연장할 것을 제의하고, 이를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토지 등을 바쳤으며, 해당 계약을 지키게 한다는 구실로 諸大名에게 起請文을 작성시켰다. 이와 같은 起請文 활용 방식은 戰國時代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天皇으로 대표되는 朝廷의 권위를 활용하였다는 점은 특징적이라고 할 수 있다.
 1593년(文禄四), 関白이자 豊臣家의 家督이었던 豊臣秀次가 秀吉로부터 추방되어, 마침내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秀吉은 直臣에 해당하는 奉行衆을 비롯하여 諸大名으로부터 起請文을 거둬들였다. 그 이유는 새롭게 家督의 자리에 오른 秀賴에 대한 충성을 보장받기 위해서였다. 이 때, 諸大名이 羽柴氏를 칭함으로서, 秀賴와 諸大名의 관계는 家督과 一門을 이루었다. 그리고 秀吉은 ‘霊社上卷起請文’이라는 형식의 神文을 채택하였는데, 이는 神佛의 권위를 최대한 활용해서 秀頼에 대한 충성을 확실하게 보장받으려는 秀吉의 바람이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598년(慶長三) 秀吉의 사망을 전후로 일련의 起請文이 작성되었으나, 그 내용이나 형식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1593년의 起請文群과 동일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秀吉의 起請文 활용 방식은 기본적으로 戰國大名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織田政権期의 起請文은 더더욱 그러하다. 그렇지만 1588년 聚樂第 行幸의 起請文은 충성을 서약하거나 명령·法度의 준수를 서약하는 起請文의 범주에 포함되지만, 天皇의 권위를 활용하는 활용 방식이 특징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렇지만 1592년의 秀次 事件을 계기로, 秀賴가 家督을 상속하게 되면서 秀吉은 諸大名으로부터 秀賴에 대한 충성을 확실하게 보장받으려고 하였다. 이는 秀賴에 대한 직접적인 충성의 서약, 秀吉의 法度를 지키겠다는 조항 등과 함께 霊社上卷起請文이라는 神文의 채택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秀吉의 起請文 활용 방식은 同年 8월 제정한 御掟와 합쳐지면서 諸大名이 豊臣政権에게 제충하는 起請文이 일정한 형식으로 통일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는 나아가서 近世 江戸 幕府의 起請文에도 영향을 주었고, 近世 起請文이 形骸化했다고 평가받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Language
Korean
URI
http://hdl.handle.net/10371/132061
Files in This Item:
Appears in Collections:
College of Humanities (인문대학)Asian History (동양사학과)Theses (Master's Degree_동양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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