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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전기 해상무역에서의 海防과 民生 -‘南洋禁航令’의 실시와 철폐-
清前期海上贸易的海防与民生 -“南洋禁航令”的实施与废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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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임정훈
Advisor
구범진
Major
인문대학 동양사학과
Issue Date
2017-02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海禁令南洋禁航令海洋政策出洋貿易規則出海條例八旗水師營海防民生
Description
학위논문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동양사학과, 2017. 2. 구범진.
Abstract
본고는 강희 56년(1717)부터 옹정 7년(1729)까지 시행된 ‘南洋禁航令’을 소재로 하여 청대 해양 정책에 海防과 民生이라는 두 요소가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분석한 글이다. ‘南洋禁航令’은 중국 商船이 南洋 특히 呂宋과 噶喇吧(오늘날의 루손과 자카르타)로 渡航하는 것을 금지한 명령이다. ‘南洋禁航令’은 청대 해양 정책의 일환으로 연구가 이루어졌다. 청대 해양 정책이 폐쇄성에서 유연성으로 재평가되고 있는 추세와 발맞추어 ‘南洋禁航令’ 역시 전면금지에서 부분금지로 해석이 바뀌고 있다.
‘南洋禁航令’은 강희 23년(1684) ‘海禁令’이 해제된 후 30여 년간 발전해 온 해외무역에 대한 反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극단적인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 ‘南洋禁航令’ 연구는 크게 시행 원인, 목적, 철폐 과정에 주목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기존 연구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 ‘南洋禁航令’을 유발한 문제점들이 禁令 철폐를 전후하여 어떻게 해결되었는지 구체적인 분석이 부족하다. 禁令이 철폐된 후 무역의 번영을 회복했다고 단순하게 서술하는 경향이 있다. 둘째, ‘南洋禁航令’이 民生에 끼친 영향이 강조되다 보니 海防까지 포괄한 연구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해외무역의 발전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해상 안전 확보 및 해상 분쟁에 대한 대비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럼에도 기존 연구는 民生과 무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海防에 대해서도 연구가 존재하지만 民生과 무역을 포괄하는 데에는 소홀하였다.
海防과 民生은 청대 해양 정책을 결정하고 시행하는 데에 중요한 요소였다. 옹정제는 강희제와 달리 沿海 지방관들과 海防과 民生에 대해 지속적으로 정보와 의견을 교환하였다. 그 결과 ‘南洋禁航令’이 폐지되고 海防과 民生을 포괄하는 해양 정책이 등장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본고에서는 옹정 연간의 해양 정책이 강희 연간에 비해 진보가 있었음을 밝히고자 하였다.
강희 23년(1684) 청은 대만의 정씨 세력에 대항하고자 30년간 시행했던 ‘海禁令’을 해제하였다. 이를 통해 沿海 주민들은 생업에 복귀하여 해외무역을 재개하였다. 청은 해외무역을 통해 沿海 民生의 회복과 국가 재정의 충당 및 軍餉의 마련을 기도하였다. 체계적으로 해외무역을 관리하고 세금을 거두기 위한 목적으로 海關이 沿海 四省에 각각 설치되었다.
海關 설치와 더불어 청은 일련의 해양 정책을 제정하였다. 그 골자는 민간 선박의 해양 출입, 화물의 出洋과 선박의 제조 절차 규정이었다. 청은 방범 차원에서 선박의 건조뿐 아니라 선박의 무게와 돛대, 船幅, 乘船 인원에 이르기까지 상세한 규정을 두었다. 비록 선박에 대한 제한은 많았으나 결과적으로 청과 일본, 南洋과의 교류가 활성화하였다.
그러나 1690년대-1700년대 초에 들어서 쌀의 해외 유출과 중국 선박의 해외 판매, 漢人의 해외 체류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강희제는 쌀이 해외에 유출되고 있기 때문에 沿海 지역의 쌀값이 오르고 있으며 중국에서 만들어진 선박 다수가 이익을 위해 해외에 팔려나간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와 더불어 알게 된 漢人의 해외 체류 문제는 해외의 반청 세력 형성 가능성에 대한 의구심과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漢人들이 상업을 목적으로 주로 체류하던 지역은 南洋의 呂宋과 噶喇吧였다. 이 두 지역은 유럽의 식민지로서 청은 이 지역들을 海賊의 소굴이라며 매우 불온한 곳으로 간주했다.
자원 유출 방지 및 海防에서의 필요가 民生 향상과 재정 충당보다 더 비중이 두어진 끝에 강희제는 55년(1716) 南洋 渡航 금지의 上諭를 내렸다. 이듬해 정식으로 ‘南洋禁航令’이 시작되었으며 아울러 구체적인 세부사항인 ‘出洋貿易規則’이 제정되었다.
‘出洋貿易規則’에 따르면 중국 商船은 南洋의 呂宋과 噶喇吧에 가서 무역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단 중국 商船이 東洋에 가서 무역하는 것과 외국 선박이 중국에 와서 무역하는 것은 허용되었다. 해외무역에 종사하는 선박에 대해서는 강희 23년(1684)과 마찬가지로 일정한 절차를 거쳐야 造船 및 출・입항이 허락되었다.
중국 쌀의 유출을 막기 위해서 청은 하루에 1인당 먹을 수 있는 식량의 양을 제한하여 다량의 쌀이 해적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단속하였다. 해적을 막기 위해 청은 水師를 활용하는 대신 商船이 자체적으로 무장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자체 무장의 실효성은 의심을 받았다. 나중에는 水師 戰船까지도 해적에게 패배하자 청은 결국 商船의 무기 휴대를 금지했다. 당시 청은 준가르와의 전면공세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해적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일 수 없었다. 다만 ‘南洋禁航令’을 통해 해적의 준동을 차단하는 데에 그쳤을 뿐이다.
배를 외국에 팔거나 배를 만들어서 준 중국인은 즉시 斬刑에 처하도록 하였다. 南洋으로 간 사람 및 체류하는 사람의 체류 사실에 대해 알면서도 함께 간 사람을 처벌함은 물론 체류 당사자는 南洋에서 돌려보내 즉시 斬刑에 처하게 하였다. 이토록 엄격한 규정이 시행되었으나 沿海 상인들은 澳門을 경유하여, 그리고 安南 무역을 이용해 南洋 무역을 지속하고 있었다.
하지만 澳門과 安南을 통한 南洋 무역에는 한계가 있었고 南洋에 渡航하는 중국 선박 수는 자연히 감소하였다. 이에 沿海 지방관들은 ‘南洋禁航令’이 沿海의 民生에 악영향을 끼쳤다면서 ‘南洋禁航令’의 철폐를 요청하였다. 그들은 ‘南洋禁航令’을 유발한 문제점들이 모두 착오의 산물이라며 ‘南洋禁航令’ 철폐만이 民生을 회복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지방관들의 의견을 수렴한 청 정부는 옹정 5년(1727)에서 옹정 7년(1729)까지 沿海 四省에서 ‘南洋禁航令’을 철폐하였다. 청은 米穀 유출 문제에 대해 불법 밀수는 여전히 금지한 반면 식량이 부족한 지역으로 쌀을 판매하는 것은 허락하였다. 또한 선박을 보다 치밀하게 관리하기 위해 바다에서 선박이 만나는 상황에 대처하는 규정을 만들었다. 그리고 중국인의 해외 장기 체류를 예방하고자 偸渡를 막는 것은 물론 선박의 출・입항 報告 시기를 정하되 해외에서 장사를 마치지 못했다면 귀국 時限을 연장해 주었다.
한편 민간 선박과 民人의 출・입국 관리와 더불어 海防이 강화될 필요가 제기되었다. 특히 해적에 대한 전투력을 제고하기 위해 八旗 水師가 설치되었다. 天津・江寧・乍浦・福州 등 沿海에 편성된 八旗 水師는 주로 八旗滿洲와 蒙古 등 非漢人 출신으로 구성되었다. 여기에 綠營水師 일부 관병이 편입되었고 이들은 八旗水師의 水戰 훈련을 담당하였다. 八旗水師의 창설을 통해 ‘南洋禁航令’ 철폐 후 청조가 海防에 더욱 주의를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南洋 渡航 금지를 겪은 후 청은 무역 허용과 금지 양측면의 입장을 모두 수용하여 한편으로는 商船의 해외 渡航을 허락하면서도 한편으로는 海防을 강화하는 정책을 내놓았다. 강희제는 해외무역의 발전으로 인해 발생한 상황(쌀과 선박 유출, 漢人의 해외 체류)들이 국가 재정과 海防에 악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南洋禁航令’을 발동하였다. 南洋에 대한 강희제의 위기감은 근거가 불확실하였다. 하지만 그 위기감은 천주교를 둘러싼 典禮 문제와 관련하여 서양과 빚은 갈등, 서양의 南洋 식민지에 밀집한 漢人들, 준가르와의 대치 상황 등을 통해 증폭되었다.
그렇다고 옹정 연간에 들어서 상황은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옹정제 역시 강희제와 마찬가지로 천주교를 금지하여 서양을 경계했고 南洋에는 서양 식민지가 온존하고 있었으며 준가르와의 대치 역시 지속되고 있었다. 준가르 및 서양과의 관계가 여전히 불안한 상황에서 ‘南洋禁航令’ 철폐가 가능했던 것은 옹정제의 사실 인식에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다. 강희제와 달리 옹정제는 沿海 출신 및 沿海의 長期勤續 관료들로부터 많은 해양 정보를 입수했고 이를 통해 禁令이 실효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에 지방관들로부터 민생과 국가 재정을 위해 철폐하자는 적극적인 변론이 나왔고 이를 옹정제가 수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南洋禁航令’ 철폐에는 ‘南洋禁航令’ 이전에 겪은 문제들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일종의 보완 조치가 마련되었는데 크게 民人과 선박 관리의 강화와 海防의 강화(八旗水師營 설치)를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八旗水師營 설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강희 연간부터 중국의 沿海에는 綠營 水師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南洋禁航令’ 철폐 이후 海防이 중시되는 상황에서 옹정제는 기존 綠營 水師를 강화하지 않고 八旗水師營을 설치하였다. 八旗 병정들은 기본적으로 弓馬騎射을 집중적으로 연마했기 때문에 항해나 水戰 수행과는 거리가 멀었다. 따라서 八旗 병정들을 水師로 轉用하려면 적지 않은 시간과 비용이 든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옹정제는 八旗 병정으로도 水師를 구성하는 데에 성공했다.
바다를 무대로 삼는 八旗水師營은 강희 말 旅順에 설치된 것이 시초였으나 山海關 以南의 沿海에는 옹정 초 天津에 설치된 것이 시초였다. 天津이 바다에 연해 있는 도시이자 京師로 들어가는 입구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옹정 초 海防이 수도권을 중심으로 이뤄지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청조의 수도이자 가장 많은 수의 旗人이 거주하고 있는 京師와 가장 가까운 바다를 綠營 水師가 아닌 八旗 水師에게 맡긴 것이다. 나아가서 옹정제는 수도권에 연해 있는 바다를 넘어서 東南 沿海 지방까지 八旗 水師를 확대하였다.
八旗의 해상 역량이 담보되지 않는 상황에서 옹정제가 東南 沿海에까지 八旗 水師를 둔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시기는 옹정 5년(1727)으로 ‘南洋禁航令’이 철폐되는 시기와 일치한다. 청조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는 해외에 漢人 수천 명이 체류하고 있다는 사실은 非漢人 통치자 입장에서는 부담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八旗水師營 설치는 기존 漢人 水師가 전담했던 海防을 八旗도 담당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해외무역에 종사하는 漢人에 대한 만주족의 직접 통제 및 漢人 水師에 대한 견제가 가능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옹정 5년(1727)은 八旗가 東南 沿海 海防의 주체 중 하나로 등장하기 시작한 상징적인 시기였다.
‘南洋禁航令’ 폐지 후 옹정제가 제시한 해양 정책은 청조가 民生과 海防 중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골고루 반영하려는 시도였다. 이러한 시도는 청조가 무역 발전을 통해 경제적인 이익을 얻었을 뿐 아니라 海防 역량도 함께 발전시키고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옹정 연간 海防을 담당할 주체로 八旗 水師가 등장한 것은 청조가 더 이상 水師를 綠營 중심의 漢人에게만 맡기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弓馬騎射를 중시하던 八旗滿洲가 沿海에서 항해 기술과 水戰을 익히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정치적으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는 옹정 연간 滿洲人과 漢人 간의 정치적 관계를 염두하고 연구가 이뤄져야 할 것이다.

주제어: 海禁令, 南洋禁航令, 海洋政策, 出洋貿易規則, 出海條例, 八旗水師營, 海防, 民生

학번: 2013-22773
Language
Korean
URI
http://hdl.handle.net/10371/132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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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ars in Collections:
College of Humanities (인문대학)Asian History (동양사학과)Theses (Master's Degree_동양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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