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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제의 어용(御容)화가 낭세녕: 예수회 궁정인의 좌절된 꿈 : Giuseppe Castiglione, the Qianlong Emperor's yurong Painter: Frustrated Dream of a Jesuit Court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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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조현경

Advisor
신준형
Major
인문대학 고고미술사학과
Issue Date
2015-02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낭세녕(郎世寧Giuseppe Castiglione1688-1766)건륭제(乾隆帝재위 1736-95)어용화가(御容畵家)예수회 궁정인(Jesuit courtier)중서절충화풍(中西折衷畵風)궁정화가(court painter)
Description
학위논문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고고미술사학과, 2015. 2. 신준형.
Abstract
예수회 소속의 이탈리아인 화가 쥬세페 카스틸리오네(Giuseppe Castiglione, 1688-1766)는 낭세녕(郎世寧)이라는 이름으로 청 궁정에서 궁정화가로 활약했다. 그는 유럽과 중국의 화풍을 혼합한 특유의 화풍으로 그려낸 동물화와 화조화로 유명하지만, 동시에 30여 년 동안 건륭제(乾隆帝, 재위 1736-95)의 초상을 전담했던 어용(御容)화가였다. 건륭제의 어용화가라는 이러한 역할은 낭세녕이 청 궁정에 오게 된 근본적인 목표인 중국 선교와 직결되었다. 그는 황제의 전속 초상화가가 되면서 황제와 가까워지고, 나아가 예수회의 중국 선교에 공헌할 수 있는 영향력을 지닌 궁정인(courtier)이 되고자 했다.
중국 문화를 깊이 이해하고 있던 명대 말기의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馬竇, 1552-1610)가 중국 선교의 초석을 닦은 이래로, 청대 초기에 여러 예수회원들이 자신의 전문성을 무기로 청 궁정에 진입할 수 있었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역법을 편찬하는 청의 천문 기관인 흠천감(欽天監)을 거점으로 활동했으나, 요한 아담 샬 폰 벨(Johann Adam Schall von Bell, 湯若望, 1591-1666)은 역법(曆法) 개정, 페르디난트 페르비스트(Ferdinand Verbiest, 南懮仁, 1623-88)는 무기 제작, 토마스 페레이라(Tomás Pereira, 徐日昇, 1645-1708)는 외교 활동 등 각기 다른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들의 노력은 1692년에 관용 칙령(Edict of Toleration)이 반포되는 결실로 이어졌다.
예수회 궁정인들의 노력은 청의 화원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들이 소개한 유럽의 과학 중 원근법이 황제의 관심을 끌면서 이에 능통한 서양인이 궁정화가로 초빙된 것이다. 콰드라투라(quadratura)의 전문가였던 조반니 게라르디니(Giovanni Gherardini, 1655-1723)는 1700년부터 청 궁정에서 중국인 화가들에게 유화를 가르치고, 원근법을 활용한 사실적인 초상화를 그리며 강희제(康熙帝, 재위 1661-1722)의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예수회원이 아니었던 그는 예수회의 엄격한 규율에 적응하지 못하고 약 5년 정도라는 짧은 기간 동안만 청 궁정에 머물렀다. 이에 예수회는 1707년에 입회한 밀라노 출신의 젊은 전문 화가 낭세녕을 게라르디니의 후임으로 내정했다.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낭세녕은 예수회 입회 전에 이미 전문 화가의 역량을 지녔고, 콰드라투라에도 능숙했기에 새로운 서양인 궁정화가로 적격이었다.
그러나 1715년에 낭세녕이 청 궁정에 도착해 직면한 환경은 이전과 달리 서양인 선교사에게 적대적이었다. 강희제의 무관심 속에서 그는 유화를 가르치고 법랑(琺瑯) 그림을 제작하는 한편 중국화를 배우는 데 힘쓰며 화원 내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했다. 1723년 옹정제(雍正帝, 재위 1723-35)가 즉위하면서 낭세녕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는 듯했으나, 낭세녕은 그 동안 발전시켜 온 특유의 사실적인 중서절충화풍(中西折衷畵風) 덕분에 조판처(造辦處) 공방을 이끄는 대표화가로 자리 잡는 데 성공했다.
1736년 건륭제가 새로운 황제로 등극하면서 낭세녕의 성공은 절정에 달했다. 황제가 되기 전에 이미 낭세녕의 가능성을 점검했던 건륭제는 그에게 자신의 초상을 그릴 독보적인 어용화가라는 중책을 맡겼다. 다양한 주제의 그림에서 건륭제의 초상은 언제나 낭세녕의 전담 영역이었고, 여러 화가의 합작 제작이었던 어용에서도 건륭제 인물 전체는 거의 낭세녕이 단독으로 그렸다. 건륭제가 낭세녕을 어용화가의 적임자로 지목했던 이유는 어느 누가 보더라도 그임을 알아볼 수 있는 사실적인 초상화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어용화가인 낭세녕에 대한 건륭제의 신뢰는 낭세녕이 황제에게 금지되었던 천주교 선교를 허용해줄 것을 개인적으로 탄원할 용기를 낼 정도로 분명해 보였다.
그럼에도 현실은 예수회와 낭세녕의 생각과는 달랐다. 1740년대 말에 일어난 일련의 선교사 처형 사건들은 건륭제가 예수회 궁정인들에게 지닌 태도를 여실히 드러냈다. 황제는 예수회 궁정인들의 호소를 외면하고 이전보다 그들과 노골적으로 거리를 두었다. 낭세녕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의 역할은 지난 십 년 간과 달리 황제의 얼굴만을 그리는 얼굴 화가('face' painter)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어용 제작에서 건륭제가 선호했던 조합은 강남 출신의 문인 화화인(文人 畵畵人)이었던 금정표(金廷標, 1757-67 활동)와 낭세녕의 합작으로, 사의(寫意)적인 금정표의 화풍이 우세한 가운데 낭세녕의 사실적인 얼굴 초상이 더해지는 식이었다. 사실 한족 문인의 정통파 취향을 지녔던 건륭제에게 낭세녕의 사실적인 화풍은 예술이 아니라 기술에 불과했다. 낭세녕은 심지어 이교(異敎)인 티베트 불교의 탱화 형식으로 그려진 건륭제의 문수보살(文殊菩薩) 초상에도 얼굴을 그려야 했을 만큼 무력한 신세였다. 그는 황제의 마음을 더는 돌릴 수 없음을 알면서도 1766년에 숨을 거두기 전까지 쉬지 않고 일해야만 했다.
이처럼 낭세녕이 궁정화가로서, 그리고 궁정인으로서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유럽에서 궁정화가이자 궁정인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았던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 1599-1660)와 비교해보면 명백해진다. 낭세녕은 벨라스케스가 활약했던 합스부르크(Habsburg) 왕가의 영토였던 밀라노에서 성장했다. 벨라스케스의 명성을 들으며 자란 낭세녕은 자연스럽게 벨라스케스처럼 성공하기를 꿈꾸었을 것이나, 유럽 궁정과 청 궁정이라는 환경의 차이로 인해 그와 같이 성공할 수 없었다. 우선 벨라스케스는 역사화가보다 낮은 평가를 받던 초상화가로 경력을 시작했으나, 두 분야 사이에 화풍의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모두에서 명실공히 최고의 궁정화가가 되었다. 반면 낭세녕은 중국 회화 내의 우월한 문인화와 열등한 세속화(vernacular painting)라는 이분법을 넘어설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세속화인 궁정회화 내에서도 필의(筆意)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최고로 인정받지 못했다. 게다가 두 화가는 공통적으로 군주의 얼굴을 전담하는 초상화가였지만 역할의 함의는 전혀 달랐다. 합스부르크 궁정에서 군주의 얼굴은 초상화에서 핵심적인 중요한 부분이었지만, 중국 초상화에서는 진정한 초상이 인물의 얼굴이 아니라 그 인물이 등장하는 세팅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건륭제의 얼굴 화가였던 낭세녕은 궁정 사진사(court photographer)에 불과해 화가로서 높은 평가를 받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벨라스케스는 외교적으로 중요한 행사인 왕가 간의 결혼식을 준비하고, 펠리페 4세(Felipe IV, 재위 1621-65)의 큐레이터로 활동하면서 궁정인으로 도약할 기회를 얻었다. 청 궁정의 화원 화가에게는 이와 같은 정치적 기능이 전혀 없었고, 문화적으로도 문인화가였던 건륭제가 그들보다 우위에 있었다. 낭세녕도 군주이자 문인화가였던 건륭제를 위해 봉사하는 화원화가 중 하나일 뿐이었고, 그가 황제에게 자신의 능력을 보이고 궁정인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는 애초에 주어지지 않았다.
청 궁정에서 고군분투했던 예수회 화가 낭세녕의 삶은 18세기 유럽의 예수회와 청 궁정 화원에 걸쳐 이루어졌던 역사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본 연구는 유럽과 중국이라는 서로 다른 두 세계에 동시에 소속되었던 그의 생애를 새로운 관점으로 서술하면서, 그가 건륭제의 어용화가가 되었던 배경과 활동의 정황, 나아가 그가 자신의 꿈을 이루는 데 실패했던 원인을 탐구하고자 했다.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3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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