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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맥닐 휘슬러의 <피콕 룸>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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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이채령

Advisor
김영나
Major
인문대학 고고미술사학과
Issue Date
2016-08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제임스 맥닐 휘슬러피콕 룸찰스 랭 프리어자포니즘프리어 갤러리
Description
학위논문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고고미술사학과, 2016. 8. 김영나.
Abstract
은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James Abbott McNeill Whistler, 1834-1903)의 작품 중 현전하는 유일한 실내 장식이자 회화와 도자, 가구, 장식 미술이 조화를 이룬 공간이다. 리버풀 출신 사업가 프레더릭 리처즈 레일랜드(Frederick Richards Leyland, 1832-1892)가 주문한 이 공간은 그의 런던 자택 프린스 게이트 49번지(49 Princes Gate)의 다이닝 룸(dining room)이었으며, 주문자가 수집한 도자기를 진열하기 위한 공간으로 기획되었다. 레일랜드 사후 은 미국인 컬렉터 찰스 랭 프리어(Charles Lang Freer, 1854-1919)가 사들였다. 미국으로 이전되기 전인 1904년, 은 오바흐 앤 컴퍼니 갤러리(Obach & Co. Galleries)에 임시로 전시되어 처음으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후 프리어는 을 미시건 주 디트로이트(Detroit, Michigan)에 위치한 자택으로 옮겨 직접 모은 유물들을 진열하였다. 1906년, 프리어가 자신의 컬렉션을 스미스소니언 협회(Smithsonian Institution)에 기증하면서 은 워싱턴 D. C.의 프리어 갤러리(Freer Gallery of Art)에 자리 잡게 되었고, 1923년에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은 휘슬러에 대한 기존 연구에서 비중 있게 다뤄지지 않았으나, 이 공간에 내재된 예술적 의미는 휘슬러라는 작가를 이해하는 단초가 될 수 있다. 이곳에서 자신의 작품뿐만 아니라 그 작품이 전시되는 환경까지 통제함으로써 종합예술을 구현하고자 했던 휘슬러의 이상이 구현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휘슬러는 을 건축적 공간이기 보다는 6면으로 이뤄진 캔버스처럼 인식하였다. 이 때문에 입체적 공간이며 장식 미술임에도 이 공간은 그의 회화 작품들과 연관성을 지녔으며, 당대 장식미술의 일반적 경향에 대립되었다.
나아가 은 19세기 중반 영국 사회의 예술적, 사회적 현상을 조망하는 하나의 창이라는 점에서 중요성을 지닌다. 휘슬러 개인의 양식이나 당대의 실내 장식 문화뿐만 아니라 자포니즘(Japonism), 도자기 수집 열기, 박물관의 성장, 전시 기법의 발전, 미학적 담론 등 다양한 사안이 과 연관된다. 아울러 휘슬러가 주문자인 레일랜드와 분쟁을 겪은 과정을 통하여 예술가 고유의 영역과 사회적 지위를 중시한 그의 사고가 구체적으로 드러날 수 있었다.
1860-70년대 영국에서는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화두가 젊은 예술가들 사이에서 공감을 얻었으며, 왕립미술원의 보수적인 화풍에 대한 반발이 만연하였다. 화가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Dante Gabriel Rossetti, 1828-1882), 시인 겸 미술 평론가 스윈번(Algernon Charles Swinburne. 1837-1909) 등 여러 예술가들은 국가 주도의 아카데미 교육과 전통적인 귀족 계층의 후원을 거부하고 주제와 양식, 기법 등 다양한 측면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추구하였다. 50년대 중후반 고티에와 보들레르의 글을 접하였던 휘슬러도 예술 자체를 위한 예술을 추구해야 한다는 사상을 이들과 공유하였다. 아울러 산업혁명이 낳은 기술 발전과 제도적 변화로 인한 문화의 대중화는 휘슬러를 비롯해 여러 화가가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였다. 빅토리아 시대의 특징인 중간계급의 부상 및 실내 장식의 유행 역시 이러한 변화와 연관되며, 중간계급 남성의 정체성과 가정 내 지위를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다이닝 룸에 동양의 도자기를 진열한 관행은 이 제작된 배경을 보여준다.
19세기 중반에는 예술가의 지위가 점차 높아졌고, 화가들은 그림을 판매한 수익으로 화려한 집을 짓고 실내를 장식하여 일반인들에게 공개하였다. 예술과 일상의 경계가 흐려진 예술의 가정화(domestication of art) 과정에서 이들의 집과 스튜디오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견본 전시장이 되었다. 휘슬러도 실내 장식 분야에서 명성을 얻고자 하였으며, 자택을 전시장처럼 개방해 누구나 드나들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휘슬러는 예술의 대중화에 반감을 지니고 있었고, 진정한 예술가들이 미술계를 독점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의 집은 아마추어들이 모방할 수 있는 사례를 제시하려는 공간이 아니라 오직 예술가만이 창조할 수 있는 실내 장식을 과시하기 위한 공간이었다.
휘슬러는 회화 작품을 제작할 때에도 화면 내에서의 조화뿐만 아니라 작품과 공간간의 조화도 중시하였으며, 이를 통해 공간과 장식에 대한 그의 생각을 파악할 수 있다. 1873년, 휘슬러는 윌리엄 알렉산더의 의뢰로 켄싱턴(Kensington)에 위치한 오브리 하우스(Aubrey House) 내부를 장식하였고, 드로잉 룸에 걸릴 초상화를 그렸다. 알렉산더의 딸 메리 알렉산더(Mary Alexander)를 모델로 완성한 초상화의 배경은 드로잉 룸의 벽과 동일하게 묘사되었으며, 이는 실제로 인물이 방에 존재하는 것처럼 환영을 불러일으키도록 의도된 것이었다. 이처럼 휘슬러는 그림이 인물과 배경을 비추는 거울처럼 기능하도록 함으로써 공간과 그림의 조화를 꾀하였다.
프린스 게이트 49번지의 다이닝 룸은 1876년 4월부터 약 1년에 걸쳐 개축되었고, 노리치 출신 디자이너 토머스 지킬(Thomas Jeckyll, 1827–1881)의 디자인을 토대로 켄싱턴 출신 건축가 조지프 윌리엄 더필드(Joseph William Duffield)가 공사를 맡았다. 지킬의 원래 계획은 노란 색 바탕에 다양한 색의 꽃무늬가 있는 벽지를 활용하고 호두색의 나무 선반과 나무 셔터를 배치해 공간에 밝은 색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네 벽을 둘러싼 나무 다도 판은 자코뱅 양식을 반영하였고, 격자 모양으로 공간을 분할함으로써 일본 실내 장식에서 벽판과 병풍을 활용해 공간을 기하학적으로 분할한 것을 연상시켰다.
본래 휘슬러가 레일랜드로부터 받은 주문은 현관 출입구에서 이어지는 홀의 계단을 장식하는 것이었고, 작업은 1876년 3월부터 시작하였다. 그러나 지킬이 다이닝 룸의 문과 창문의 색을 결정하는 문제를 두고 고민하면서 휘슬러도 다이닝 룸의 제작에 관여하게 되었다. 그는 본인의 작품 와 조화를 이루도록 방의 색조를 바꾸었으며, 공작새를 중심 도상으로 삼아 새로운 공간을 창출하고자 하였다. 공작새는 당시 영국에서 미학 운동의 상징적 도상이었으나, 휘슬러가 에서 묘사한 공작들은 이전까지 예술품에서 묘사된 공작들과 도상 면에서 달랐으므로 그의 고유한 창조물로 볼 수 있다. 특히 의 셔터와 천장에 묘사된 공작새나 공작새의 깃털 무늬는 평평하고 2차원적이어서 스텐실(stencil) 같은 효과를 자아낸다. 이 때문에 휘슬러가 일본 메이지 시대(明治時代, 1868-1912)의 종이 스텐실(型紙)에서 영감을 얻었으리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유럽의 도자기 방을 변형하고, 자포니즘 양식의 회화와 중국의 도자기를 병치한 것은 휘슬러의 의도가 역사적이고 문화적으로 적확한 스타일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심미적인 기능을 추구하는 것이었음을 드러낸다. 이 과정에서 휘슬러는 일반적인 장식미술가가 아닌 화가의 자세로 제작에 임하였다. 벽지나 카펫, 장식품을 제작하거나 공산품을 구매하여 장식한 것이 아니라 붓과 물감이라는 전통적 도구로 천장부터 벽, 셔터까지 직접 그림을 그린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이 공간에 화가로서의 자부심을 투영할 수 있었으며, 회화 작품과 마찬가지로 나비 모양의 모노그램을 그려 넣어 자신의 작품임을 분명히 하였다.
의 남쪽 벽에는 레일랜드가 휘슬러에게 의뢰한 가 걸릴 예정이었으나, 그림이 완성되기 전에 두 사람 사이에 비용과 예술적 견해차를 둘러싼 분쟁이 발생하였다. 이에 휘슬러는 남쪽 벽에 다툼 중인 두 마리 공작을 그려 넣었다. 이 벽화는 라는 제목과 도상 때문에 화가와 주문자 간 분쟁을 암시한 것으로 해석된다. 또한 1877년 2월 9일, 휘슬러는 언론에 을 공개하고 라는 홍보 책자를 제작하여 배포하였다. 본인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을 대중적 홍보에 활용하려 시도한 것이다. 이처럼 휘슬러는 주문자의 의도를 중시하기보다 자신의 예술적 기질을 발휘하는 것을 우선시하였으며, 제작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를 다시 영감의 원천으로 삼았다.
레일랜드가 사망한 후 외부로부터 단절된 채 해체될 위기에 놓였던 은 약 10년 후 독립적인 예술품으로서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찰스 랭 프리어가 을 구매한 후 이를 미국으로 이전하기 전, 중개를 맡은 오바흐 앤 컴퍼니 갤러리는 대중을 대상으로 전시를 열었다. 이 무렵 런던에서 을 둘러싼 반응은 예술품에 대한 영국 사회의 보편적인 관점을 시사한다. 비록 출신지는 미국이었으나 휘슬러는 1850년대 이후 영국에서 거주하고 활동하며 영국 미술계의 주요 인사가 되었고, 그의 작품도 영국 사회의 맥락 및 후원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되었다. 자국의 화가와 작품을 국가적 유산으로 간주하고 보호하려는 이러한 움직임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영국의 국민성에 대한 논의와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문화적 중상주의를 기반으로 은 영국의 문화적 자산으로 그 위상이 새롭게 정립되었으며, 독립적인 예술품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을 디트로이트의 자택으로 옮긴 후 프리어는 직접 수집한 세계 여러 나라의 도기(pottery)로 선반을 채웠다. 결과적으로 은 본래의 지리적, 역사적 맥락으로부터 유리된 각국의 유물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재탄생하였다. 이러한 병치는 프리어가 지녔던 보편성이라는 개념에 토대를 두었다. 프리어 갤러리에서 작품 고유 번호와 갤러리 번호를 모두 지닌 은 예술품인 동시에 전시 공간으로도 활용됨으로써 갤러리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본 논문은 제작되던 당시의 사회상을 복원하는 한편, 제작 당시의 시공간적 맥락으로부터 분리된 후의 과정을 조명함으로써 이를 종합적으로 이해하고자 하였다.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3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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