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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키엔홀츠의 <술집(The Beanery)> 다시 읽기: 1960년대 로스앤젤레스 미술계의 지역 정체성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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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서정은

Advisor
김영나
Major
인문대학 고고미술사학과
Issue Date
2016-08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에드워드 키엔홀츠술집(The Beanery)로스앤젤레스의 미술타블로정크 미술로스앤젤레스 룩
Description
학위논문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고고미술사학과 미술사전공, 2016. 8. 김영나.
Abstract
미국의 미술가 에드워드 키엔홀츠(Edward Kienholz)는 1950년대 일상에서 사용되다가 버려진 물건들을 조합하여 특정한 장면을 묘사하는 아상블라주(Assemblage) 작품을 제작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한 작가였다. 키엔홀츠는 1952년부터 1973년까지 캘리포니아 남부의 로스앤젤레스를 거점으로 활동하였으며, 특히 그는 1960년대 초부터 실제와 유사한 규모의 아상블라주 작품을 제작하며 이를 타블로(tableau)로 지칭하였다. 1950년대 로스앤젤레스는 도시가 지리적으로 확장되면서 하나의 공간적인 중심이 존재하지 못했으며, 로스앤젤레스의 미술 역시 특별히 두드러지는 미술 운동이나 구심점이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이에 키엔홀츠는 갤러리를 설립하여 지역 미술가들이 작품을 전시하고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을 조직하였다.
본고는 1950년대 중반부터 로스앤젤레스에 미술계를 조직하고자 하였던 키엔홀츠의 시도가 1965년작 에 물리적으로 구체화되었으며, 이 작품이 도시에 대한 키엔홀츠의 감각과 로스앤젤레스 미술가로서의 정체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주장하려 한다. 이를 위해 이 제작되고 전시된 1960년대 중반 로스앤젤레스라는 도시와 갤러리, 미술관이라는 역학 관계 내에서 작품을 새롭게 바라보고, 키엔홀츠를 동시대 지역 미술가들과 문제의식을 공유하였던 지역 정체성을 지닌 미술가로서 재조명하고자 한다.
키엔홀츠가 미술가로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던 시기에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미술을 주도하고 있었던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 회화를 넘어서려는 새로운 움직임이 태동하였다. 로버트 라우셴버그(Robert Rauschenberg) 등 뉴욕의 미술가들은 기존의 이미지와 일상의 물건들을 캔버스로 도입하여 추상표현주의 회화에서 논의되던 회화의 순수성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였다. 키엔홀츠를 비롯하여 미국 서부 지역 미술가들도 일상에서 발견한 물건들, 특히 낡고 버려진 물건들을 조합한 아상블라주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1950년대 중반까지만 하여도 서부 미술의 중심지는 캘리포니아 예술학교(California School of Fine Arts, CSFA)를 중심으로 한 캘리포니아 북부의 샌프란시스코였다. 반면 당시 로스앤젤레스의 경우 샌프란시스코와 달리 젊은 미술가들이 작품을 선보이며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키엔홀츠는 1957년 페러스 갤러리(Ferus Gallery)를 설립하여 신진 미술가들에게 전시 공간을 제공하였다. 페러스 갤러리가 위치한 라 시에네가 대로는 로스앤젤레스에서 가장 많은 갤러리들이 밀집하였던 지역으로 성장하였으며, 키엔홀츠의 페러스 갤러리를 기점으로 지역 미술가, 컬렉터, 관람객들이 교류하며 로스앤젤레스에도 미술계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뒤이어 『아트포럼(Artforum)』지는 196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사무실을 옮기고 서부 지역 미술가들을 홍보하는데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지역 정부와 대규모 자본을 소유한 도시의 주요 인사들 역시 미술계의 활발한 움직임을 감지하고 변화를 꾀하기 시작하였다.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정부는 1965년 4월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 LACMA)을 개관하였다. 카운티 미술관이 개관한지 약 1년 뒤인 1966년에 키엔홀츠는 이 곳에서 개인전을 가지게 되었다.
이 전시는 을 비롯하여 총 46점의 작품들이 총망라된 큰 규모로 기획되었다. 그러나 전시 개막을 약 일주일 앞둔 시기에 일부 작품의 선정성을 이유로 전시를 폐쇄해야 한다는 논란이 대두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시는 예정대로 개최될 수 있었으며, 전시를 둘러싼 논란은 언론에 크게 보도되며 오히려 관람객들이 몰려드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키엔홀츠의 개인전은 검열의 대상이 되었음에도 미술관이라는 제도화된 공간에 성공적으로 전시될 수 있었다.
카운티 미술관에서의 개인전에 전시되었던 은 키엔홀츠와 동료 미술가들이 아지트처럼 매일같이 모여들었던 바니의 술집을 재현하고 있다. 바니의 술집은 단순한 술집 이상의 의미를 지닌 공간이었으며 로스앤젤레스 미술계의 축소판과도 같았다. 키엔홀츠의 타블로 안에 자리한 열일곱 명의 석고 인물상들 역시 키엔홀츠의 지인과 동료 미술가들, 미술관 관계자, 그리고 술집의 주인인 바니 등을 실제 모델로 하여 제작되었다. 은 키엔홀츠가 작품을 제작할 당시, 즉 동시대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자신의 유년기와 겹치는 과거의 시간을 다룬 이전의 타블로와 구분된다. 작품의 시간뿐만 아니라 공간적인 측면에서도 은 이전 타블로 작업들과 차별점을 보인다. 마치 연극 무대처럼 정면성이 강조된 비슷한 시기의 타블로와 달리, 은 천장이 달려있어 외부와 차단된 독립적인 공간으로 제작되었으며 관람자가 작품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키엔홀츠는 관람자가 직접 문을 여닫거나 작품을 만지는 등 물리적인 접촉을 허용할 정도로 작품에 대한 관람자의 개입을 원하였다. 촉각이라는 감각뿐만 아니라 은 실제 바니의 술집에서 녹음한 대화 소리, 음악 소리, 냄새 등 다양한 감각을 사용하여 관람자가 마치 1960년대 중반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듯한 느낌을 주며 몰입도를 높인다.
은 1965년 10월 바니의 술집 주차장에서 처음 전시된 이후 뉴욕 드완 갤러리(Dwan Gallery)에서 전시되었다. 그러나 뉴욕의 평론가들은 을 뉴욕의 팝 아트 미술가들의 작품에 비해 뒤쳐진 아류로 평가하였다. 키엔홀츠 역시 뉴욕의 평단과 미술계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뉴욕의 미술가들에 비해 자신이 진지하게 평가 받지 못하였던 것에 일종의 반감을 가졌다. 이에 대응하여 키엔홀츠는 지적인 뉴욕 미술가들의 이미지와 반대되는 지점에서 스스로를 위치시켰다. 그는 자신을 미술에 무지한, 미술계에 관심이 없는 비미술가로 공공연히 소개하였으며 지적이거나 고뇌에 빠진 미술가가 아닌 마치 일꾼처럼 손으로 직접 새로운 대상들을 창조해 내는 인물로 설정하였다.
마찬가지로 키엔홀츠의 은 추상표현주의 미술가들이 모여 담화를 나누던 뉴욕의 술집 시더 태번(Cedar Tavern)에 대응하는 상반된 성격을 지닌다. 팝송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속 인물들은 테이블에 엎드려 잠을 청하거나, 이성의 관심을 끌려고 노력할 뿐 이들 사이에 진지한 대화는 오고 가지 않는 듯 보인다. 1960년대에 활동을 시작한 로스앤젤레스의 젊은 미술가들 역시 키엔홀츠와 마찬가지로 뉴욕의 미술가들과 구별되는 자신들만의 이미지가 필요하다는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다. 전시 홍보를 위한 사진이나 포스터에서 이들은 유흥을 즐기는 자유분방한 태도를 취하며 지적인 인물로 표현되던 동시대 뉴욕 미술가들의 이미지와는 완전히 상반된 성격을 지닌다.
이처럼 키엔홀츠는 1960년대 중반 등장한 지역 미술가들과 문제 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위 로스앤젤레스 룩(L.A. Look)으로 불리는 동시대 미술가들과 구분되어 설명되어왔다. 산업용 재료를 매체로 매끄러운 표면 효과를 추구하였던 이들의 작품과 거리에서 모은 낡고 버려진 물건들을 조합한 키엔홀츠의 정크 미술(Junk Art)은 매우 상반된 것처럼 여겨졌다. 로스앤젤레스 룩 작가들이 서부 지역 비평가들의 지원에 힘입어 로스앤젤레스를 대표할 새로운 미술 그룹으로 각광받는 동안 키엔홀츠는 시대에 뒤쳐진 미술가로 여겨졌다. 1973년 키엔홀츠는 로스앤젤레스를 떠나 독일로 이주하며 그의 사회비판적인 작품에 보다 호의적이었던 유럽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그러나 키엔홀츠와 1960년대 로스앤젤레스 룩 미술가들의 작품은 로스앤젤레스에서 특징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매체를 사용하여 도시에 대한 미술가의 감각을 표현하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로스앤젤레스 룩 미술가들이 사용하였던 산업용 재료들은 당시 크게 성장해나가던 로스앤젤레스의 방위산업과 항공우주산업의 산물이었다. 키엔홀츠 역시 도시와 그것이 생산하는 물질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작품의 매체로 사용하였다. 단지 키엔홀츠는 로스앤젤레스를 갓 생산된듯한 물질로 대표되는 곳이 아닌 매일 어마어마한 양의 쓰레기가 발생하는 도시로 인식하였으며 이를 자신이 로스앤젤레스에서 작업하였던 이유이자 로스앤젤레스의 본질이라 생각하였다.
본고는 에드워드 키엔홀츠의 을 작품이 제작될 당시인 1960년대 중반 로스앤젤레스 미술계의 역학 관계 내에서 살펴봄으로써, 그를 당대 미술의 흐름과는 동떨어진 미술가가 아닌 지역 정체성을 지닌 화가로서 재조명하고자 하였다. 이를 통해 기존에 아상블라주 미술에서 팝 아트로 이행하는 과도기 상에 위치한 미술가, 혹은 작품을 통해 사회 문제에 대해 도덕적인 비판을 서슴지 않는 미술가로서 이해되었던 키엔홀츠를 당대의 지역 미술가들이 맞이해야 하였던 문제들과 더욱 밀접한 관련을 지닌 미술가로 재위치시킬 수 있을 것이다.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3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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