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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兆 筆 東福寺 <五百羅漢圖> 연구 : A Study of Kichizan Minchos 500 Arhat Paintings in Tofuku-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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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권남규

Advisor
장진성
Major
인문대학 고고미술사학과
Issue Date
2017-02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오백나한도(五百羅漢圖)키치잔 민쵸(吉山明兆1352-1432)토 후쿠지(東福寺)다이토쿠지(大德寺)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
Description
학위논문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고고미술사학과, 2017. 2. 장진성.
Abstract
본고는 1386년 쿄토(京都) 토후쿠지(東福寺)의 화승(畵僧) 키치잔 민쵸(吉山明兆, 1352-1432)가 제작한 (이하 토후쿠지본)의 중국 나한도 도상에 대한 수용 양상과 제작 배경을 분석하려 한다. 토후쿠지본은 1178-88년 남송대 화가 주계상(周季常, ?-?)·임정규(林庭珪, ?-?)가 제작한 (이하 다이토쿠지(大德寺)본) 100폭을 모사하여 50폭으로 제작하였다. 토후쿠지본은 현전하는 작례(作例)가 드문 일본 오백나한도 가운데 최고(最古)의 작품이다.
기존 연구자들의 토후쿠지본에 대한 서술은 무로마치(室町)시대(1336–1573) 중국화의 수용의 한 일례로서 언급하거나 원본인 다이토쿠지본과의 도상적 유사성을 고찰하는 수준에 그쳤다. 본고는 이에 다이토쿠지본 도상의 전래 과정과 토후쿠지본이 원본의 화폭을 재구성하는 과정을 분석하여 중국 오백나한도 도상이 일본에서 어떻게 수용되었는지를 살펴보는데 초점을 두었다. 아울러 본고는 토후쿠지본이 제작된 시기인 14세기 토후쿠지의 상황을 조명하여 이 작품이 제작된 동기에 대해 제시해보고자 하였다.
토후쿠지본의 원본인 다이토쿠지본은 문헌사료와 현전 나한도들의 분석을 통해 14세기 중반 이후 카마쿠라(鎌倉) 지역에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카마쿠라 지역은 13세기 중반 이후 켄쵸지(建長寺)와 엔가쿠지(圓覺寺) 등 막부(幕府)의 후원을 받은 선종 사찰들이 다수 들어선 곳이었다. 이 사원들이 종교적 의례를 위해 중국 불화가 필요하였으므로 카마쿠라 지역에서는 중일 해상 무역이 활발히 이뤄졌다. 다이토쿠지본 역시 당시 카마쿠라에서 행해진 교역을 통해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1380년대 쿄토에서 활동하던 민쵸는 카마쿠라 지역에 있던 다이토쿠지본을 접하게 되었다. 민쵸가 다이토쿠지본을 보고 토후쿠지본을 제작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는 우선 백의관음도(白衣觀音圖) 등 일본에 소재한 송원대 도석화(道釋畵)를 널리 학습하고 모사하던 민쵸의 화업(畵業) 경향을 들 수 있다. 또한 전문적인 화승 집단으로 이뤄진 토후쿠지의 공방(工房)은 다폭(多幅)으로 구성된 대작인 토후쿠지본을 제작할 수 있었던 바탕이 되었다.
다이토쿠지본은 나한의 명상과 공양, 동물의 조복 등 과거부터 그려진 나한도의 도상들과 제작지인 영파(寧波)의 신앙을 반영한 새로운 장면들을 100폭 안에 풍부하게 담고 있다. 반면 토후쿠지본은 화폭의 수를 다이토쿠지본의 절반인 50폭으로 제작되었다. 이렇게 토후쿠지본에서 변화된 구성으로 인해 작가에게는 도면에 묘사할 원본의 도상을 선택해야 할 과제가 생기게 되었다. 그 결과, 토후쿠지본에서 취사된 도상들에는 몇몇 경향성을 확인할 수 있다. 토후쿠지본은 우선 다이토쿠지본의 제작을 후원한 남송(南宋)대 승려와 재가(在家) 신도의 초상적인 이미지들을 생략하여 정형화된 나한의 인물상에 집중하고 있다. 또한 토후쿠지본은 원본의 도상 가운데 동물의 조복(調伏)과 공양과 같은 나한의 알레고리(allegory)적인 이미지들을 다른 도상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다수 화폭에 가져왔다. 이 장면들은 카마쿠라시대(1185-1333)부터 일본에 유입된 중국·일본 십육나한도의 화폭과 공통된 내용을 담고 있는 것들이다. 반면 다른 계통의 도상인 승려의 일상 생활 장면은 동물의 공양과 같은 극적인 이미지들과 달리 적극적으로 모사되지 않았다.
다이토쿠지본의 도상 가운데 주로 나한의 신이(神異) 부분을 선택하여 그려진 토후쿠지본의 경향은 일본 선종 승려들의 인식 속에서도 엿보인다. 14-15세기 일본 선종 승려들의 문집은 주로 나한의 행하는 초자연적인 능력에 주목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이토쿠지본의 여러 도상들 가운데 토후쿠지의 선승들이 인식한 나한을 가장 잘 시각화하여 드러내는 것은 신통력을 구사하는 나한의 모습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일본 내에서 승려 등 불화의 수요자 측이 익숙한 이미지 위주로 송원 불화의 도상을 수용했던 양상은 남송 열반도(涅槃圖)의 모사 사례에서도 확인된다. 이 점은 토후쿠지본이 단순히 중국 회화를 수용한 것이 아니라 일본 선종계의 신앙과 나한에 대한 인식에 따라 중국 회화의 도상을 선택적으로 수용·재조합한 결과물임을 보여준다.
14세기 토후쿠지에서 오백나한도가 제작된 사실은 당시 일본에서 행해진 나한과 관련된 의례와 토후쿠지의 재정적 상황에 비춰볼 때 그 이례성이 드러난다. 나한에게 공양을 올리는 불교 의례인 나한공(羅漢供)은 중세 일본의 선종 사찰에서 주로 십육나한을 위해 공적인 정기 의식으로 행해졌다. 현전하는 카마쿠라시대 이후 일본 나한공 의례문의 내용과 오백나한도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십육나한도의 작례는 일본에서 오백나한을 위한 의례가 흔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토후쿠지는 당시 일본 선종 사찰에서 행해진 나한공의 경향과 반대로 오백나한도를 사용하고 있다. 이 점은 토후쿠지가 더 극적이고 거대한 화면의 불화를 통해 나한공 의례의 규모를 더 크게 확장하였음을 시사해 준다.
나한공의 확대와 토후쿠지본의 제작은 당시 토후쿠지가 처한 재정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진행되었다. 14세기 초반 토후쿠지는 3차례의 화재를 겪은 뒤 100여 년에 걸쳐 거금을 들여 사원 전각과 대불(大佛) 등을 재건하고 있었다. 당시의 재정적인 부담 속에서도 토후쿠지는 추가적으로 민쵸에게 토후쿠지본 등의 대형 불화를 주문하였다. 당시 토후쿠지가 이와 같은 불사를 진행한 것은 무로마치시대 일본의 관사(官寺) 제도인 오산제도(五山制度) 안에서 사찰의 위상이 약화되는 상황에 대한 대응으로 추정된다. 토후쿠지본은 오산 안에서 제일가는 규모에 걸맞은 대형 불화이자 동시에 토후쿠지를 오백나한이 상주하는 성지인 천태산(天台山)과 유비(類比)시키는 매개체였다. 토후쿠지 출신의 승려 쇼카이 레이켄(性海靈見, 1315-1396)이 토후쿠지본에 붙인 제발의 내용 역시 민쵸의 작업 당시에 일어난 상서(祥瑞)와 민쵸의 특기할 만할 행적들을 기술하고 있다. 이처럼 토후쿠지본의 규모와 도상, 제작 당시에 일어난 상서의 기록들은 관람자 측의 수용에 있어서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그것은 무로마치시대 이후 사람들의 관심을 토후쿠지, 그리고 민쵸에게 집중시키는 효과이다.
본고는 무로마치시대 토후쿠지가 오백나한도 도상을 수용한 상황을 구체적으로 조명하였다. 그 결과 본고는 무로마치 시대 선종 사원의 나한에 대한 인식을 배경으로 중국회화를 선택적으로 수용한 결과물임을 확인하였다. 또한 토후쿠지본의 제작에 관하여 사찰의 위신을 제고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은 제시하였다. 결론적으로 본고는 토후쿠지본의 선별적 도상 수용과 그 활용을 살펴본 것에서 그 의의를 찾고자 한다.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3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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