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의 파편화를 통한 인식의 재고에 관한 연구

Abstract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눈앞에 있는 것이든, 마음속에 떠오른 심상이든, 대상을 정하고 파악하여 그것을 화면에 구체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에게는 그림을 그리는 데 있어 가장 기본적인 행위인 대상을 선택하고 파악하는 것이 언제나 힘들게 다가왔다. 따라서 나의 작업은 대상 인식의 어려움과 한계를 인정하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목표를 가진다. 대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의 가능성을 찾아보기 위해, 나는 본다는 것이 무엇이며, 우리의 지각과정이 어떠한 구조를 통해 작동하고 있는지와 같은 가장 원론적인 질문으로 돌아가 보았다. 눈앞의 대상을 인식하는 지각과정 중에는 어떤 것을 본다는 감각 경험이 이루어지는 지각 단계와, 그것을 자신이 가진 기억과 지식을 토대로 언어적으로 판단하는 재인 단계가 함께 일어난다. 그중, 우리는 재인 단계에 의심 없이 의존하기 쉽고, 따라서 자신이 보고 있는 대상을 습관적이고 관성적으로 판단하며 맹신하기 쉽다. 나는 그림으로 이러한 판단이 일어나는 재인 단계에 혼선을 일으킴으로써 지각과정에 틈을 만들고자 한다. 나는 어떤 것을 자동기계적으로 재인하는 지각과정에 틈을 내기 위한 방편으로, 작업 과정에서 화면을 구기고 그 위에 이미지를 그린 후, 다시 화면을 펼쳐 그 이미지를 파편화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파편화의 방법은 이미지를 낯설게 만들기 위한 방법이자,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 어려움을 드러내기 위한 방법으로 시도하였으나, 점진적으로 작업의 소재에 따른 파편화의 역할을 고민하면서 이를 발전시켜 나아갔다. 따라서 나의 작업들은 방법상의 공통점을 가지지만, 소재와 파편화의 의도에 따라 작품들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 지어볼 수 있다. 첫째, 나의 시야에 보이는 인물이나 풍경의 형상을 그리고 반복적으로 파편화하는 작업을 통해 대상을 단편적인 시각과 단선적인 판단으로 인식하기 쉬움을 드러내는 시도이다. 이는 대상 인식의 어려움을 드러내기 위한 문제제기이자, 대상을 다각도로 바라보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낸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단편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 대상에 대하여 어째서 대상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는가?라는 질문을 반복하는 것에서 한 발 나아가, 오히려 언어적으로 약속된 의미를 가진 대상을 즐겁게 흔들어보며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어보려는 시도로 진행한 일련의 기호작업들이다. 일상에서 고정된 의미를 가진 대상들 중, 각각의 상징을 가진 시각 기호는 특정한 색상과 특정한 형태를 가진 시각적 대상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나는 이러한 특징을 가진 상징 기호를 그리기 과정에서 파편화하여, 일상 기호의 맥락이자 그림의 맥락으로 작품을 이중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제작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의 재인 과정을 재고해보도록 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한편, 상징 기호는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기도 하지만, 그 안에 도형, 바탕색, 숫자, 글자 혹은 하위 개념의 상징 기호를 포함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이러한 상징 기호의 특징에 주목하여, 기호의 일부분을 파편화하는 것으로 상징 기호에 포함된 문자언어를 언어유희적으로 활용한 작업 또한 진행하였다. 문자언어를 부분적으로 파편화시키거나 문자언어를 제외한 바탕을 파편화시키는 것을 통해, 나는 기호의 의미를 재설정하고 재의미화해보고자 하였다. 이렇듯 대상을 재인하는 과정에서의 오류를 만들고 강조하기 위하여, 나는 화면을 접은 후 그림을 그리는 제작방식에 따라 생긴 구겨진 흔적을 부각시킨다. 이는 구겨진 흔적을 화면에 남겨, 화면에 그려진 이미지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고 그림이라는 대상을 재인하는 것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낯설게 만들기 위함이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구김을 더욱 강조하여 제시함으로써, 나의 작업을 소재가 되는 기호가 일상에서 다루어지는 방식과 연결 지어 해석해 볼 수 있도록 유도한다. 또한, 나의 작업은 화면을 구겨 기호를 반복적으로 해체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일상에서 기호는 반복되어 제시되기에 그 의미가 우리의 기억 속에서 강조되지만, 나는 이를 전복시켜 반복을 통해 의미를 무화시키고자 한다. 나는 화면 안에서 기호를 거듭 파편화하거나 기호를 파편화한 작품들을 동시에 제시하여 의미를 생소하게 만들고, 그것을 시각적 요소로 볼 수 있도록 유도한다. 그리고 의도에 따라, 일상에서 발견한 특정한 시각 기호를 기록하듯 반복적으로 파편화하여 관객의 해석을 유도할 수 있도록 재의미화 하였다. 나의 작업은, 대상을 마주할 때 인식에 한계를 느끼지만 이를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그 한계를 수용해 나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어떤 대상이나 상황을 인식하는 것에 의심이 들고 한계가 느껴진다면, 그것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포용하고 의문을 던지며 재구성하려는 시도를 통해 보다 의식적인 사유가 가능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일상의 대상을 볼 때 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지각과정에 틈을 만들어, 인식을 환기해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의도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