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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正祖)의 용주사(龍珠寺) 창건과 불교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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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고은정
Advisor
이주형
Major
인문대학 고고미술사학과
Issue Date
2018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정조(正祖)용주사(龍珠寺)<목조삼세불좌상(木造三世佛坐像)><감로도(甘露圖)><삼장보살도(三藏菩薩圖)>용주사 대웅보전 벽화불교미술궁중회화왕실 불교미술
Description
학위논문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인문대학 고고미술사학과, 2018. 2. 이주형.
Abstract
용주사(龍珠寺)는 조선 제22대 왕 정조(正祖, 1752-1800, 재위 1776-1800)가 1789년에 현륭원(顯隆園)을 조성하도록 하면서 이듬해에 그 능을 호위하는 왕실의 원당(願堂)이자 제향을 올리는 재궁(齋宮)으로 창건되었다. 현륭원은 정조의 생부인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1762)의 묘소로 본래 양주 배봉산(拜峯山)에 있었으나 정조가 수원으로 천봉하도록 하였다. 정조는 용주사에 대해 ‘현륭원을 호위하기 때문이니 그 체통을 높였다’고 할 만큼 용주사를 중시하였다. 용주사는 정조의 정통(正統)과 직결된 사찰로서 국왕과 조정의 관심을 받으며 당시 가장 사격이 높은 사찰로 부상하였다.
1790년에 새로 건립된 용주사 불전 내부에는 장엄에 소요되는 다수의 미술이 일괄적으로 제작되었다. 이 중 현재에도 실물을 볼 수 있는 예로는 대웅보전(大雄寶殿)에 안치된 <목조삼세불좌상(木造三世佛坐像)>(이하 <삼세불상>)과 대웅보전 영단에 봉안된 <감로도(甘露圖)>와 <삼장보살도(三藏菩薩圖)>, 그리고 대웅보전 내부 벽화 및 별지화 등이 남아 있다. 지금까지 용주사 불교 미술 연구에서는 김홍도(金弘道, 1745-?)가 그렸다고 알려졌으나 제작 연대에 논란이 있는 <삼세불회도(三世佛會圖)>가 논의의 중심이 되었다. 이외에 다른 작품들은 1790년에 조성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어 정조대(正祖代) 불교 미술로서 논의할 가치가 충분하지만 그 미술사적 의의에 대한 관심은 미진했다. 그러나 용주사의 창건 주체인 정조는 재위 중 불교를 정치적으로 활용했고 시각 미술을 제작할 때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용주사 창건 시 작품들은 국왕과 관계된 시각 미술이라는 관점으로 해석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정조가 불교를 정치적으로 포용하였던 정황은 그가 남긴 몇 가지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정조는 『범우고(梵宇攷)』(1799)의 서문에서 유교사회와 조정에서는 행하기 어려운 불교만의 백성 교화 기능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고 승려의 필요성을 인정하였다. 「어제화산용주사봉불기복게(御製花山龍珠寺奉佛祈福偈)」(1795)를 통해서는 불교의 이상적인 국왕인 전륜성왕(轉輪聖王)과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에 자신을 비유하였다. 아울러 「어제대보부모은중경게어(御製大報父母恩重經偈語)」(1796)를 125장 반포하여 불교적 맥락을 통해 자신의 효심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용주사의 창건은 불교를 가장 파급력 있게 활용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용주사를 통해 불교적인 영험을 기대할 수 있었고 꾸준한 제향으로 사도세자를 추모하여 정통성을 강화할 수 있었다. 승군들을 정조의 친위부대인 장용영(壯勇營)으로 편입시켜 군사권을 키우기도 하였다.
한편 정조는 국왕으로서 시각 미술의 제작을 주관하고자 하였다. 1783년에 규장각 내 차비대령화원(差備待令畫員) 제도를 실시하여 국왕의 사업과 관련된 화사를 직접 주도하였다. 또한 어진(御眞)과 신하 초상(肖像)을 봉안하고 열람하는 과정을 정치의 한 과정으로 포함시켰다. 정조대에 왕실 사업으로 인해 간행된 각종 의궤들은 그 수준이 전대에 비해 상승된 면모가 두드러진다. 이러한 성향을 가진 정조에게 불교 미술 또한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불교 미술은 불전을 드나드는 대중들에게 지속적으로 노출된다는 점에서 정치적 소산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매우 유용한 매체였다. 용주사 창건 시 작품들은 정조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현륭원 원찰의 미술이었으므로 국왕의 입장에서는 단순히 불전 내부를 장엄하고 예배 대상이 되는 시각 이미지 이상의 의미로 여겨졌을 것이다.
용주사 창건 시에는 미술 작품을 만들어내는 환경부터 정조의 영향력이 발휘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었다. 창건 공역과 그 미술 제작을 감독한 인물 대부분은 정조와 밀접한 인물들로 구성되었다. 우선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은 정조의 신임을 받은 대표적인 신하 중 한 명으로 당시 좌의정(左議政)이었다. 용주사 공역 기간 중에 채제공은 실무관들을 대신하여 국왕의 허락이 필요한 사항을 정조에게 아뢰었다.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정조에게 발탁된 규장각(奎章閣)의 초대 검서관(檢書官)으로서 정조의 측근에서 각종 실무를 진행하던 관리였다. 정조의 명으로 용주사에 파견되었던 이덕무는 무차회(無遮會) 개최 등의 업무를 수행하였다. 불교 미술 제작의 총체적인 감동은 정조의 명을 받아 중앙 관리인 황덕순(黃德淳, 18-19세기)과 윤흥신(尹興莘, 18-19세기), 오흥윤(吳興尹, 18-19세기)이 맡았다. 황덕순은 대전(大殿) 액정서(掖庭署) 소속으로 왕명을 전달하였다. 윤흥신은 정조의 친모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 1735-1815)의 궁방(宮房)인 용동궁(龍洞宮) 소속이었다. 오흥윤은 황덕순과 함께 용주사 미술 제작 시 계하도감(啓下都監)이었는데 이는 국왕의 재가(裁可)를 받는 일을 일컫는다. 불화 제작에는 궁중 화원들이 감동을 맡았으며 김홍도(金弘道, 1745-?), 김득신(金得臣, 1754-1822), 이명기(李命基, 18-19세기)로 구성되었다. 김홍도는 정조대에 이루어졌던 화사(畵事) 전반에서 직임하였고 김득신은 정조의 초대 차비대령화원이었다. 이들은 정조가 주로 화사를 맡길 만큼 신임을 받았던 인물들로 정조가 의도한 사항을 시각화하는 작업에 비교적 자주 동원되었다.
용주사 불화 및 불상 제작의 실무에는 당시 명성이 높았던 화승들이 각지에서 동원되었다. 그 45인 중 일부는 정조대 국가 공역에도 참가하였는데 『영우원묘소도감의궤(永祐園墓所都監儀軌)』(1789) 등에 화사로 이름이 남아 있다. 이처럼 용주사 창건에는 정조대 국가사업에 동원되었던 이들과 정조의 측근 인사라 할 수 있는 인물들이 다수 관여하여 그 미술 또한 국왕 친화적인 환경에서 제작될 수 있었다. 이러한 체제가 구축됨으로 인해 용주사 미술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정조의 의도를 하달하기 수월했을 것이며 그 미술과 정조 사이에는 특별한 유대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결과적으로 불상을 활용한 방식이나 불화에 표현된 도상에서 시각적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용주사는 1790년 10월 1일에 <삼세불상>의 점안식(點眼式)을 거행하며 공역이 완료되었다. <삼세불상>은 조선 후기에 유행했던 삼세불 구성인 석가(釋迦), 아미타(阿彌陀), 약사(藥師)로 조성되었다. 이 상의 봉안에 대해서는 이덕무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서 ‘명을 받들어 금불 점안일에 무차회를 열고 상량문(上樑文)을 읽었다’라고 하여 정조의 명령으로 무차회가 설행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무차회는 수륙회(水陸會)와 동일하거나 유사한 성격을 지닌 법회이며 누구나 참여하여 음식을 대접받고 강경(講經)을 들을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 국가나 왕실에 의해 거행된 수륙회(무차회)는 현종(顯宗, 1641-1674, 재위 1659-1674)대인 1674년 이후에는 확인되지 않는다. 조선 전기에는 왕실에서 수륙회를 열기도 하였지만 후기에 이르러서는 민간 위주로 설행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정조가 무차회를 열도록 명령한 일은 의미가 깊다. 국왕으로서 무차회를 개최하여 백성들에게 음식을 보시하는 행위는 종교적인 공덕을 넘어 왕의 선정과 은덕을 경험시킬 수 있었다.
무차회가 거행되던 중에 이덕무가 대중들 앞에서 낭독하였던 「화산용주사상량문」의 내용은 이 무차회의 의의를 한층 강화하였다. 채제공이 지은 이 상량문에는 용주사가 정조의 효심으로 창건되었다고 칭송함과 더불어 불상이 짧은 기간에 완성되었고 태평성대를 이루어 군왕의 기상이 왕성하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특히 주목되는 구절은 ‘불상이 완성되었을 때 난여(鸞輿, 천자의 수레)가 용주사[齋]에 머물렀는데 용안에는 슬픔이 어려 있었다’라는 대목이다. 이 기록은 <삼세불상>이 완성되고 정조가 용주사에 왔었다는 내용을 전하지만 이 시기에 공식적인 정조의 행차는 확인되지 않는다. 행차의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이덕무의 낭독을 듣는 대중들은 저 문구로 하여금 <삼세불상>에 어린 정조의 서글픈 효심을 느꼈을 것이다. 더불어 이 불상이 국왕의 어떠한 마음을 바탕으로 조성되었는지 대중들에게 정체성을 확고히 하게 되었다. 무차회를 통해 <삼세불상>은 정조의 효심과 정통성의 산물로서 공표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이 불상은 그 존재 자체로도 정조의 정통성을 공고히 하는 기능을 할 수 있었다.
조성이 완료된 <삼세불상>은 일반적인 불상과는 달리 격식을 갖춘 환경으로 봉안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후대의 기록이 참고 되는데 1899년 12월 4일 『독립신문(獨立新聞)』의 기사에서는 ‘용동궁에서 용주사에 기별하여 불전면장(佛殿面帳)과 불탁상건염색(佛卓床巾染色)의 치수를 적어 오라 하였다’고 전한다. 이를 통해 용주사의 불전, 즉 불상 앞에 면장(앞에 들인 휘장)이 달려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창건 당시 기록인 「원문(願文)」에서는 궁궐에서 용주사로 휘장[帳]과 대좌에 까는 직물[寶坐幅] 등을 내려주었으며 이를 <삼세불상>의 감독관들이 관리했다고 하였다. 이로 보아 창건 시부터 용주사 불전에 면장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본래 왕실에서 면장은 종묘(宗廟)의 신위나 어진(御眞) 앞에 신성성을 더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삼세불상> 앞에 드리워진 면장도 이와 같은 목적으로 설치되었을 것이다. <삼세불상>에 이러한 환경이 마련되었던 이유는 국왕과 직결된 산물로서 격(格)을 지닌 상으로 인식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용주사 <감로도>는 이전 시기 다른 감로도들과 구성적으로 큰 차이를 보인다는 점에서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감로도는 음식을 불보살들에게 공양하여 감로를 받은 후 감로로 변한 그 음식을 아귀와 중생들에게 보시하여 영혼을 천도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용주사 <감로도>는 같은 주제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비율이 가로로 길며 전체적으로 좌우대칭의 구도로 되어 있다. 또한 감로도의 전형인 3단 구도가 아닌 2단 구도를 취하고 있다. 크게 강조된 소나무는 양 쪽에 배치되었고 암석은 청록산수 화법으로 묘사되었다. 상단의 불보살은 다섯 무리로 구분되었는데 대부분의 감로도에서 존격들을 각각 배치한 것과 확연히 다르다. 화폭 양 옆에 배치된 원형의 서광은 이전 시기 감로도 중에서 두 점이 확인된다. 그러나 <국청사(國淸寺) 감로도>(1755)와 <봉정사(鳳停寺) 감로도>(1765)에서는 원광 주위에 장식적인 테두리를 두르거나 내부에 문양을 그려 넣어 기존의 광배들처럼 묘사하였다. 반면 용주사 <감로도>는 서광 내외부에 아무런 장식이 없어 빛을 그 자체로 표현했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용주사 <감로도>의 전체적인 구성은 흥미롭게도 궁중 회화인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와 시각적으로 유사한 인상을 준다. 용주사 <감로도>는 마치 일월오봉도의 구성과 같이 화폭 하단 가장자리 양 쪽에 청록의 암석을 배치하고 큼지막한 소나무를 표현한 데다 다섯 무리의 불보살로 오봉을 암시하였다. 일월오봉도가 어좌나 어진 뒤에 설치되어 국왕과 그 권위를 상징했다는 점에서 그 구성과 유사성이 짙은 용주사 <감로도>는 화폭에 국왕의 존재를 암시했다고 할 수 있다.
정조의 존재를 구현하게 된 용주사 <감로도>는 이를 넘어 정조의 정치관까지도 화폭에 내포하였다. 용주사 <감로도>에서는 천도와 관련된 이미지들이 이전 시기 다른 감로도 보다 시각적으로 강화되었다. 흔히 감로도 하단에는 중생들이 지옥에 빠지거나 죽음에 이르는 장면이 다수 표현되었는데 용주사 <감로도>에서는 약 열 장면만 채택되어 다른 감로도에 비해 축소되었다. 대신 지옥문을 나와 천도되는 수많은 백성들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상단에 벽련대반(碧蓮臺畔)은 다른 작품에 비해 크기와 의장의 규모가 월등히 확장되었다. 벽련대반을 이끄는 천녀들도 가장 많은 인원을 보여준다. 벽련대반은 고혼(孤魂)을 실어 천도하는 데 사용되는 기물이므로 용주사 <감로도>는 ‘천도’라는 의미를 어떤 감로도보다도 분명하게 형상화했다고 할 수 있다.
살펴본 바와 같이 용주사 <감로도>는 전통적인 감로도 도상에서 탈피하여 독자적인 화폭으로 창안되었다. 이로써 국왕의 존재를 암시하고 천도의 이미지를 강화할 수 있었다. 이는 국왕으로서 전하고 싶은 바를 시각화하고자 한 결과였을 것이며 정조가 의도한 바가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제작되지 못했을 것이다. 용주사 <감로도>에서는 정조가 왕위에 있으니 백성들은 천도되리라는 결과를 벽련대반과 지옥문을 나오는 중생들을 강조하여 표현하였다. 더불어 지옥 도상과 죽음 장면을 축소하여 백성들의 고난을 최소화하겠다는 선정(善政) 의지를 내포하였다. 이로 인해 기존의 감로도에서 상징되던 불보살과 이들이 천도해야할 고혼의 존재는 국왕 정조와 백성들로 치환되었다.
용주사 창건 시에는 불전 내부를 궁궐과 같이 장엄하기도 하였다. 대웅보전 <삼장보살도>와 벽화에서는 궁궐 안을 장식하는 회화의 소재로 등장하던 도교 도상이 선정되었다. 용주사 <삼장보살도>는 천장보살(天藏菩薩), 지지보살(持地菩薩), 지장보살(地藏菩薩)과 그 회중(會衆)들을 배치한 불화이다. 이 작품은 당시 삼장보살도와 대체로 유사하지만 도상적으로 크게 달라진 부분이 나타나는데 바로 천장보살의 권속들이다. 천장보살 주위에는 동방삭(東方朔), 하선고(何仙姑) 등 도교의 신선 여섯 명이 천장보살을 향해 있다. 신선 중에서도 복숭아, 영지(불로초), 풀잎과 같은 지물을 지닌 선인을 위주로 하여 신선임을 바로 알아볼 수 있다. 이 작품 이전에는 <흥국사(興國寺) 삼장보살도>(1741) 등에서 선인이 나타나지만 약소한 수준이다. 이는 불교 및 도교 화보집인 『홍씨선불기종(洪氏仙佛奇踪)』(1602)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나 용주사 <삼장보살도>는 선인을 등장시킨 삼장보살도 중에서 가장 다양한 존상을 보여준다.
대웅보전 내부 벽화 및 별지화에는 신선들이 들고 있는 지물인 파초선과 표주박 등이 그려졌다. 판벽에는 21점의 벽화가 대웅보전 내부를 둘러싸고 있는데, 3점을 제외하고 모두 도교의 신선이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같이 조선시대에 사찰 벽면을 도교의 신선 주제로 가득 장엄한 예는 용주사가 거의 유일하다. 용주사 벽화 속 신선들은 대부분 동물이나 식물, 자연물과 함께 등장하였다. 이 도상들을 모두 종합해보면 동물로는 사슴, 학, 두꺼비 등이 묘사되었고 식물이나 자연물로는 복숭아, 영지(불로초), 소나무, 암석, 바다 등이 그려졌다. 이로써 용주사 대웅보전 내부의 사방(四方) 상벽 전체는 축수(祝壽)와 기복을 상징하는 도교 모티브들로 가득 채워졌다. 이 장면들에 출현하는 동물, 식물, 자연물 도상은 다름 아닌 십장생도(十長生圖) 속 십장생(十長生)이다. 조선시대 궁중에서는 십장생도가 계병이나 창호(窓戶)로 그려져 궁궐에 설치되거나 궁중 연회 등에서 행사장을 장엄하는 용도로 즐겨 사용되었다. 불로장생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요지연도(瑤池宴圖)와 같이 신선을 소재로 한 그림도 십장생도와 의미가 통한다.
정조대에도 왕실과 관련한 도교 회화가 적지 않게 확인된다. 정조가 김홍도에게 해상군선도(海上群仙圖)를 궁중 벽면에 그리라 명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또한 1800년에는 <왕세자책례계병(王世子冊禮契屛)>이 요지연도로 그려졌다. 이 계병을 비롯한 요지연도의 도상은 용주사 벽화의 일부 장면에서도 찾을 수 있다. 요지연도에는 서왕모(西王母)의 거처인 요지(瑤池)를 찾아가는 신선들의 모습이 나타난다. 그 중 호랑이를 탄 선인, 유건을 쓴 여동빈(呂洞賓)과 피리를 부는 유자선(柳子仙), 학을 탄 소사(簫史), 문창(文昌)과 주변 인물들, 두꺼비를 탄 유해섬(劉海蟾), 춤을 추는 신선과 학 등의 이미지가 용주사 벽화에서도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앞서 본 용주사 <감로도>가 어좌와 세트를 이루던 일월오봉도의 구성과 유사함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용주사 창건 시 미술에는 바로 궁중에서 내부를 장식했던 일월오봉도와 십장생도, 요지연도의 도상이 선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단청에서도 사찰 단청의 대표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금문(錦紋)이 창방 및 평방에서 생략된 가운데 모란과 같은 모티브로 내부를 장식하려는 성격이 강화되었다. 모란은 사찰 벽화에 자주 등장하지 않으며 궁중 장식화의 소재로 더욱 활용되었던 요소이다.
용주사 창건 시 불전은 여러 시각적인 요소들로 보아 궁궐을 꾸밀 때와 같이 내부가 장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국왕과 관계된 신성한 공간을 위한 의장이자 수복강녕을 염원하기 위해 고안되었을 것이다. 이 같은 장엄으로 용주사 불전은 더 이상 불교적인 공간만이 아니게 되었고 궁궐 내부의 세계를 공유하며 불교의 영험을 함께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왕실의 공간이 되었다.
이제 용주사는 창건 당시에 제작된 시각 미술로 인해 불교의 세계관에 국왕 정조와 그 나라를 대입한 공간으로 구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의도가 시각적으로 나타나고 이를 위해 봉안 환경과 표현 방식이 새로워졌다는 점에서 용주사 창건 시 불교 미술의 미술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Language
Korean
URI
http://hdl.handle.net/10371/142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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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lege of Humanities (인문대학)Archaeology and Art History (고고미술사학과)Theses (Master's Degree_고고미술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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