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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秋시기 제후 간 혼인의 정치적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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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왕석
Advisor
김병준
Major
인문대학 동양사학과
Issue Date
2018-08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Description
학위논문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인문대학 동양사학과, 2018. 8. 김병준.
Abstract
춘추시대는 엄격한 禮制를 가지고 있던 서주를 이어 ‘百家爭鳴’의 전국시대를 열어주는 중국 역사상 특별한 변혁기였다. 주왕실이 쇠미해져감에 따라 제후국 간의 전쟁과 패권 다툼이 빈번해졌고, 周 천자의 ‘天下共主’라는 이름은 유명무실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禮壞樂崩’의 추세는 점점 심해졌는데, 춘추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이러한 禮制의 붕괴였다고 할 수 있다. 郡縣制가 점차 分封制를 대체하기 시작하면서 종법제도 역시 심각하게 훼손되었으며, 권력이 아래로 이동하면서 거의 모든 방면에서 예제와 맞지 않는 현상이 나타났다. “昏禮者, 禮之本也.”로 표현될 만큼 혼례는 예로부터 중시되었고, 특히 귀족과 통치자계급에 있어서 혼인 의례는 더없이 중요하였다. 혼인관계는 사회활동에 광범위한 영향과 제약을 주었던 사회관계였다. 그것은 宗法윤리와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며 禮制에서 매우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이러한 혼례 역시 춘추시대 禮制의 붕괴 속에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패권 다툼의 과정에서 각국 제후는 자국의 세력 강화와 발전을 위해 종종 다른 나라와 혼인 동맹을 맺고, 혼인외교 관계를 이어갔다. 정략 혼인은 종법제도를 수호하고 공고히 하는 데에 긍정적인 작용을 하였고, 동시에 일정 기간 동안 혼인 당사국 사이의 정치적 안정과 교류 촉진에 기여했다. 이렇게 춘추시대 제후 혼인은 정치ㆍ군사ㆍ외교 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으며, 분명한 정치적 목적을 가지는 것을 기본적인 특징으로 한다. 제후의 혼인은 정치적이었으며, 혼인 외교 정책의 구현이었고, 혼인국 쌍방의 관계 및 당시 국제 정세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선행 연구에서는 춘추 제후 혼인의 이러한 주요 특징을 다루고 있고, 그 성과도 이미 상당하다. 특히 근래 많은 학자들은 선진시대 혼인 연구에 있어서 전래문헌 뿐만 아니라 青銅銘文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여러 방면에서 선진 혼인의 정치성 문제에 대해 관련 논의를 진행해 온 기존 연구는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즉 제후 혼인이 지닌 정치성을 지적할 뿐 그 혼인이 정치적으로 어느 정도 효용성을 갖고 있었는지 명확히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컨대 제후국 간의 정략 통혼은 때로 ‘예물’ 증정의 목적과 기능을 가지고 있었는데 특히 ‘媵’의 여성을 딸려 보내는 것은 ‘예물’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그렇다면 당시 ‘예물’ 증정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를 살펴보고, ‘媵’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따라서 본고는 춘추시대 혼인의 정치적 성격을 보여주는 ‘媵婚’에 주목하고, 혼인외교와 ‘贈禮외교’ㆍ‘질자외교’ 두 문제를 비교하여 당시 혼인이 어느 정도의 정치성 위상을 가지고 있었는지 파악할 것이며, 춘추 제후 혼인의 정치성 특징에 대한 탐구를 진행하고자 한다.

제Ⅰ장에서 먼저 귀족층의 기본적인 혼인 형태에 대해 분석하고 제후 婚制ㆍ혼인의식ㆍ혼인대상의 선택 등에 대한 문제를 명확히 할 것이다. 그 후에는 제후 혼인의 특수 형태인 ‘媵婚’에 대해 깊이 탐색하고 媵婚制의 특징ㆍ媵婚制 아래 제후 처첩 등급의 구분ㆍ媵婚이 제후국 관계와 국제질서에 미친 영향 등의 방면을 살펴본 뒤 춘추 시대의 ‘媵婚制’와 그 정치 기능을 전면적이고 심도 있게 이해하고, 이를 통해 제후국 혼인의 정치성 정도를 파악할 것이다.

제Ⅱ장에서는 제후 혼인이 가지고 있는 정치성 정도를 진일보하여 확정하기 위해 먼저 제후간 혼인의 특징에 대해 논술할 것이다. 각국 통혼의 정치목적 및 그 의의를 분석하여 춘추 제후 혼인의 정치성 특징과 기능을 명확히 드러낼 것이다. 그 후에 춘추시대 각국의 贈禮외교와의 비교를 통해 제후 혼인의 정치적 성격을 파악할 것이다. 마지막 부분에는 質子외교와 혼인외교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강조하여 논지를 전개할 것이다. 또한 두 종류의 다른 외교 방식으로서 양자의 본질ㆍ기능ㆍ그 영향 등의 차이에 대해 고찰하여 각각이 춘추 외교에서 갖는 의의와 작용을 구명하고 나아가 춘추시기 제후 정략 혼인의 역사적 기능과 역사적 의의를 파악하고자 한다.

춘추는 서주의 婚制를 계승하여 ‘一夫一妻多妾制’를 실시하였다. 禮制에서는 天子ㆍ諸侯ㆍ卿大夫ㆍ士를 포함한 귀족 계층의 복잡한 혼례의식을 규정하고 있다. 여기에는 주로 納采ㆍ問名ㆍ納吉ㆍ納徵ㆍ請期ㆍ親迎 등 ‘六禮’가 포함되며 혼인의 ‘禮’적인 특성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춘추시대 제후들이 妻妾을 맞이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주로 ‘聘則爲妻’, ‘奔則爲妾’, ‘婚’, ‘烝報’, 그리고 매매 및 전쟁 등의 폭력적 수단을 통해 빼앗아 혼인하는 형식 등을 포함한다. 제후국 간의 혼인은 대부분 정치적 혼인으로서 제후국 군주의 혼인은 종족의 내부 관계 및 집단의 이익 등을 공고히 하려는 목적 이외에, 더 강한 정치성이 부여되었다. 말하자면 정치적 목적성은 당시 제후혼인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이었다. 이는 大國쪽에서 더 잘 드러나는데 주로 軍事同盟을 맺어 정치연맹을 만드는 것, 盟約을 강고히 하고 정치연맹을 강화하는 것, 허점을 노려 상대국을 차지하기 위한 것 등이 그 목적이었다. 소국의 경우, 주로 대국에 의지하여 존립을 도모하기 위해 대국의 비호를 구하였다. 정리하자면 실질적으로 혼인관계를 맺음으로써 자국의 이익을 도모한 것이었다.

춘추시대 제후의 정치혼인 중 ‘媵婚制’는 가장 눈에 띄는 형식이다. 제후가 딸을 시집보낼 때 서로 媵을 보내는 것은 당시 제후국 외교활동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춘추시대의 ‘媵婚’은 실제로 ‘同姓의 여자가 媵하는 것이지, 異姓은 그럴 필요가 없다. 무릇 시집 갈 때는 모두 媵하며, 媵하면 안 되는 건 없다.’이라는 상황이었다. 姪娣가 함께 시집가거나 타국에서 보낸 媵은 모두 자발적이었으며 혼인 당사국들이 강제적으로 요구한 것이 아니었다.

제후의 혼인은 가문의 등급을 매우 중시하였다. 제후의 嫡女는 일반적으로 타국의 국군에게 시집을 가서 夫人이 되었고 庶女는 통상 媵이 되어 함께 시집갔다. 춘추시대 패권 다툼 속에서, 제후들의 저울은 예제질서보다는 자국의 이익으로 기울었고, 그들의 혼인은 자국의 이익을 지상과제로 삼는 특징을 보였다. 그런 까닭에 ‘同姓不婚’의 원칙이 깨지고 동성 간 혼인을 맺는 경우와 異姓이 와서 媵이 되는 상황이 비교적 많이 출현하였다. ‘媵婚’制는 춘추시대 귀족의 ‘一夫一妻多妾’婚制를 유지하는 것이었고, 이러한 등급구분은 당시 혼인예제와 종법제가 가진 상보적 관계의 체현이었다. 媵婚은 춘추시대 정치 혼인 중 충분히 두드러지는 지위를 점하였다. 그것은 同姓兄弟國 간의 종법관계를 견고히 하는데 유리하였고, 혼인 당사국 간의 政治軍事동맹을 확대하는 데에도 힘이 되었다. 이는 춘추시대 제후 혼인에 있어서 고정된 제도이자 일반적인 모습으로, 강한 정치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제후가 딸을 시집보내는 것은 때로 ‘贈禮’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媵’이 되어 함께 시집가는 여자의 경우 ‘禮物’의 성질을 더욱 강하게 띤다. 禮物과 시집 간 딸은 모두 국가 간 관계를 조화시키고 자국의 이익을 확대하기 위한 것에서 출발하였다. 혼인외교는 딸에게 어느 정도 ‘禮物’의 의의를 부여하여 이루어지는 외교활동으로, 제후 혼인의 정치적 특징을 더욱 잘 드러낸다.

‘質子외교’는 춘추시대의 또 다른 외교 책략으로서 그 형식ㆍ목적ㆍ기능과 작용 등의 방면에서 혼인 외교와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공통적으로 質子와 出嫁女子는 대부분 계획적이었고, 두 종류의 외교는 모두 강력한 정치적 목적성을 띠고 있었다. 이러한 외교방식은 모두 多方位의 地緣에 기초한 지니고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아울러 국제관계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보습을 보였다. 양자가 일으킨 작용은 모두 제한적이었는데 일정시기 내에서만 효과가 있었고, 평화를 오랫동안 지속시킬 수는 없었다. 그들은 모두 대국 패권다툼의 희생물이었다. 그러나 양자는 또한 두 가지 다른 성격을 지닌 외교방식으로 명확한 차이가 있었다. 국가 간 통혼은 대부분 특정 나라가 관계를 개선하거나 동맹을 견고히 하기 위해 주도적으로 진행했으며, 주로 양국 간 직접적인 충돌이 없을 때 이루어졌다. 그러나 질자는 일반적으로 정벌을 피하기 위해 대국에게 부득이하게 보내는 것이었다. 이는 평화를 위한 것으로, 쌍방이 긴장관계 속에 있을 때 더 많이 발생하였다. 질자외교에 비해 혼인외교는 일종의 관계 완화를 위한 외교 방식이었기 때문에 당시에 보편적으로 이루어졌고 더욱 쉽게 각국이 받아들였다. 또 양국의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작용 역시 더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 중 媵婚은 또한 통혼의 범위를 확대하고, 나아가 제후국 간 정치동맹을 확대시켰다. 그러므로 혼인을 통해 이루어진 ‘舅甥之國’의 관계는 혼인국 간의 관계 안정에 더욱 효과가 있었으며 대체하기 어려운 작용이었다.

혼인외교ㆍ贈禮외교ㆍ질자외교는 모두 제후국이 政治聯盟을 맺기 위한 정책으로 특히 대국에게서 많이 나타났으며, 실질적으로는 패권을 세우고 霸主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 3 가지 외교는 모두 국가 관계를 조정하고 列國紛爭을 해결하는데 무시 못 할 작용을 하였으며, 춘추시대 제후의 정치 혼인은 분명한 정치적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Language
Korean
URI
http://hdl.handle.net/10371/144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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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ars in Collections:
College of Humanities (인문대학)Asian History (동양사학과)Theses (Master's Degree_동양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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