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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기 쥘리앵 레몽의 인종주의 : Le racisme de Julien Raimond dans la Révolution frança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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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민정기

Advisor
최갑수
Major
인문대학 서양사학과
Issue Date
2018-08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Description
학위논문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인문대학 서양사학과, 2018. 8. 최갑수.
Abstract
본고는 프랑스 식민지 생도맹그(Saint-Domingue)의 자유유색인 유산가 쥘리앵 레몽(Julien Raimond, 1744-1801)이 프랑스혁명기에 전개했던 자유유색인 참정권 운동과 노예제폐지론을 분석하고 그 기저에 있었던 그의 인종주의적 사고방식을 고찰한다. 백인 아버지와 물라토 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그는 당시의 법에 따라 출생 때부터 자유인으로 인정되었고 18세기 말 생도맹그에는 그와 같은 자유유색인(gens de couleur libres)들이 다수 존재했다. 자유유색인들의 대표였던 레몽은 자유유색인에 대한 법적, 사회적 차별에 반발하여 참정권 운동을 전개했으나 흑인 노예의 권리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그는 자유유색인과 흑인은 빛과 어둠이 나뉘듯 엄격히 구분된다고 믿었고 흑인들의 열등함을 전제했다. 자신 스스로가 인종적 위계질서 하에서 고통당했던 자유유색인 레몽이 왜 인종주의적 사고방식에 충실했던 것일까? 위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본고는 1789년에서 1797년 사이 레몽의 글과 활동을 검토하여 그의 독특한 인종주의적 사고를 분석하고 그것의 역사적 의미를 찾고자 한다.

자유유색인에 대한 차별을 경험한 레몽은 그 원인에 대한 분석을 시도했다. 그는 1760년대에 생도맹그로 유입된 다수의 가난한 백인들이 부유한 자유유색인들을 보며 열등감을 느꼈고 식민당국에 인종차별적 법률의 제정을 촉구한 결과로 인종적 계서제가 강화되었다고 해석했다. 그의 분석은 당시 생도맹그 사회 내 자유유색인과 백인 간의 경제적 긴장을 잘 보여주나 인종적 계서제의 근본적 원인인 노예제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그의 분석이 근본적 원인에 접근하지 못하고 표면에 드러나는 경제적 대립관계만을 지적했던 것은 그가 유색인으로서 인종적 계서제의 피해자였지만 동시에 노예소유주로서 노예제의 수혜자였기 때문이었다. 자유유색인에 대한 백인의 인종적 편견을 비판하면서도 흑인들의 노예노동은 당연한 것으로 전제했던 레몽의 사고방식은 이후 그의 여러 활동들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레몽은 1782년부터 적극적으로 자유유색인 참정권을 주장했고 1784년에는 프랑스로 건너가 자신의 주장을 담은 책자들을 출판했다. 1789년에 혁명이 발발하자 그는 자유유색인 참정권의 정당성을 혁명 이념과 결합시켰다. 그는 프랑스 본국에서 권리의 평등을 이뤄낸 혁명이 식민지에서는 피부색의 편견에 가로막혀 본국에서와 같은 모습으로 실현되지 못했다고 역설했다. 이는 혁명 이념의 인종적 경계에 대한 최초의 문제제기였다. 그의 주장은 당시 입법의회의 주도세력이었던 브리소파에게 영향을 미쳤고, 모든 자유유색인의 정치적 권리를 인정하는 1792년 4월 4일의 법령이 통과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그가 주장했던 것은 모든 인종의 평등한 정치참여가 아니라 오로지 자유유색인과 백인만의 평등이었다. 그는 자유유색인 참정권의 논거로서 자유유색인이 흑인보다 우월하므로 양자가 다르게 취급되어야 한다는 또 다른 인종적 편견을 내세웠던 것이다.

자유유색인의 참정권이 인정된 후 프랑스 정부는 노예반란을 진압하고 식민지의 사회 질서를 확립하고자 했다. 이와 관련하여 레몽은 점진적 노예제폐지론을 제시했다. 그는 노예들이 자신의 몸값의 6분의 1을 주인에게 지불하면 일주일 중 1일을 자유일로 누릴 수 있게 하고, 이것이 반복되어 노예의 자유일이 일주일 중 2일, 3일로 늘어나고 일주일 전체가 자유일이 되면 노예가 완전한 자유를 얻을 수 있게 하자고 제안했다. 이는 외관상 노예제폐지론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혁명을 노예들에게까지 확대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농장주로서의 자기이익에 충실하려 했던 결과에 가까웠다. 레몽은 파괴된 대농장 체제의 부활을 원했고, 노예제가 와해되어 노예들이 사실상 자유로워진 상황에서 그는 노예들을 계속하여 대농장에 붙들어둘 방법을 모색했다. 그는 노예들은 오로지 자신의 노동을 통해서 취득한 금전으로만 주인에게 몸값을 지불하고 자유를 되살 수 있다는 조건을 붙였다. 그렇게 되면 노예들은 노동하지 않고는 자유를 얻을 수 없으므로 노동을 자유의 수단으로 여길 것이며, 완전한 자유를 얻을 무렵이면 노동을 내면화한 상태에 이르러 자유인이 되고나서도 기꺼이 농업노동자로서 과거 주인의 대농장에서 일하리라는 것이 그의 예측이었다.

레몽의 구상은 흑인에 대한 인종주의적 사고방식을 전제하고 있었고 그것을 인종문제에 대한 당대의 견해들, 특히 18세기 프랑스 계몽사상가들의 그것들과 견주어보면 그것이 계몽사상가들의 주장에 맞닿아있으면서도 독특한 속성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첫째로 레몽의 인종주의적 사고는 백인들이 생물학적 요소를 근거로 자유유색인을 차별하는 것을 비판하면서도 그 자신 역시 생물학적 요소를 근거로 자유유색인과 흑인을 구분하는 이중성을 특징으로 했다. 둘째로 레몽은 타락한 상태의 흑인들을 노동으로 교화시켜 자유로 이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 점에서 흑인들의 개선가능성 및 문명화 담론을 언급했던 계몽사상가들과 유사했다. 그러나 계몽사상가들은 문명화된 백인만을 개선의 모범으로 제시했던 반면 레몽은 모범이 되는 인간의 범위를 자유유색인으로까지 확장시키려고 했다는 점에서 그들과 달랐다. 레몽의 인종주의적 사고는 자유유색인 유산가 계급이 대두하여 기존의 피부색의 위계질서와 충돌하면서 발생했던 식민지 특유의 산물이었다. 혁명기의 생도맹그는 계급과 인종의 교차를 연구하는 실험실과도 같았고 레몽은 바로 그 교차점에 있었다. 자유유색인으로서 백인과 흑인의 경계에, 중소규모의 유산가로서 최상층 유산가와 하층민의 경계에 서 있었던 그는 유동적이었던 당시의 인종, 인종주의 개념이 계급이라는 범주와 뒤엉켜있는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는 인물이었다.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44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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