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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르트 테르 보르흐의 <뮌스터 조약 비준에 관한 서약> 연구 : A Study on Gerard ter Borchs The Swearing of the Oath of Ratification of the Treaty of Münster, 15 May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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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원정연

Advisor
신준형
Major
인문대학 고고미술사학과(미술사학전공)
Issue Date
2018-08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Description
학위논문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인문대학 고고미술사학과(미술사학전공), 2018. 8. 신준형.
Abstract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 헤라르트 테르 보르흐(Gerard ter Borch the Younger, 1617-1681)는 1648년 을 제작했다. 이 회화는 테르 보르흐의 기획 하에 완성과 동시에 판화로 제작되었다. 그리고 이 판화는 뮌스터 조약 체결 시기에 가장 활발하게 발행되었던 팸플릿이라는 매체의 형태로 네덜란드에 유통되었다. 본 논문은 테르 보르흐라는 화가를 논의에 중심에 두고 이 회화에서 판화로 제작되는 과정을 검토한다. 이를 통해 테르 보르흐가 네덜란드 미술시장에서 자신의 명성을 높이고, 화가로서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이 작품을 제작하였음을 주장한다. 그리고 그 결과, 이 작품이 17세기 네덜란드의 문화적 환경에서 성공적인 화가로 자리매김한 테르 보르흐라는 인물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작품임을 설명한다.

1630-40년대 테르 보르흐는 특정 종교나 정치적 분파에 구애받지 않고 화가로 성장하기 위해 도움이 되는 도시나 국가를 자유롭게 여행했다. 17세기 네덜란드는 암스테르담의 엘리트 계층을 중심으로 종교적 관용의 전통과 세속적 가치가 빠르게 성장했다. 엘리트 계층은 네덜란드 사회의 지배 계층이자 문화 예술의 후원자였다. 테르 보르흐는 유년시기에 암스테르담과 하를럼 등의 문화 중심지에서 도제 교육을 받으며 이러한 문화적 환경에 밀접하게 노출되었다. 그리고 1635년, 테르 보르흐는 찰스 1세의 궁정 판화가였던 로버르트 판 푸르스트(Robert van Voerst, 1597-1636)의 영국 런던의 스튜디오에 방문했다. 이곳에서 그는 안토니 반 다이크(Anthony Van Dyck, 1599-1641)의 초상화 시리즈, (c1630) 작업을 관찰했다. 또한 테르 보르흐는 1637년부터 1640년까지 스페인에서 필립 4세의 초상화 등을 작업했다. 이러한 1630-40년대의 활동을 통해 테르 보르흐는 초상화라는 장르의 중요성과 국제적인 활동이 화가의 명성과 사회적 지위에 미치는 영향을 인식하게 되었다.

테르 보르흐는 1648년 뮌스터 시청에서 거행된 네덜란드와 스페인 간의 뮌스터 조약 비준에 관한 서약 의식을 회화에 담았다. 이는 유럽국가들의 2년 여에 걸친 치열했던 협상이 마무리되는 절정의 순간이자 테르 보르흐가 양국 대사들과 뮌스터 시청에 동행하여 실제로 목격한 장면이었다. 테르 보르흐는 1646년 네덜란드 연합주 최고 대사 아드리안 파우 반 헤임스테더(Adriaen Pauw van Heemstede, 1585-1653)의 수행원으로 뮌스터를 방문했다. 그는 2년 여의 협상 기간 동안 아드리안 파우를 포함한 네덜란드 대사들의 초상화 등을 제작했다. 그리고 1648년에는 스페인측 최고 대사 페르냔다 백작(Gaspar de Bracamonte y Guzmán, 3rd Count of Peñaranda, c1595-1676)의 수행원으로 뮌스터 시청에서 거행된 조약 비준에 관한 서약 의식에 참여했다. 테르 보르흐는 이러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을 제작했다. 그리고 이 회화의 주문자는 전해지지 않는다. 따라서 이 작품은 테르 보르흐의 스스로의 기획 하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테르 보르흐는 을 마치 사진을 찍은 것과 같이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그림에는 네덜란드와 스페인 대표단을 포함한 77명의 참여자와 목격자들이 횡렬로 배치되었다. 조약의 서명자들은 그림 중앙의 원탁을 중심으로 왼편에는 네덜란드 대표단이 오른손의 검지와 중지를 들고 서약을 행하고 있다. 그리고 오른편에는 스페인 측 대사들이 십자가가 놓인 성경에 손을 올리고 서약을 행하고 있다. 테르 보르흐는 동시대의 역사적 사건이었던 뮌스터 조약을 주제로 다루면서도, 네덜란드에서 이러한 주제로 통상적으로 그려졌던 역사화와는 달리 알레고리적 요소를 취하지 않았다. 작품의 배경묘사나 소품들까지 실제와 같은 모습으로 세밀하게 묘사하였다. 등장인물들 역시 압도적인 인물 수에도 불구하고 식별 가능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묘사했다. 또한 테르 보르흐는 각각 화면의 절반씩을 배분하여 프로테스탄트 네덜란드와 가톨릭 스페인을 동등하고, 상호 호혜주의적으로 묘사했다. 서약 의식에 대한 서면 기록들은 실제 의식이 스페인 그리고 네덜란드의 순서로 시간의 틈을 두고 이루어졌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테르 보르흐는 각 측의 다른 맹세의 행위를 한 장면에 순간의 모습으로 동등하게 집약했다. 또한 테르 보르흐는 이 그림에 양국 대표로 서약에 참여한 대사들뿐만 아니라 목격자들 역시 높은 비중으로 포함시켰다. 그리고 서약 의식에 집중하고 있는 다른 목격자들과 달리 화면 외부의 관람자를 응시하고 있는 자화상을 포함시켰다. 테르 보르흐는 자신을 단순한 의식의 목격자가 아닌 의식과 관람자를 매개하는 자부심을 가진 화가로 표현하였다. 그는 그의 첫 번째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작품을 통해 스스로에 대한 높은 자부심과 자신의 높아진 사회적 위치를 규정하고, 표현했다.

테르 보르흐는 회화 제작 직후, 하를럼의 판화가 요나스 사위 데르후프(Jonas Suyderhoef, c1613-1686)에게 판화 제작을 의뢰했다. 이 판화는 원본(original) 회화를 바탕으로 회화와 동일한 구성과 높은 수준의 세밀한 디테일로 제작되었다. 그리고 판화 하단에는 테르 보르흐가 그리고 사위 데르후프가 새김이라는 서명과 함께 이 그림이 의식 당일의 모습을 정확하게 묘사하였음을 강조하는 라틴어 문구가 포함되었다.

판화의 내용과 형태는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주요 종교, 정치, 경제적 이슈를 다뤘던 팸플릿과 유사하다. 네덜란드에서 뮌스터 조약을 주제로 발행된 팸플릿은 역사적 사건의 일정, 인물, 지역 등의 세부적인 정보를 담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뮌스터 조약과 관련된 정보를 기대하는 네덜란드 사람들의 욕구와 호기심을 충족시켰고 발행 주체의 정치·사회적 의도를 전했다. 주로 출판가를 중심으로 발행되었던 팸플릿은 역사적 이슈에 대해 신속하게 반응했으며 빠른 시간에 많은 사람들에게 유통되었다. 따라서 팸플릿은 발행주체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담으면서도 정보를 제공하는 특성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었다. 테르 보르흐의 판화 역시 특정 장소에서 일어난 역사적 행위와 참여 인물들의 모습을 제공하였다. 그리고 화가의 자화상을 통해 테르 보르흐의 자부심을 표현했다. 그리고 정확한 초상임을 강조한 그림 하단의 라틴어 각주는 테르 보르흐가 이 뮌스터 조약 체결 의식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그에 의해 묘사된 배경과 인물에 대한 객관성을 강조한다.

테르 보르흐가 화가로서 유일하게 뮌스터 조약 체결 의식에 참여했는 사실은 테르 보르흐의 앞으로의 이력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그가 뮌스터에서 교류한 인물들은 평화조약 체결에 많은 노력을 쏟아 부었던 네덜란드 중심부의 정치·경제적 지도자였다. 이들은 또한 미술시장의 부유한 콜렉터이자 문화적인 영향력을 가진 인물들이었다. 따라서 테르 보르흐는 에서 종교적 관용주의와 국제주의라는 뮌스터 조약의 이념을 자신의 신념으로 표출했다. 그림에 표현한 뮌스터 조약의 정체성은 결국 그의 주고객인 네덜란드 대도시 엘리트 계층의 성향이나 신념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테르 보르흐는 높은 수준으로 마무리된 원본 회화를 판화의 모델로로 제공하여 판화가 회화와 동일한 내용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제작된 판화의 유통을 통해 네덜란드 미술시장에서 자신의 명성을 높이고, 화가로서의 입지를 강화하고자 했다. 17세기 미술시장에서 화가의 명성은 작품의 가격과 수요층에 직결되었다. 17~8세기 네덜란드의 철학가 베르나르드 맨더빌(Bernard Mandeville, 1670-1733)은 그의 저서 『꿀벌의 우화(Fable of the Bees)』(1705) 에서 화가의 명성은 그림의 가격을 결정하는 주요한 요소 중 하나임을 밝혔다. 당시 고가의 회화를 구매했던 엘리트 계층은 높은 사회적 지위와 경제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예술 애호가(liefhebber)였다. 이들은 열정적인 콜렉터이자 그림의 감정에도 참여하는 학식과 예술에 대한 지식을 보유한 계층이었다. 예술 애호가들이 주요 콜렉션에서 그림의 감정에 참여하는 지적인 즐거움을 누리는 방식에는 그림의 양식에 대한 품평뿐만 아니라 화가에 대한 명성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 역시 중요한 부분이었다. 화가에 대한 명성은 기본적으로 화가의 기술과 그림의 질을 바탕으로 하지만 외부적인 요인 역시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테르 보르흐는 뮌스터 조약을 바탕으로 한 자신의 명성을 활용하여 엘리트 계층의 수요를 향상시키고, 더 높은 가격에 자신의 그림을 판매하고자 했을 것이다.

실제로 17세기 네덜란드 미술시장과 관련된 기록과 문헌은 테르 보르흐가 뮌스터 시기 이후 암스테르담을 비롯한 네덜란드 주요도시에서 성공적으로 활동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지속적으로 네덜란드 최상위 엘리트 계층을 고객의 초상화를 제작했으며 165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제작한 장르화 역시 성공적으로 판매했다. 그리고 1666년에는 데벤테르 시의회 고문으로 임명되며 사회적 지위에 있어서도 정치적 엘리트의 반열에 올랐다.



본고는 테르 보르흐가 17세기 네덜란드의 문화적 환경에서 엘리트 계층을 주고객으로하는 화가로 성공하기 위해 이라는 작품을 기획하였다는 점을 설명했다. 특히 원본 회화가 판화로 제작되는 과정에서 화가, 테르 보르흐의 주체적인 역할에 주목하였다. 이를 통해 기존까지 뮌스터 조약이 갖는 역사적 가치 하에 국한되었던 작품의 의미를 화가의 전략이라는 새로의 관점에서 조명하고자 했다.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44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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