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關東 在方町의 발전에서 幕府와 藩의 역할과 성격 : - 武藏國 秩父郡 大宮鄕을 중심으로 -
関東在方町の発展における幕府・藩の役割と性格 : 武蔵国秩父郡大宮郷を中心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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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강민주
Advisor
박훈
Major
인문대학 동양사학과
Issue Date
2019-02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Description
학위논문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인문대학 동양사학과, 2019. 2. 박훈.
Abstract
本論文では、江戸時代(1603∼1868)の関東にあった武蔵国秩父郡大宮郷を研究対象とする。秩父郡は、1884年(明治17)に発生した秩父事件にみられるように、大抵は農村地域として知られるが、秩父郡の行政の中心地であった大宮郷は、江戸時代には秩父神社と秩父絹を中心に栄えた在方町であった。
在方町とは、郡奉行・代官支配の「在方」となった地域に存在する都市空間をいう。幕藩体制下では武士などと農民との居住地は原則的に分離され、村には農民だけが残り、武士をはじめとして、商人、職人、寺社関係者らは町に居住した。しかし「在方町」は、農村地域に存在して法的には村でありながらも、実際には構成員たちが商業活動をし、一部の武士も滞在する「郷村都市」であった。したがって、在方町の研究を通じて、理念上商業が禁止された農村地域が次第に都市化していく様相を検討することが可能となり、ここに研究の意義がある。
従来の研究において在方町は、支配権力の影響という観点からではなく、町の住民が自律的に運営する空間としてとらえられてきた。これは1980年代以降の日本の都市史学界における研究潮流がそうであったように、在方町に関する研究が、町内の規約、空間構造、住民身分、人々の動きや経済活動など、町内部の史料を主に分析されたためである。
しかし、在方町の住民が幕府や藩の支配から完全に自由でない以上、住民の自律性だけを評価することはできない。在方町自体もまた、幕府と藩の支配を受けて成立・発展しており、「支配」と「自律」の二つの側面を同時に分析する必要がある。すなわち、町の自律的側面だけでなく、「国家権力」にあたる幕府や藩の支配政策および、それが町に及ぼした影響に注目しなければならない。したがって、本研究では、大宮郷が在方町へと発展していく過程を検討しながら、阿部氏支配の時期における忍藩の役割や幕府政策の影響について明らかにした。
以上で検討したことを整理すると次の通りである。忍藩の藩主阿部氏は、歴代藩主が幕府の役職を務めていたことから藩主の経費が増加し、藩財政は逼迫した。このような状況下で、秩父領(秩父郡の忍藩領)は年貢を米ではなく現金で納付しており、忍藩にとって重要な現金収入源であった。そのうち大宮郷は、秩父領全村の年貢の約20%を負担していた。また、大宮郷において毎年霜月大祭とともに開かれる絹大市には、人々が様々な地方から訪れ、多量の絹が取引されていた。
忍藩は、大宮郷のこのような経済的利益に注目し、絹市と祭礼に介入した。18世紀初め、藩主は秩父領を巡行し、享保年間から、大宮郷の霜月大祭と絹大市に関する新しい政策が展開された。この時期から霜月大祭で華やかな付祭が興行されるようになり、藩主からは藩主代理人が派遣された。 また、絹大市には、取り締まりのための役人が毎年派遣され、割役に絹大市の取引量を報告させた。以後、絹大市と絹市の取引量は増加し、18世紀後半には全盛期を迎え、他の商工業も繁盛した。そしてこの時期に忍藩は、大宮郷と郷内の富裕者に度々御用金を収めさせた。すなわち、忍藩が藩財政確保のために大宮郷の絹市と祭礼にかかわるようになったことが、大宮郷の都市への発展に一役買ったのである。
一方、幕藩体制下では理念的には農民は商行為が禁止された。しかし、兵農分離の前提はあるものの、参勤交代の費用負担もあったことから、米納・金納を問わず年貢を財政に転換する過程では市場を経るしかなく、幕府・藩は農村地域での農民の商業活動を黙認せざるを得なかった。したがって、幕府が農業と商業のどちらに重点を置くかによって政策の違いが発生した。大宮郷は、享保改革、田沼時代の重商主義政策、寛政改革の重農主義政策などの幕府の政策によって、繁栄することもあれば経済的打撃を受けることもあった。特に関東地方に位置したことで、絹市に関する幕府の政策は、大宮郷に直接的な影響を与えた。この時忍藩は、幕府の命令に基本的には従ったが、藩の利益と秩父領の安定に不利な政策が施行された場合には、幕府と異なる政策路線を選択し、大宮郷の安定と繁栄を図った。
これに関して、本研究では2つの事例から明らかにした。 一つは、18世紀後半、幕府が新たな財源調達のため、大宮郷を含む武蔵国や上野国の絹市に対し改会所を設置するよう命令を出した時の事例である。幕府の命令が伝わった上野国西部では、大規模な一揆が発生し大きな被害を受けたが、大宮郷では、忍藩が突然停止とした絹市の再開を要求するのみで、大規模な蜂起は起きていない。忍藩は会所設置に批判的な立場にあり、幕府の命令を意図的に伝達しなかったものと考えられる。これは、秩父領民から徴収する年貢や御用金が、藩の主な財源の一つであったためと推測される。幕府の命令に従って絹市に会所を設置し、絹商人たちから税を取り立てれば、絹の価格が自ずと上昇し、そうなれば秩父領民にも打撃を与えるだろう。したがって、忍藩は、大宮郷の絹市を保護するために幕府の命令に従わなかったとみられる。
もう一つは、19世紀初め、幕府の風俗統制令によって大宮郷の付祭が禁止された時の事例である。この時、忍藩当局と秩父領の代官は、大宮郷に経済的打撃を与えるとして、付祭が再開されるよう積極的に動いた。秩父領代官は大宮郷の住民が願書を提出する度に、それを忍藩役所に送って藩役人たちの指示を仰いだ。藩の側もまた、大宮郷が祭礼を再開できるよう指導し、付祭再興について幕府に問い合わせをおこなった。また、代官は願書の内容にまで立ち入ってさまざまな指示をし、住民が作成した願書に加筆し、付祭が許可される可能性があるため請願を働きかけるよう、割役に内密に知らせていた。付祭が再開された後には、華やかになることで幕府によって再び禁止されることのないよう、郡奉行が大宮郷の住民に注意を与えながら、引き続き大宮郷の繁盛に気を遣った。このように、秩父領代官と忍藩当局で付祭を再興させ、大宮郷を繁栄させようと努力していることが分かる。
一方、阿部氏の支配時期、忍藩は秩父領で専売制を実施することはなかった。これは「民」と利益を争わない「仁政」でもあった。松平氏の支配時期になり、幕末の開港で外国貿易が開始された際には、忍藩においても生糸の専売がおこなわれたが、少なくとも阿部氏の支配時期には独自の「仁政」が繰り広げられたことが大宮郷の事例から確認できる。秩父事件は、市場の激しい変動により農民が窮乏したにもかかわらず、忍藩が行なったような伝統的な観念の「仁政」を明治政府が施さなかったために爆発したのである。
このように大宮郷は、幕府の政策に直接影響を受けたが、その中でも忍藩と藩の管理下にある秩父領代官は、大宮郷の繁栄に努めていた。すなわち、大宮郷の発展は、住民の「自治」のみで成ったのではなく、藩と住民の「協治」によって行われたと考えられる。したがって、大宮郷の発展状況をとらえるためには、大宮郷内部の状況を見るだけでなく、忍藩、特に代官の役割と動向、そして幕府政策の影響をも併せて考慮しながら検討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ある。
본 논문은 에도 시대(江戶時代 : 1603~1868) 일본 관동에 있는 무사시 국(武藏國) 지치부 군(秩父郡) 오미야 향(大宮鄕)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지치부 군은 1884년(明治17)에 일어난 지치부 사건(秩父事件)으로 인해 대개 농촌으로 알려져 있지만, 지치부 군의 행정 중심지인 오미야 향은 에도 시대에 지치부 신사(秩父神社)와 지치부 견(秩父絹)을 중심으로 번성한 자이카타마치(在方町)였다.
자이카타마치는 고리부교(郡奉行)・다이칸(代官)이 지배하는 ‘자이카타(在方)’로 되어 있는 지역에 존재하는 도시 공간을 말한다. 막번체제(幕藩體制)에서 농민과 상인은 거주지가 원칙적으로 분리되어, 무라(村)에는 오직 농민들만 남고 무사를 비롯한 상인, 직인, 사사(寺社) 관계자 등은 마치(町)에 거주했다. 그런데 ‘자이카타마치’는 농촌 지역에 존재하는 마치로 법적으로는 무라이지만 실제로는 구성원들이 상업을 하며, 일부 무사도 체재한 ‘향촌 도시’였다. 따라서 자이카타마치를 연구하는 것은 이념상 상업이 금지된 농촌 지역이 점차 도시화가 되어가는 양상을 검토하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본고는 기존 연구에서 자이카타마치를 지배 권력의 영향을 받기보다는 마치(町)의 주민이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공간으로 파악하는 점에 의문을 가지고 시작되었다. 이것은 1980년대 이후 일본 도시사 학계의 연구 조류가 그러했듯이, 자이카타마치에 관한 연구 역시 마치의 규약, 공간 구조, 주민 신분, 경제 활동, 사람들의 움직임 등 마치 내부의 사료들을 주로 분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부와 번의 지배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은 이상, 주민들의 자율성만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 자이카타마치도 막부와 번의 지배를 받고 성립・발전하였으므로 ‘지배’와 ‘자율’의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분석할 필요가 있다. 즉, 마치의 자율적 측면뿐만 아니라 ‘국가 권력’에 해당하는 막부와 번의 지배 정책과 그것이 마치에 끼친 영향을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본 연구는 오미야 향이 자이카타마치로 발전해가는 과정 속에 막부 정책의 영향과 아베 씨(阿部氏) 지배 시기 오시 번(忍藩)의 역할에 대한 검토를 시도해 보았다.
이상 살펴본 바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오시 번 번주 아베 씨는 역대 번주들이 막부 역직을 맡아 번주의 경비가 증가하여 번 재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금을 쌀이 아닌 현금으로 납부하는 지치부 령(秩父領 : 지치부 군의 오시 번령)은 오시 번의 중요한 현금 수입원이었다. 그 중 오미야 향은 지치부 령 전체 무라의 연공 금액에서 약 20%를 부담하고 있었다. 또한 오미야 향에서는 매년 상월대제(霜月大祭)와 함께 열리는 견대시(絹大市)에 여러 지방에서 사람들이 찾아와 많은 양의 견이 거래되었다.
오시 번은 오미야 향의 이러한 경제적 이익에 주목하고 견시와 제례에 개입하였다. 18세기 초에 번주 아베 마사타카(阿部正喬)가 지치부 령(秩父領)을 순행하고, 이후 교호 연간(享保年間 : 1716~1735)부터 오미야 향의 상월대제와 견대시에 관한 새로운 정책들을 펼쳤다. 이 시기부터 상월대제에 화려한 쓰케마쓰리(付祭)가 흥행되기 시작하고, 번에서는 매년 번주의 대리인을 파견하였다. 또한, 견대시의 단속을 위한 관리를 파견하고, 매년 와리야쿠(割役)에게 견대시의 거래량을 보고하게 하였다. 이후 견대시와 견시의 거래량이 증가하여 18세기 후반에는 전성기를 이루고 그와 함께 다른 상공업도 번성하게 된다. 그리고 이 시기에 오시 번은 오미야 향과 향내 부유한 주민들에게 어용금을 자주 걷었다. 즉, 오시 번은 번의 재정 확보를 위해 오미야 향을 주시하고, 이곳이 도시로 발전하는 데 역할을 했던 것이다.
한편, 막번체제는 이념적으로는 농민에게 상행위를 금지했지만, 병농분리의 전제, 참근교대제(參勤交代制)의 부담, 미납과 금납을 불문하고 연공이 재정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시장을 거칠 수밖에 없는 현실로 인해, 농촌 지역에서의 농민들의 상업 활동을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지배자가 농업과 상업 중 어떤 것에 중점을 두는지에 따라 정책의 차이가 발생했다. 오미야 향은 교호 개혁(享保改革), 다누마 시대(田沼時代) 중상주의 정책, 간세이 개혁(寬政改革)의 중농주의 정책 등 막부의 정책에 따라 번성하기도 하고 또는 경제적 타격을 입기도 했다. 특히 관동 지방에 있었기 때문에 견시에 관한 막부의 정책은 오미야 향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때 오시 번은 막부의 명령을 기본적으로는 따르고 있지만 번의 이익과 지치부 령의 안정에 불리한 정책이 시행될 경우에는 막부와 다른 정책 노선을 선택하여 오미야 향의 안정과 번영을 꾀했다.
이와 관련하여 본 연구에서 검토한 사례는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18세기 후반에 막부가 새로운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오미야 향을 포함한 무사시 국과 고즈케 국(上野國) 견시에 개회소(改會所) 설치령을 내렸는데, 오시 번이 막부의 명령을 묵살하는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이와 반대로 막부의 명령이 전달된 고즈케 국 서부에서는 대규모 잇키가 발생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막부의 명령을 전달받지 못한 오미야 향에서는 막부의 명령이 폐지될 때까지 오시 번에 갑자기 정지된 견시의 재개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대규모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오시 번은 회소 설치에 비판적인 입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지치부 령의 주민들로부터 걷는 연공 및 어용금이 주요 재원 중 하나였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막부의 명령을 따라 견시에 회소를 설치하고 견상인들로부터 세금을 걷게 되면 견의 가격이 자연히 상승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지치부 령 주민들에게도 타격을 줄 것이다. 따라서 오시 번은 오미야 향의 견시를 보호하기 위해 막부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사례는 19세기 초반에 막부의 풍속통제령으로 오미야 향의 쓰케마츠리(付祭)가 금지되어 오미야 향에 경제적 타격을 주자 오시 번 당국과 지치부 령의 다이칸(代官)이 쓰케마츠리가 다시 재개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움직인 것이다. 지치부 령 다이칸은 오미야 향 주민들이 청원서를 제출할 때마다 그것을 묵살하지 않고 오시 번청(藩廳)에 보내 번 관리들의 의견을 물었다. 번 당국에서는 오미야 향이 제례를 다시 할 수 있도록 지도하고, 쓰케마쓰리 재흥에 대해 막부에 문의를 하였다. 또한, 다이칸은 청원서에 들어갈 내용을 지도하고, 주민들이 작성한 청원서를 가필해주며, 쓰케마쓰리가 허가될 수 있으니 주민들에게 청원을 하도록 지시하라고 와리야쿠에게 내밀히 알려주기도 했다. 쓰케마츠리가 재개된 이후에도 막부에 의해 다시 금지될까 봐 화려하게 하지 않도록 고리부교가 오미야 향 주민들에게 주의를 주는 등 계속해서 오미야 향의 번성에 신경을 썼다. 이처럼 지치부 령 다이칸과 오시 번 당국에서 쓰케마츠리를 재흥시켜 오미야 향을 번영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아베 씨 지배 시기 오시 번은 지치부 령에 전매제를 실시하지 않았다. 이것은 ‘민(民)’과 이익을 다투지 않는 ‘인정(仁政)’이기도 했다. 오시 번도 마츠다이라 씨(松平氏)의 지배 시기에는 막말 개항으로 외국 무역이 개시되자 생사를 전매했지만, 적어도 아베 씨 지배시기에는 독자적인 '인정(仁政)'을 펼쳤음을 오미야 향의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지치부 사건은 시장의 격심한 변동에 따라 농민들이 궁핍한 상황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메이지 정부가 오시 번이 행했던 것과 같은 전통적인 관념의 '인정'을 베풀지 않았기 때문에 폭발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오미야 향은 막부의 정책들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고, 오시 번과 번의 관리인 지치부 령 다이칸은 오미야 향의 번성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즉, 오미야 향의 발전은 주민들의 ‘자치’보다는 번과 주민들의 ‘협치(協治)’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아베 씨의 지배 시기에 오미야 향의 발전 양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오미야 향 내부의 상황뿐 아니라 오시 번, 특히 다이칸의 역할과 동향, 그리고 막부 정책의 영향도 아울러 고려해야 할 것이다.
Language
kor
URI
http://hdl.handle.net/10371/15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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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lege of Humanities (인문대학)Asian History (동양사학과)Theses (Master's Degree_동양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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