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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胡十六國-北朝 后妃制度의 運用과 그 特徵 : The System of Empresses and Concubines in the Sixteen Barbarian States and Northern Dynasties
-皇太子妃의 不在와 多皇后 현상의 出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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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한수정

Advisor
박한제
Major
동양사학과
Issue Date
2012-02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Description
학위논문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동양사학과, 2012. 2. 박한제.
Abstract
五胡十六國-北朝시기 서로 다른 부족과 세력을 겨루거나 동맹을 맺는 과정에 있어서 여성의 존재는 필수적인 매개체였다. 부족장의 딸은 화친을 맺는 도구로 이용되었는데 이들은 통혼한 국가에서 后妃가 되어 본국을 대변하는 세력이 되었다. 통혼은 국가의 부침을 결정하고 중요한 사안이었는데 이것은 곧 后妃制度의 근간이 되는 요인이기도 하다. 본고에서는 五胡十六國-北朝의 后妃制度의 연구를 통해 두 가지를 규명한다. 첫 번째는 중원에 들어온 胡族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중원 왕조의 체제와 어떻게 결합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나가는지에 관한 것이다. 본고에서는 이와 관련해 北魏의 皇太子妃 不在 및 北朝의 多皇后 현상을 연구하였다. 두 번째는 后妃制度 연구를 통해 이 시기의 황실의 여성에 대한 연구의 폭을 넓혀 가는 것이다.
五胡十六國시기부터 시작된 胡族 간의 통혼은 隋가 통일할 때 까지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특히 五胡族은 部落, 王國, 皇帝國, 可汗國이라는 여러 단계가 혼재한 채 혼인 동맹을 맺었고 그 결과 비교적 동등한 단계에서의 통혼부터 기존의 중원왕조와 可汗國이 맺는 종류의 통혼까지 다양한 통혼이 발생하였다. 필자는 이 당시 통혼하는 公主를 사료용어를 사용하여 鄰和公主라 명명한다. 이들은 통혼을 통해 后妃의 지위를 얻게 되었는데 이 지위는 보장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것은 이들이 통혼한 국가에 가서 각각 친정세력을 대표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강력하게 형성되었던 모계권력에 대한 반작용으로 北魏에서는 子貴母死 라는 독특한 后妃制度가 등장한다. 子貴母死제도를 실행하는 데에 있어서 수반되는 문제 중의 하나는 皇太子妃의 존재에 관한 것이었다. 北魏에는 皇太子妃에 대한 기록이 없는데 이는 같은 시기 南朝에서 皇太子 책봉과 동시에 皇太子妃를 두는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北魏에서는 子貴母死 제도를 실행함에 따라 皇太子妃의 책봉이 따로 필요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皇太子妃가 존재해 후계자를 낳게 되면 子貴母死제도에 의거하여 皇太子妃를 희생시켜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지기 때문이었다. 또한 北魏 황실에서는 早婚하여 長子를 후계자로 세우는 것을 원칙으로 했기 때문에 皇太子妃를 세워 嫡子의 개념을 만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北魏 皇后의 출신 문제에 있어서도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시기마다 공통점이 있는데 북위 초기에는 皇后를 降胡집단 출신에서 뽑아 책봉하고 중기 이후에는 주변 민족에 정리되고 제국의 내적인 팽창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降胡 출신의 皇后를 세울 수 없었지만 일관적으로 胡族 출신의 皇后를 세운다. 즉 胡族 출신의 황후를 고집하는데 이러한 고의성은 孝文帝가 漢化政策의 일환으로 시행했던 漢族과의 통혼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孝文帝는 姓族詳定을 단행한 이래 鮮卑 8姓과 漢族 高門 4姓과의 혼인을 장려하고 자신도 역시 漢族 高門 출신인 後宮을 여러 명 맞이하였다. 孝文帝 이후의 황제들도 漢族 高門 출신을 後宮으로 받아들였지만 결코 皇后로 세우지 않았다. 公主나 宗室도 漢族과 혼인하였는데 이때에 宗室과 혼인한 漢族 여성들은 王妃의 칭호는 받을 수 있었다. 漢族 출신 황후를 꺼려했던 것은 北魏 황제들이 자신의 漢族化되어가는 혈통을 고려했던 처사라 추측할 수 있다. 子貴母死제도로 희생된 北魏 황제의 생모는 대부분 漢族이었다. 즉 北魏 황제들은 혈통상으로 胡族과 점차 멀어지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胡漢을 융합하는 제국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胡族 출신의 皇后가 더 필요했던 것이다. 豪族 출신의 황후를 더 선호하는 현상은 北齊에서 더 확연하다.
五胡十六國-北朝시기의 后妃制度 중 주목해야 할 다른 하나는 多皇后 현상이다. 즉 복수의 皇后를 세우는 현상으로 五胡十六國시기 前趙 그리고 北朝시기 北齊와 北周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세 국가 모두 국가의 이념에 근거하여 多皇后를 맞이하였는데 무엇보다도 정치적으로 多皇后를 세워 多頭政治를 구현하려고 했다. 北周 宣帝는 즉위 직후에 宗室 諸王을 숙청하는 동시에 자신의 심복으로 楊皇后의 아버지인 楊堅을 선택한다. 하지만 楊堅이 독주하지 못하게 여러 장치를 세우는데 그 중 하나가 多皇后를 세우는 것이었다. 尉遲逈의 손녀를 자신의 皇后 중의 한명으로 맞이하고 司馬消難의 딸을 靜帝의 皇后로 세운 것은 모두 楊堅을 견제한데서 연유한 것이다. 宣帝가 죽은 직후 尉遲逈과 司馬消難이 연합하여 楊堅과 대립한 사건을 고려하면 宣帝가 多皇后를 세워 多頭政治를 꾀했다는 것은 더 확실해 보인다.
五胡十六國 시대에 동맹 체제를 만들어가는 데에 있어서 친정세력을 기반으로 한 后妃의 득세가 심해지자 北魏에서는 외척세력을 배제하려는 목적으로 子貴母死제도를 만들는 것과 더불어 皇太子妃까지 두지 않았다. 반면에 北魏시대를 거쳐서 어느 정도 중국에 정착한 胡族 출신 국가였던 北周와 北齊에서는 과거 北魏처럼 외척세력을 무조건 배척하지는 않고 오히려 새롭게 多皇后를 두어 이를 이용하려 했다. 胡族이 중국에 진출하여 적응하는 과정에 있어서 보여주는 皇太子妃를 不在시키거나 皇后를 複數로 두는 것을 감행하는 행위는 과거 漢族 중심적인 분석에 의거하면 胡族的인 특징으로 낙후된 것만으로 판단이 되었지만 이 역시 胡漢의 문화가 결합하여 창출한 독특하면서 시대에 맞는 합리적인 선택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Language
kor
URI
https://hdl.handle.net/10371/154830

http://dcollection.snu.ac.kr/jsp/common/DcLoOrgPer.jsp?sItemId=000000002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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