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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증산계 종교운동 연구 : 차월곡의 보천교와 조정산의 무극도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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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박인규
Advisor
최종성
Issue Date
2019-08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증산 강일순월곡 차경석정산 조철제보천교무극도청음 이상호일제강점기민족종교독립운동
Description
학위논문(박사)--서울대학교 대학원 :인문대학 종교학과,2019. 8. 최종성.
Abstract
본 논문은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 1871-1909)의 종교적 가르침을 계승하여 그를 신앙하는 종단(宗團)을 창설한 창교주(創敎主)들의 종교 활동을 중심으로 신종교 운동의 역동적 전개와 그 종교적 특징을 이해하고자 한다. 한국종교사에서 증산을 교조(敎祖)로 하여 창시된 교단을 총괄하여 ‘증산교’, ‘증산계 신종교’, ‘증산종단’, ‘증산계 교단’ 등으로 칭해 왔다. 본 논문에서는 증산의 가르침을 봉행(奉行)한 창교주들의 후속 종교 운동을 ‘증산계 종교운동’ 또는 ‘증산 신앙운동’이라고 칭하고, 그것을 통해 창설된 종교 조직을 ‘증산종단’이라 하였다.
증산계 종교운동의 기원은 증산 강일순에 대한 신앙과 그의 가르침이다. 삼계대권의 권능을 주재하는 ‘일하는 하느님’으로서의 증산에 대한 신앙이 증산계 종교운동의 핵심 원천이었다. 이러한 증산이 세상과 창생을 구하기 위해 실시한 작업이 천지공사이다. 천지공사는 증산계 종교운동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적 교의이며 여타의 종교 신앙과 구별되는 증산계 종교운동만의 독창적 교리이다. 일제강점기 해원 이념을 기반으로 한 천지공사론은 신앙인들에게 민족의 구원과 민중 해방의 메시지로 다가갈 수 있었다. 또 증산은 천지공사 가운데 교운공사를 통해 자신의 참다운 계승자를 대두목이라 칭하고 이 대두목이 펼치는 종교운동을 진법이라 하였다. 이러한 진법을 수행할 때 신앙인들은 종교적 목적인 의통과 도통을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
증산계 종교운동은 교조인 증산의 권능과 교설을 토대로 그의 화천 이후인 일제강점기에 전개되었다. 일제강점기는 증산계 종교운동이 태동하여 성장 발전한 시기로, 해방 이후 전개된 증산계 종교운동은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증산종단을 자신들의 전사(前史)로 여기고 있으며, 적어도 그것을 비판적으로 계승하거나 그로부터 주요한 영향을 받은 운동이라고 강조한다. 따라서 증산계 종교운동에서 일제강점기는 초기 역사인 동시에 운동의 특성과 기틀이 형성된 시기이므로 증산 신앙운동을 연구하는 데 주요한 의의가 있다.
일제강점기 증산계 종교운동 가운데 가장 두각을 나타내며 발전한 종단은 월곡(月谷) 차경석(車京石, 1880-1936)의 보천교(普天敎)이며 그 다음 교세를 보였던 종단은 정산(鼎山) 조철제(趙哲濟, 1895-1958)의 무극도(无極道)이다. 월곡 차경석은 증산의 직계 종도로서 증산의 가르침을 근거로 포교에 힘쓰고 종단의 조직체계를 정비하며 단시간에 천도교의 교세에 상응하는 종단을 형성하였다. 3.1운동 실패 후 민족 해방의 염원이 좌절된 민중은 속속 보천교에 입교하여 조직을 구성하고 성금을 모으면서 보천교는 막대한 자금력과 신도를 보유한 조선의 거대 종단이 되었다. 월곡의 보천교 운동에 대한 연구 의의는 이처럼 민중의 대대적 호응을 받았던 종교 운동이었다는 점 외에 상당수의 증산종단이 보천교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에 있다.
보천교가 증산의 직계종도에 의해 창시된 종단인 데 반해, 무극도는 증산의 종도가 아닌 창교주의 종교체험을 통해 시작된 종단이다. 무극도의 창교주 정산 조철제는 계시와 득도의 경험을 바탕으로 무극도를 일제강점기 증산종단 가운데 보천교에 다음가는 교세를 지닌 종단으로 발전시켰다. 당시 언론은 무극도를 보천교의 후속 주자로 보천교와 견주어 논하였으며, 일경도 보천교 다음으로 무극도를 경계하며 주시하였다. 이 점에서 보천교와 무극도는 일제강점기 증산계 종교운동의 양대 산맥이라 볼 수 있다.
월곡은 1919년 교단의 조직을 체계적으로 정비하기 시작하였으며, 1921년에는 고천제를 실시하며 교단명을 ‘보화’라 천명하였고, 1922년에는 ‘보천교’라는 명칭으로 교단을 공개하였다. 이후 보천교는 전국적으로 교세가 확대되었지만, 1924년 시대일보 사건을 계기로 청음 이상호를 중심으로 한 신파가 혁신운동을 일으키며 보천교는 내홍에 휩싸이게 되었다. 월곡은 교단의 내분을 잠재우고자 일제와 조율하여 시국대동단을 조직하였지만, 친일 논란에 휘말리면서 언론의 비난과 민중의 지탄을 받게 되었다. 이후 보천교는 내홍과 해체의 역사를 그리게 되었다.
보천교 신파의 지도자인 청음 이상호와 남주 이정립은 지식인으로서 보천교의 교리 체계화에 기여하였다. 이들은 시대일보사를 인수하려고 하는 등 보천교를 조선 사회에 안착하려 하였으나 월곡과 의견을 달리하며 보천교 혁신운동을 전개하였다. 청음과 남주 형제는 증산의 언설을 담은 경전을 처음으로 편찬하고 교단을 창립하는 등 증산 신앙운동에 매진하였다.
정산 조철제는 배일사상가인 조부의 뜻을 받들어 일가족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던 도중 상제로 화현한 증산으로부터 계시를 받았으며 이것이 이후 정산이 증산을 신앙하고 교단을 창립하는 등 종교운동을 전개할 계기가 되었다. 정산이 1925년 창설한 무극도는 활발한 포교 운동을 전개하여 ‘제2의 보천교’라 불리며 보천교에 견주어지는 교단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유사종교단체해산령과 치안유지법에 따라 무극도는 1941년 해산되었다.
정산은 해방 후 부산을 중심으로 종교 활동을 재개하고 신앙촌을 형성하였다. 1950년에는 종단의 명칭을 태극도로 개칭하고 공부와 포교에 힘쓰며 교단의 기틀을 다졌으며, 1958년 우당 박한경에게 종통을 계승하고 별세하였다. 우당은 정산의 유명을 계승하여 10년간 태극도를 영도하다가 종교 활동의 중심지를 서울로 옮기고 대순진리회를 창설하였다.
Language
kor
URI
http://hdl.handle.net/10371/162340

http://dcollection.snu.ac.kr/common/orgView/000000158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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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ars in Collections:
College of Humanities (인문대학)Religious Studies (종교학과)Theses (Ph.D. / Sc.D._종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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