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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1907년 驛屯土 내 一進會 관련 분쟁의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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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김종준
Issue Date
2008-06
Publisher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Citation
奎章閣, Vol.32, pp. 185-212
Abstract
본고는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경리원 관련 자료 중에 일진회와 관련된 분쟁 사안들을 수집ㆍ정리해서 일진회 연구에 일조하기 위해 구상되었다. 본고에서 이용하고 있는 경리원 관련 자료는 주로 1905년에서 1907년 사이에 생산된 문서철들로 경리원과 지방관 및 수조관 사이에 오고간 보고서나 훈령, 또는 지역민들이 경리원에 올린 청원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자료에는 동시기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었던 단체인 일진회 관련 사항이 많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기존 일진회 연구에서 거의 이용된 바 없으며, 대개 황실 재정 정리라는 측면에서만 접근되었다.

일진회 관련 내용들이 문서철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어서 한데 모으는 작업이 여의치 않았던 사정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일진회에 관한 부정적 편견 때문에 자료 이용이 부진했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본고는 실증적인 면에서 일진회 관련 내용들을 한데 모으는데 치중하는 한편 관점의 측면에서도 선입견을 배제하고 최대한 역사적 실상을 드러내려고 하였으며 그 결과 다음 몇 가지 사실들을 규명해내었다.

첫째, 분쟁의 전모와 일진회민의 사회경제적 위상을 밝혀냈다. 자료의 구조 및 유통 방식 등을 명확히 한 후 일진회 관련 분쟁 209건을 추출하여 7개 항목으로 분류해간 과정을 서술하였다 지역별ㆍ시기별로 본다면 1905년에는 서북 지역을 중심으로 경리원에 부당한 행정 조치에 시정을 요구하는 ‘개혁적’ 성격의 분쟁이 다수였다면 1906년 이후에는 대표적으로 충청도 지역 등에서 이작ㆍ탈경 등 지역민들과의 충돌이 일어났으며 이는 ‘작폐적’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다. 사회경제적 위상의 경우 경기도 소장을 검토해보았을 때 신분적으로 기득권층은 아닌 자들 중에 경제적으로 부유하여 일진회를 빙자해 다른 빈민을 압박하는 경우와 가난한 弱勢者이면서 일진회에 참여하는 경우가 병존하고 있었다.

둘째, 일진회민의 개혁적 활동의 양상과 이들이 표방한 ‘문명화’의 언설들 및 이에 반발하는 지역민들의 주장들을 살폈다. 일진회는 잡세 혁파, 과도한 도조의 감액 등을 경리원에 요구했고, 여기에 호응하거나 반대로 일진회를 이용해 자선들의 이해관계를 해결하려는 지역민들도 생겨났다. 특히 평안도 지역에서는 공토의 잉여를 학교비에 보완하자는 주장이 줄기차게 제기되었는데 이는 ‘문명화’ 지향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즉 일진회민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고자 하면서 ‘자주독립’, ‘국민’ 등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곧 지역사회에서 일진회의 존재가 정당화되는 근거이기도 했다. 그라나 1906년 이후 일진회 세력이 약화되자 지역민들은 일진회민을 ‘작폐자’로 형상화하면서 일진회민들이 제창한 ‘국민’이 진정 공공적 성격을 띠는 것인지 따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러한 반발에는 신분질서, 권력관계가 뒤집히고, 소농들의 생존이 위협받으며, 외부인의 개입이 이루어지는 현실에 대한 불만이 개입되어 있기도 했다.
ISSN
1975-6283
Language
Korean
URI
http://hdl.handle.net/10371/645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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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ars in Collections: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규장각한국학연구원)규장각규장각 (奎章閣) vol.32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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