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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지식인 김병욱(1808∼1885)의 시세인식과 부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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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노대환

Issue Date
2001-06
Publisher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Citation
한국문화, Vol.27, pp. 247-284
Abstract
조선을 비롯한 동양 3국은 19세기 중반에 들면서 서양 자본주의 열강의 도전에 직면하였다. 결국 중국은 1839년의 제1차 중·영전쟁에 패배하여 당경조약을 체결하였으며, 일본은 1853년 4척 와 군함을 팔고 온 폐리 제독의 요구에 불복하여 1854년 미일화친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일본이 개항한지 10여년이 흐른 1866년에는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군함이 조선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함으로써 조선 역시 서양세력의 직접적인 도전에 직면하였다. 1862년 내부적인 모순이 임술민란으로 폭발한 데 이어 프랑스군의 침입까지 겹침으로써 조선 사회는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였다. 19세기 중반에는 위기의 심각성만큼이나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지식인들의 사상적 고민 또한 치열하였다. 김병욱은 그러한 치열한 사상적 고민을 하던 지식인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김병욱은 경세의식으로 일관한 인물이었다. 그의 경세론은 19세기 전반 지식인들 사이에서 활발하하게 진행되던 '孔門四科절충식 경세학풍의 연장선에 위치해 있었다. 의리학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거기에 반드시 정치적·경제적 관심이 보충되어야 한다는 것이 김병욱의 기본 사고였다. 太平의 정치가 실현되기를 꿈꾸었던 그는 정치적·경제적 기반의 안정을 통해서만 道를 밝힐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도의 퇴락을 초래한 원인을 분석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고민하였다. 『太平五策』은 바로 김병욱의 그러한 고민의 산물이었다. 김병욱은 문제의 근본은 내부에 있다는 內修論을 바탕으로 한 富强策을 역설하였으며 삼정을 중심으로 한 그의 개혁론은 후일 동도서기론의 단계로 확대되어 나갔다. 그런 점에서 김병욱은 19세기 전반의 경세사조가 19세기 후반 동도서기론으로 연결되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강렬한 救世의식에 비해 현실적인 처지는 너무도 미약하여 김병욱은 생전에 자신의 경세론을 시험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별로 갖지 못하였지만 사후 아들 金星圭에 의해 직접적으로 계승·실현되고 또 兪吉濬, 魚允中 등 후배 지식인들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김병욱의 경세론이 어떻게 수용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동도서기론의 변화과정을 해명하는 데 시사하는 바가 많을 것으로 기대하는데 이는 후일의 과제로 남겨둔다.
ISSN
1226-8356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66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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