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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명교체, 명청교체와 한반도
The Dynastic Change in China and the Korean Peninsula_With the Special Reference to the Political Change from Yüan to Ming and from Ming to Q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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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한명기
Issue Date
2010-02
Publisher
서울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
Citation
세계정치, Vol.12(동아시아 전통지역질서), pp. 61-97
Keywords
원명교체명청교체주자성리학임진왜란병자호란약체성 극복dynastic changes from Yüan to Mingdynastic changes from Ming to QingKorean peninsulaHan and barbariantrue balancer between China and Japan
Abstract
이 글은 14세기 후반~17세기 초반의 원명고체와 명청교체가 한반도에 미친 영향과 그에 대한 한반도의 대응 양상을 살핀 것이다. 원의 극심한 간섭 때문에 고려의 자주성은 훼손되었지만 그것은 무신정권의 종말과 무신들에 의해 실추되었던 왕권이 회복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 세계제국 원의 성세와 개방성을 목도했던 고려이 지식인들은 원제국을 긍정하고 중화로 인정했다. 한편 원명교체가 진전되면서 고려는 반원 개혁을 시도했고, 그 과정에서 성장한 사대부들은 주자성리학을 수용하여 개혁의 이념으로 활용했다. 정도전 등 조선의 건국 주체들은 한족왕조 명의 등장을 긍정했지만, 명은 조선의 요동에 대한 영토적 야심을 경계하면서 조선을 길들이려고 시도했다. 세종대 이후 명에 지성으로 사대했고, 명 역시 조선의 충순을 인정하여 양국 관계에는 안정되었다. 하지만 16세기 이후 조선에서는 송학 위주의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면서 명을 유일한 중화로 보는 한편, 일각에서는 조선 스스로 명을 넘어서는 또 다른 ‘중화’가 되기를 지향했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조명관계는 정상적인 ‘책봉-조공체제’에서 일탈했다. 명군의 참전을 계기로 명의 간섭이 심해졌고 조선의 자주성은 훼손되었다. 위기에 처한 조선 지배층은 명군의 참전을 ‘재조지은’으로 숭앙했고, 명은 왜란 이루 누르하치가 성장하자 조선을 이이제의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려 했다. 요컨대 재조지은은 명청교체기 조선의 외교적 행보를 제약했다. 요컨대 1636년의 참혹한 병자호란은 이미 임진왜란이 남긴 여파 속에서 배태되었던 것이다. 1644년 명의 멸망을 계기로 조선은 ‘오랑캐’청과 일본에 의해 포위된 형국이 되었다. 조선은 이미 망한 명을 추앙했지만, 현실에서는 청에게 순치되어 갔다. 일본에 대해서도 왜란에서 비롯된 원한을 접고 유화적인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는 원수(萬世不共之讐)’에서 조선이 ‘끌어안아야 할’우방으로 인식되는 기미를 보였다. 조선이 임진왜란을 계기로 폐쇄했던 왜관을 다시 복구해 주고, 통신사를 파견했던 것은 엄혹한 현실에서 비롯된 불가피한 미봉책이었다. 요컨대 중일 사이에 끼여 있는 조선이 원명교체, 명쳥교체기에 겪었던 엄혹한 역사적 경험을 고려하면 한반도의 약체성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과제인지를 새삼 절감하게 된다.
During the three hundred years which covers from the late 14th to mid-17th century, the mainland China saw the dynastic changes from Yüan to Ming and again Ming to Qing. The latter was the another transformation from the Han to the foreign tribe in terms of political initiative while the former was the change from the northern ‘barbarian’ to the Han tribe. As is well known, during the first change, Korean peninsula saw the fall of Koryŏ and the rise of the Chosŏn dynasty. The Chosŏn dynasty which was founded only after the beginning of the Ming dynasty in1368, was not able to be free when the elite tried to secure the foundation and establish its system. Moreover, in the late 16th century when the Chosŏn dynasty was passing the mid-point where its secured its system, there happened new indications of the dynastic change in the mainland China. Though the Chosŏn dynasty had a long span with its own reasons, it was not easy for it to deal with the two political turmoils in the mainland China. The Chosŏn intellectuals indoctrinated themselves with the Neo-Confucianism during the Yüan and Ming political change, and they were eager to be a “civilized,” or Chu-hsia people. That kind of eagerness was elevated while Chosŏn was experiencing the Hideyoshi invasion. In conclusion, the Neo-Confucian mind-set which was formed during the Yüan and Ming dynastic change was persistent in the consciousness and behavior of the Chosŏn intellectuals. Considering the various sufferings originated in the changes from Yüan to Ming and again Ming to Qing, it is indispensible for Korean peninsula to make strenuous efforts to be true balancer between China and Japan.
ISSN
1738-2440
Language
Korean
URI
http://hdl.handle.net/10371/94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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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ars in Collections:
College of Social Sciences (사회과학대학)Center for International Studies (국제문제연구소)세계정치(Journal of World Politics)세계정치 12(30집 2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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