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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호구정책과 문중형성의 관계 - 제주도 대정현 하모리 사례
Relationship between the Household Policy and Descendant Group Formation in Late Joseon Dynasty - Case of Hamo Village Daejeong County Jeju Is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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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김건태
Issue Date
2014-09
Publisher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Citation
한국문화, Vol.67, pp. 3-33
Keywords
Household RegisterHousehold PolicyDescendant GroupStatusClass Mobility
Abstract
18세기 무렵부터 양반들은 대체로 동성촌락에서 생활했고, 19세기 들어서는 상민들도 동성촌락을 형성해갔다. 그 결과 20세기 초에는 동성촌락으로 분류되는 마을이 전체의 52% 정도 되었다. 동성촌락을 이루며 생활하던 사람들은 서로 한 조상의 후손이라는 의식, 즉 同類意識이 매우 강했다. 경상도 안동 금계리 동성촌락에서 생활하던 金鎭華(1793~1850)는 후손들에게 “같은 마을에 거주하는 족친들은 촌수의 멀고 가까움에 관계없이 모두 한 조상의 후손이다. 있고 없는 것을 서로 나누며 근심과 걱정을 함께 하고, 하루에 비록 여러 차례 만나더라도 반드시 곡진하게 대하고 조금이라도 싫어하는 기색을 보여서는 아니 된다.”라고 훈시했다. 그리고 “宗黨들 끼리는 昭穆을 위졸 해야 된다. 비록 나이 어린 사람이라도 자신보다 存行이면 항상 공경하게 대해야 하며 감히 업신여겨서는 아니 된다.”고 가르쳤다. 이같이 조선후기 동성촌락에서 살아가던 양반들은 서로 동류라고 생각했으며, 족친의 서열을 정하고 門中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항렬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민인들이 동류의식을 갖는 데 조선후기 호적정책도 한몫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지하듯이 조선후기 호적에서는 시간이 흐를수록 幼學이 급증했다. 예컨대, 조선후기 단성현 법물야면 호적대장에 실린 主戶 가운데 유학 혹은 그와 비슷한 위상의 직역을 가진 사람의 비율은 1678년 6.7%, 1786년 20.2% 1882년 84.9%이다. 이같이 19세기 말이 되면 정부는 호적을 활용하여 대부분의 주호를 동류로 만들었다. 육지와 달리 조선후기 제주도에서는 同姓同本은 곧 동류라는 의식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970년대 제주도 촌락에 관한 최재석의 연구를 통해 조선후기 상황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당시 제주도에서는 한 마을에 거주하는 동성동본기리 같은 조상의 자손이라는 막연한 동족의식은 가지고 있었으나 항렬을 공유하지 않았고, 육지의 문중·종중의식과 같은 강한 집단의식도 공유하지 않았다. 그리고 뚜렷한 문중 조직이나 사업이 없었기 때문에 문중 일을 분담해서 처리하는 문장·유사 등의 역할 분화도 나타나지 않았다. 심지어 당내 친족 사이에도 뚜렷한 집단의식이나 결합성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기존 연구로 미루어 볼 때 조선후기 제주도 사람들은 동성동본이라는 이유만으로 서로 동류라고 의식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조선후기 제주도에는 혈연공동체의 발달이 매우 미약했음을 의미한다. 무엇 때문에 같은 마을에 거주하는 동성동본끼리도 강한 결집력을 보이지 못했을까? 혈연공동체의 미발달과 호구정책은 어떤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이것이 본 글의 문제의식이다.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 본 글에서는 18세기 후반~20세기 초 제주도 대정현 하모리 호적대장에 주목하고자 한다.

The government strictly managed Jeju island residents’ duty for the nation according to their status (jiyeok: 職役) until the 1870s. Therefore, residents’ class mobility-related various information can be obtained through Jeju island household register. In the 19th century, when the government imposed residents’ duty for the nation according to their status, based on the strict standard, the status of ancestors impacted their descendants the most powerfully. The status ascent of descendants, belonging to the middle class of free citizens, to the upper class was extremely difficult. To the descendants of the lower class of free citizens and slave servants, the way to ascend to the upper class of free citizens was actually closed. In Jeju island in the 19th century, the same clan living the same village did not even think they were the same kind of people having the same ancestors. The reason is that household register disturbed their unity. The household register in reality had more power than the ancestral gods. The household register was a fearful subject itself to the Jeju island residents in the 19th century, because, the government collected almost all the taxes, based on the household register. In late 19th century, the tax amount imposed upon the Jeju residents was enormous enough to shake their life basis. In such a situation, those who can escape from the tax pressure to some degree, tend to have privileged sense. In this regard, residents’ duty for the nation according to their status was more important than the fact of the same surname and the same family origin to the Jeju Island residents.
ISSN
1226-8356
Language
Korean
URI
http://hdl.handle.net/10371/950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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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ars in Collections: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규장각한국학연구원)Korean Culture (한국문화) Korean Culture (한국문화) vol.65/68(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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