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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건국과 고구려계승의식
Goryeo’s foundation, and its Consciousness of succeeding Goguryeo(高句麗繼承意識): Examination of the ‘Gung Ye(弓裔)’s Goryeo(高麗)’ No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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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윤경진
Issue Date
2014-12
Publisher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Citation
한국문화, Vol.68, pp. 143-179
Keywords
高句麗繼承意識弓裔前住平壤前高麗後高麗Consciousness of succeeding Goguryeo(高句麗繼承意識)Gung Ye(弓裔)Former Lord(前住)Pyeongyang(平壤)Former Goreyo(前高麗)Later Goryeo(後高麗)
Abstract
918년 王建은 弓裔를 밀어내고 즉위한 뒤 국호를 高麗라 하였다. 이로부터 고려 왕조는 500년 가까운 역사를 이어갔고, 태조 왕건은 고려 왕조의 출발로서 자리하였다. 주지하듯이 ‘高麗’라는 국호는 高句麗를 계승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고려 국호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로서 그 정체성을 직접 반영하고 있었다. 이러한 고려의 고구려계승의식은 여러 연구를 통해 보편적 이해로 자리를 잡았지만, 근래 중국이 東北工程을 통해 고구려를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하려는 데 대한 대응 논리로서 더욱 강조되었다. 하지만 고려의 고구려계승의식은 시각 전환과 내용 보완이 요구되는 부분이 없지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고려가 고구려계승의식을 기반으로 성립했지만, 그것이 고려 전 시기에 걸쳐 같은 내용과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명제가 유지된다고 하더라도 시기마다 상황에 따라 그것의 현실적인 표현 형태가 달라질 수 있고, 그것이 가지는 정치적 함의도 무게를 달리 할 수 있다. 역사계승의식 자체의 역사성에 대한 구체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기존 연구는 고구려계승의식 문제를 고려 일대를 아우르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경우가 많으며, 이를 하나의 논점과 맥락에서 규정하는 경향이 있다. 고구려계승의식과 관련된 다양한 시점의 자료를 포괄적으로 이용하면서 각각이 가지고 있는 내용적 논리적 차이를 소홀히 한 측면이 없지 않다. 그 결과 고려의 근원적 역사의식으로서 고구려계승의식이 부각되고, 반대로 특정 시기에 그것이 가지는 정치적·사상적 함의는 가려지는 문제를 낳고 있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고려 건국과 연계된 고구려계승의식의 수립 또한 보편적 이념으로서 정리하기 보다 일단 ‘건국기’라는 특정 상황과 연관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후 전개되는 고구려계승의식은 이로부터 유지, 혹은 변화의 맥락에서 그 의미를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고려 건국기 고구려계승의식의 역사성을 다루는 핵심 고리는 바로 弓裔이다. 왕건의 즉위는 같은 체제에서 국왕만 교체한 것이기 때문에 인적 제도적 기반은 궁예 정권의 연장에 있었다. 하지만 왕건의 고려는 궁예의 폐정을 명분으로 국왕을 교체하며 수립된 만큼, 이념적으로는 궁예를 철저하게 부정해야 했다. 사료에서 궁예의 폭정과 비상식적 행위가 강조된 것은 이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러한 이중성은 역사계승의식에도 그대로 투영되었다. 기존 연구에서 보편적으로 지적되듯이 ‘고려’라는 국호는 왕건에 앞서 궁예가 채용한 것이었다. 궁예는 이후 국호를 摩震과 泰封으로 바꾸었는데, 왕권 즉위 후 새 국호를 저하지 않고 궁예가 처음 사용했던 국호를 ‘복구’하였다. 궁예 자신이 고구려의 부흥을 외치며 나라를 세웠고, 왕건 또한 같은 기반에서 즉위의 명분을 마련하였다. 따라서 摩震 이후의 궁예는 고구려계승의식에서 이탈한 것이므로 부정되어야 할 부분이지만, 그 이전의 궁예는 사실상 왕건의 즉위와 동일한 의미를 띠고 있었다. 고구려계승의식에 관한 한 고려는 건국 당시 궁예의 이념과 경험을 분명하게 계승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왕건의 즉위와 관련해서는 궁예 계승을 배제해야 하는 만큼, 고려는 고구려계승의식에서도 궁예에 대해 ‘계승’과 ‘단절’이라는 이중적 속성을 띠게 되었다. 이 부분을 검토하는 것은 고려 건국과 연계된 고구려계승의식의 의미를 구체화하는 방안이 된다. 기존 연구에서는 고려와 고구려를 직접 연결하여 이해하는 구도로 집중함으로써 ‘궁예의 고려’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소홀하였다. 물론 논의 중에 ‘궁예의 고려’가 계속 언급되지만, 고구려계승의식의 내용을 실질적으로 규정하는 요소로서 주목하지는 않았다. 이 부분은 고려가 수립한 고구려계승의식의 본원적 출발점이 된다는 점에서 정치한 분석과 검토가 필요하다고 본다. 본고는 고려시대 역사계승의식의 전개와 관련하여 각 시기의 상황에 조응하는 역사성을 찾는다는 관점에 다른 첫 작업으로서 고려의 건국에 따라 수립된 고구려계승의식의 구체적인 내용을 ‘궁예의 고려’라는 요소를 통해 분석하려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기본적인 자료와 내용은 대부분 그 동안의 연구에서 다루어진 것이지만, 시각 변화에 따라 새로운 내용과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우선 2장에서는 고려를 궁예와 연결하는 이념적 고리로서 國號와 平壤 복구를 다룰 것이다. 이 두 주제는 고구려계승의식의 핵심 지표로 널리 지적된 것이다. 그런데 고려 국호는 궁예의 첫 국호를 회복한 것이고, 평양 복구 또한 궁예 초기의 정책 지향과 관련되어 있었다. 후자에서는 특히 西京에서 이루어진 齋祭의 문제에 주목할 것이다. 서경 齋祭는 始祖 인식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3장에서는 고려가 국호 계승의 이면에서 ‘궁예의 고려’를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살펴볼 것이다.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자를 자처하며 두 왕조를 ‘고려’로 포괄하면, 그 안에서 前·後의 구분이 나타나게 된다. 이 때 ‘前高麗’와 ‘後高麗’의 설정에서 ‘궁예의 고려’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여기에는 ‘계승’과 ‘단절’의 논리가 고스란히 반영된다. 또한 이것은 고려 내부의 인식과 더불어 이를 수용하는 중국의 시각에도 작용하였는데, 『高麗圖經』 및 『舊五代史』 · 『新五代史』를 비롯한 중국 史書를 통해 ‘궁예의 고려’에 대한 이중적인 인식을 구체적으로 파악해 보기로 한다.

Examined in this article is the Goryeo people’s consciousness of succeeding Goguryeo. It had a dual aspect to it, as such consciousness contained two separate notions: the sentiment of inheriting Gung Ye(弓裔)’s Goryeo, and the sentiment of breaking free from that. ‘Goryeo(高麗),’ the title of the dynasty was actually a reenactment of Gung Ye’s first choice for his own dynasty(which was later renamed to Taebong(泰封)), and the newborn Goryeo dynasty’s policies including the restoration of the Pyeongyang(平壤) city were all based upon philosophies that had been demonstrated by Gund Ye himself. Gung Ye was actually considered as the ‘Former Lord(前主),’ who, compared to the dynasty founder Wang Geon(王建), laid out the basis for the newborn dynasty. But there was an exactly opposite kind of sentiment as well, as it also was a historical fact that Wang Geon subverted Gung Ye because of all his unjustified use of force and brutality. Naturally there was a stance exhibited by the Goryeo people that tried to set oneself apart from Gung Ye’s legacy. At first, Gung Ye’s Goryeo was considered as the ‘Later Goryeo(後高麗),’ as opposed to Goguryeo(高句麗) which was considered as ‘Former Goreyo(前高麗),’ but the Goryeo governemtn made it its own official stance to consdier all the things that came before Wang Geon’s enthronement as part of Former Goryeo’s history, including the days of Gung Ye. This kind of dual perception of the Gung Ye period was reflected in the Chinese historical texts as well, as while they were recording the discontinuation of the Go House line(“高氏”), they also wrote that the line of Go was restored before the time of Wang Geon’s enthronement. Such documentation could also be construed as an act of intention to erase ‘Gung Ye’s Goryeo,’ and directly connect Goguryeo and Goryeo.
ISSN
1226-8356
Language
Korean
URI
http://hdl.handle.net/10371/95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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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ars in Collections: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규장각한국학연구원)Korean Culture (한국문화) Korean Culture (한국문화) vol.65/68(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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