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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청 황제 성절 축하와 건륭 칠순 '진하 외교'
Joseon's Commemoration of the Qing Imperial Birthdays and Special Embassies for the Qianlong Emperor's Seventy-sui Birthday in 17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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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구범진
Issue Date
2014-12
Publisher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Citation
한국문화, Vol.68, pp. 215-248
Keywords
조선의 대청 사행정조건륭제청의 만수절건륭 칠순Joseon embassies to QingKing JeongjoQianlong emperorQing imperial birthdaysQianlong's seventy-sui birthday
Abstract
누르하치를 계승하여 後金 정권의 두 번째 汗으로 즉위한 홍타이지는 天聰 원년(인조 5년, 1627년) 봄 조선을 침공(‘정묘호란’)하였고, 그 결과로 이후 약 십 년간 유지되는 후금-조선 간 ‘형제 관계’를 수립하였다. 홍타이지는 천총 10년(인조 14년, 1636년) 4월에 이르러 滿 · 蒙 · 漢 왕공 및 대신으로부터 ‘Gosin Onco Huwaliyasun Endringge Han’(한어로는 ‘寬溫仁聖皇帝’)이라는 尊號를 받고 국호를 ‘Daicing Gurun’(大淸國), 연호를 ‘Wesihun Erdemunnge’(崇德)로 바꾸었다. 명과 250년 가까이 책봉 · 조공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시기 명의 ‘再造之恩’을 입었던 조선으로서는 홍타이지의 ‘稱帝’를 인정할 수 없었다. 이에 홍타이지는 崇德 원년(인조 14년) 12월 조선을 재차 침공(‘병자호란’)하였다. ‘정묘호란’ 때와 달리 홍타이지는 이 전쟁을 親征으로 수행하였고, 마침내 이듬해 정월 30일(1637년 2월 24일) 三田渡에서 조선국왕 인조의 항복을 받아내고 말았다. 이로써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청의 조공국이 되었으며, 같은 해 4월의 謝恩使行을 필두로 대청 조공 사절의 파견을 시작하였다. 조선과 청은 외교문서의 교환을 비롯한 제반 외교 사안을 주로 사신의 왕래를 통해서 처리하였다. 따라서 사신 왕래에 대한 연구는 양국 관계 이해에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과 청 간의 사신 왕래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수준 높은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사신 왕래 일반을 대상으로 한 개괄적·총론적 연구 위주였기 때문에 자칫 시간의 경과에 따른 변화의 추이를 포착하지 못할 우려가 있었다. 그러나 근년 들어서는 특정 사안 관련 사신 파견이나 특정 사행, 또는 특정 인물의 사행 등에 초점을 맞춘 미시적·각론적 수준의 연구도 점차 증가하고 있어서 조선·청 간의 사신 왕래에 대한 이해의 심화 및 시기별 변화 추세의 파악을 기할 수 있는 방향으로 연구가 진척되고 있다. 이 논문 역시 양국의 사신 왕래에 대한 미시적·각론적 연구의 일환으로, 조선이 乾隆 45년(正祖 4년, 1780년) 乾隆帝의 七旬을 계기로 파견한 일련의 대청 사신 파견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명·청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는 表文과 方物의 진헌은 조선국왕의 의무 사항이었다. 이에 따라 명에 대해서는 聖節 표문·방물의 진헌과 賀禮 참석을 임무로 하는 성절사행을 매년 파견하였다. 그러나 입관 이후의 청에 대해서는 성절사행을 별도로 파견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 사실에 착안해서 보자면, 견륭제의 칠순에 대한 조선의 사신 파견은 일종의 ‘특사’ 파견이었다고 부르기에 충분하다. 이 논문에서는 당시에 이루어진 일련의 사신 파견 행위를 편의상 ‘진하 외교’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본격적인 고찰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하의 서술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제2장에서는 대청 정기사행과 대명 정기사행의 차이를 밝히면서 조선이 대청 성절사행을 따로 파견하지 않게 되는 경위를 서술할 것이다. 제 3장에서는 순치 이후 건륭 연간까지 조선이 청 황제의 생일을 어떤 방식으로 축하하고 있었는지 고찰해 볼 것이다. 제4장에서는 정기사행을 통한 칠순 진하, 건륭 45년 8월 13일의 만수절을 겨냥한 칠순 진하사행의 특파, 그리고 조선의 특사 파견에 대한 청의 전례 없는 우대에 감사하는 사은사의 별도 파견 등으로 이어지는 조선의 ‘진하 외교’ 전개 양상을 서술할 것이다. 끝으로 제5장의 결론에서는 건륭 칠순 ‘진하 외교’가 결코 우연적이고 돌발적인 에피소드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정조 연간 대청 외교의 경향적 특징을 단적으로 반ㄴ영한 것이었음을 지적할 것이다.
Starting from 1637, Joseon was required to send to Qing capital Shenyang regular embassies for three annual events in addition to the annual tribute mission: the imperial birthday, the winter solstice, and the New Year’s Day. In 1645, the Qing court, which then had moved its capital to Beijing. ordered the king of Joseon to combine all the regular embassies into one and to send a combined embassy at the New Year’s Day. Since then, the Joseon court did not send its official missions for the imperial birthdays. In this historical context, three special embassies that King Jeongjo dispatched in 1780, when the Qianlong emperor turned seventy-sui, deserve our attention. Firstly, when King Jeongjo sent a regular embassy for the New Year’s Day of 1780, he assigned to the embassy an unusual mission: Celebrating Qianlong’s u precedented longevity in Qing history. Secondly, Jeongjo dispatched a special embassy solely to commemorate Qianlong’s seventy-sui birthday on the thirteenth day of the eighth lunar month. Qianlong was highly delighted by this, and had the emissaries from Joseon come to Chengde and attend the celebrating ritual and feistivities there. Thirdly, Jeongjo sent an independent embassy to give thanks for the emperor’s favorable treatment to the embassy and special gifts for him. It is noteworthy that Jeongjo decided to send this independent embassy regardless of the fact that a regular embassy for the New Year’s Day of 1781 was scheduled to depart for Beijing only three days after. King Jeongjo did not dispatch these embassies because he was ordered to do so by the Qianlong emperor; Jeongjo did so out of his own volition. And a further of investigation of the embassies that Jeongjo sent to the Qianlong’s court in other years reveals that Jeongjo was attempting to cultivate a better relationship with the Qing court by dispatching special embassies as often as he could. Qianlong would repond to his actions of sincerity as a tributary king by granting special favors. It can be said that the Joseon court under King Jeongjo, having overcome, if not completely, the trauma it had to suffer in the 1630s, was at last steering toward a new stage in its relation with the Qing court.
ISSN
1226-8356
Language
Korean
URI
http://hdl.handle.net/10371/9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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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ars in Collections: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규장각한국학연구원)Korean Culture (한국문화) Korean Culture (한국문화) vol.65/68(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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