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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 조선의 농정 입법과 통계에 대한 지식국가론적 해석
Interpreting the Legislation of Agricultural Policies and Statistics of Colonial Korea through Knowledge State Theory: Focusing on the Implantation and Transformation of Imperial-Colonial Knowledge Sys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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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김인수
Advisor
정진성
Major
사회과학대학 사회학과
Issue Date
2013-08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농정(農政)통계지식생산양식지식국가인식체계인식폭력소작소작쟁의관습관행민법조선민사령조선소작조정령조선농지령사회성격논쟁사회구성체박문규인정식박문병우메 겐지로노무라 조타로쓰마가리 쿠라노조히사마 겐이치야마다 모리타로모리타니 가쓰미칼 비트포겔아시아적 생산양식론경성제국대학전향
Description
학위논문 (박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사회학과, 2013. 8. 정진성.
Abstract
일제하 조선의 농정 입법과 통계에 대한 지식국가론적 해석
- 제국 지식체계의 이식과 변용을 중심으로 -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대학원 김인수


본 연구는 식민지 조선의 농정(農政)이 어째서 1930년대에 접어들어 급속히 안정화되었을까라는 의문에서 출발한다. 1920년대에 들불처럼 타올랐던 급진적인 소작쟁의는 1930년대 접어들어 합법적․개별적․경제적 소작쟁의로 그 양태가 전환되었다. 1920년대에 혁명운동에 종사했던 식민지의 사회주의자들은 1930년대 중반 농정통계를 근거로 한 지식논쟁을 벌이는 전문가로 그 존재의 속성이 전환되었다. 어째서 이런 일들이 벌어진 것일까? 그 정치적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이 문제를 해명하려는 몇몇 시도가 있었지만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첫째, 식민국가의 폭력과 억압성에 주목한 연구들은 1930년대의 소작쟁의 가운데 대부분이 「조선소작조정령」(1932), 「조선농지령」(1934) 등 법적 수단에 의거하여 발생하고 해결되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둘째, 거시경제지표를 근거로 식민지 경제의 실질적 개선을 주장하는 연구들은 그것이 민족사회에 미친 영향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는 점에서 한계가 명백하다. 셋째, 식민지 농촌사회에 조합주의론을 적용하여 리더쉽 교체와 갈등의 제도화에 주목한 연구들은 실제로는 리더쉽이 공고하지 못했다는 반론에 직면해 있고, 어떻게 갈등이 제도화될 수 있었는지 그 모멘텀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본 연구는 식민지 농정에 내재된 인식폭력의 문제를 분석함으로써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려는 시도이다. 본 연구는 일제하 조선에서 식민국가가 농정 입법, 조사, 그리고 통계를 통해 강제한 인식체계와 이에 대한 식민지 지식인들의 비판의 흔적을 발굴하고 분석한 결과물이다. 이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본 연구가 새롭게 제안하는 연구방법론은 지식생산양식의 분석이다. 이것은 지식생산의 전제, 즉 아프리오리(a priori)를 계보학적으로 추적하고 해체하는 것이다. 지식의 생산과정에서 활용된 이론, 자료, 방법 각각의 참조체계(references)를 찾아내고, 그 이식과 변용 또는 연쇄와 전유의 흔적을 발굴한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지식실천이 낳은 정치적 결과를 확인한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얻어낸 성과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구한말 식민권력에 의한 농정의 실천은 메이지기(明治期) 근대 일본에서 만들어진 소작 개념을 강제적으로 이식하고, 이 개념의 범주에 기초하여 기존의 토지관습을 분류, 조사, 기입(inscription)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 전통사회의 이질적인 토지임차 관련 권리들이 소작이라는 개념으로 포착되어 균질화되었다. 전통사회에서 분할소유권의 성격을 지녔던 권리, 또는 계속 성장해오던 경작자의 권리는 식민국가의 입법과 조사의 실천에 의해 부정되고 박탈되었다. 이들 권리는 식민자(colonizer)가 강제한 소작 개념에 의해, 단순한 채권적 토지임차나 『메이지민법』(明治民法, 1898)에서 설정한 영소작으로 약체화되었다. 나아가, 이렇게 구성된 식민지 조선에서의 토지임차권의 법적 지위는, 등기 등의 실질적 실현 사례 등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일본의 그것에 비해서도 매우 열악한 것이었다.
조선통감부 이래 조선의 토지관습에 관한 조사를 주관했던 이는 우메 겐지로 박사로서, 그는 『메이지민법』의 입법을 주관했던 세 명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했다. 우메는 조선의 관습에 기초하여 식민지의 법을 만든다는 입법구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구상은 법원(法源)이 될 관습이 실은 취사선택된 관습이라는 진실을 은폐하는 정치적 실천에 불과했다. 『民事慣習回答彙集』의 분석을 통해 식민국가가 취사선택한 관습에 따라 재판을 진행했다는 사실, 『朝鮮高等法院判例錄』의 분석을 통해 실제로는 식민지 조선에서 『메이지민법』의 관행화가 진행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러한 정치적 실천을 통해, 소작 개념이 식민지 사회에 강제적으로 이식되었다는 사실은 망각, 은폐되었고, 소작 개념은 자명하고 당연한 것으로 자연화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가 가져온 정치적 결과는 다소 양가적이었다. 한편으로 그것은 전통적 권리관계가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과정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과정에서 근대적 의미의 소작계급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고, 1920년대 이후로 본격화된 소작계급의 정치도 가능했던 것이다. 이 단계에서 소작 개념은 이제 식민지 농정의 아프리오리로 전환되어버렸고, 질문이 투과할 수 없는 인식론적 장벽으로 고착되었다. 식민국가의 농정은 바로 이 인식폭력 위에서 성립될 수 있었다.

둘째, 식민국가는 제국-식민지 간의 비대칭적 권력관계에서 비롯된 여러 식민지 사회문제, 특히 1920년대의 소작쟁의의 확산과 급진화에 대처하기 위해 대대적인 소작관행조사를 실시했다. 그 성과는 『조선의 소작관행』(朝鮮の小作慣行, 1932)으로 수합되어 발간되었다. 이 보고서의 출현으로 인해, (1) 식민지 조선의 지주-소작관계는 간명한 통계수치로 계수화되었고, 사회갈등의 전선(戰線)은 현장으로부터 법의 제정과 통계를 둘러싼 논쟁의 장으로 전이되었다. 이로 인해, 1920년대의 비합법적, 혁명적, 집단적 소작쟁의는 1930년대에 합법적, 개량적, 개별적 소작쟁의로 전환되었다. 이것은 식민지 조선에서 지식국가의 권력효과가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이다. 또, (2) 부재지주와 소작지관리인이 식민지 농정파행의 주범(主犯)으로 범주화되었다. 이들 집단은 사회악으로 초점화되었고, 식민국가의 이미지는 주권 차원의 적(敵)에서, 이들 사회악을 규제하고 갈등을 조정하는 사회경제적 차원의 조정자로 전환되었다. 마지막으로 (3) 식민국가의 자작/소작 이분법 인식체계가 한층 공고화되었고, 자작농창정사업으로 대표되는 농정사업이 정당화되었다. 요컨대, 『조선의 소작관행』은, 소작 개념에 이어, 1930년대 식민지 농정의 인식체계를 규정한 또 하나의 아프리오리이자 인식폭력이었다.
이 소작관행조사는 1921년 일본에서 시행된 소작관행조사와 조사항목, 질문사항, 정리항목 등 많은 부분이 일치하고, 따라서 언뜻 보면 식민지에서의 그 반복에 불과한 것으로 평가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사결과가 공개된 이후 식민지의 민족언론에 의해 부재지주와 소작지관리인이 식민지 농정피폐와 생산력 저해의 직접적인 원인이자 공공의 적으로 지목되는 사태는 예견할 수 없었던 새로운 사태였다. 또, 1921년 일본의 소작관행조사의 결과에 기초하여 입안된 일본의 소작법안에서 소작지관리인에 대한 규제조항이 전혀 없었던 것과는 달리, 『조선의 소작관행』을 기초로 제정된 「조선농지령」(1934)에서는 소작지관리인에 대한 강력한 규제조항이 마련되어 있었다. 결과적으로, 식민국가는 민족 주권을 탈취해간 적(敵)의 자리에서 사회경제적 차원의 규제자․조정자의 자리로 옮겨갔던 것이고, 식민지 사회로부터의 직접적인 비난의 표적에서 벗어나는 예상외의 결과가 발생했던 것이다. 이것은 조선소작관행조사와 『조선의 소작관행』이 지닌 식민지적 특수성으로 평가할 수 있다.

셋째, 이렇게 자연화된 소작 개념과 『조선의 소작관행』의 권력효과는 식민지 지식장(場)에서 강력하게 작동했다. 식민지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은 「조선사회성격논쟁」을 통해, 식민국가와 그 지식기구가 구축한 일방적 농정담론을 비판했다. 단, 이들의 비판작업은 식민국가가 구축한 아프리오리 위에서만 진행될 수 있었던 것으로, 소작 개념의 인식론적 장벽을 넘어서지 못했고 『조선의 소작관행』에서 얻어진 계수화된 사회관계를 오히려 주장의 근거로 삼았다는 점에서 한계가 명확했다. 이들은 이 통계논쟁을 거치면서 혁명의 주체에서 개혁의 주체로, 혁명가에서 전문가로 주체속성이 전환되었다. 이것은 식민지 아카데미즘이 구성되어 출현하는 과정으로, 이 속에서 식민지 지식인들은 아카데미즘의 검열을 내면화하여 탈혁명화했다.
그러나, 이들은 이 전이된 투쟁의 장에서 암중모색하며 끈질기게 이론투쟁을 벌였다. 이들은 「일본자본주의논쟁」에서 구사된 마르크스주의의 이론과 방법론을 전유하여, 식민국가가 만들어낸 공공통계를 재해석하고 비판했으며, 식민국가에 대한 적대성(敵對性)을 복원해냈다. 「조선사회성격논쟁」에서 식민지 지식인들은 단순히 동아시아 마르크스주의의 결론만 취해온 것은 아니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그 짧은 시간에 그 비판의 방법, 즉 경작규모의 영세성(강좌파, 봉건파)과 생산성(노농파, 자본파)의 기준을 식민지 조선의 상황에 맞게 전유하여 비판의 문법을 창출했고, 수지가 맞지 않는 농가 등 새로운 범주도 구성하였다. 그들은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인 일급 이론수용가가 아니라, 이를 철저히 내면화하고 전유해간 이들인 것이다. 식민국가가 생산한 통계의 범주를 비판하는 동시에, 그 통계자료를 다시 자신들의 주장의 근거로서 능숙하게 활용하는 그 이론적 전유 행위는 이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이를 통해, 식민지 지식인들은 식민국가가 강제한 자작/소작 이분법 인식체계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데에 성공했다.

넷째, 식민지 지식인의 이론적 성취는 한층 더 진전되어, 「조선사회성격논쟁」의 당사자 가운데 한 명인 인정식의 경우, 식민지 조선 전체의 세분화된 토지생산성 지표를 그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내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인정식은 이전의 경작규모의 영세성의 기준을 버리고 토지생산성의 기준을 채택했다. 그는 이 생산성의 기준을 통해 일본-조선-중국을 비교했고, 동양농업의 분석에서 기존의 역사유물론(아시아적 반봉건론)을 폐기하고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정체사회론)으로 전환했다. 이 일련의 이론적 전회는 그의 정치적 전향(1938)과 맞물려 벌어진 사건이었다. 다시 말해, 지식생산양식의 관점에서 볼 때, 그의 정치적 전향은 이론적 전회와 동시적으로 발생한 사건이었다.
인정식은 토지생산성 지표를 조선 내부에 대한 분석에서 도출했지만, 중일전쟁의 진행 속에서 그 비교의 시선을 일본-조선-중국 간의 관계로까지 확장했다. 인정식은 중일전쟁을 문명(일본) 對 정체(중국)의 전쟁으로 해석했고, 타자에 대한 제국주의의 부당한 폭력을 방조하고 이에 동참하는 길로 나아갔다. 인정식에게, 제국주의의 부당한 폭력에 희생당하는 이웃의 존재는 간단히 외면되었고, 그 전쟁은 조선이라는 네이션(nation)의 발전의 계기로서만 의미화되었다. 그의 토지생산성 지표는 이러한 아(亞)제국주의의 논리를 정당화하는 과학적 근거로서 활용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인정식은 조선의 역사적 지위를, 그가 일본에 적용한 역사유물론(아시아적 半봉건론)이나, 중국에 적용한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정체사회론)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여 온전히 재현해낼 수 없는, 이른바 이중속박의 상황에 빠졌다. 특히, 인정식에게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을 직접 소개했던 경성제국대학 교수 모리타니 가쓰미는 조선이 그 이론의 적용을 받는다고 여러 차례 언급했는데, 인정식은 이에 대해 정확히 대답할 수 없는 궁지에 처해 있었다. 이것은 그의 이론적 실패를 보여주는 증거이며, 그가 이 실패를 정면에서 응시하기를 포기하고 제국주의 침략의 동조자가 되었다는 점을 근거로, 우리는 그에게 전향의 정치적 책임을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1930년대의 식민지 조선의 농정은 식민국가가 입법, 조사, 통계를 통해 구축한 인식체계의 권력효과에 의해 급속히 안정화되었다. 식민지 지식인의 담론생산도 이 인식체계의 영향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런데 조금 아이러니컬한 이야기이지만, 현재 한국학계의 「식민지근대화론 논쟁」은 1930년대의 「조선사회성격논쟁」과 자료, 방법, 논리의 측면에서 매우 동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점은 식민국가가 생산해낸 자료에 전제되어 있는 개념, 범주, 계수화의 권력효과를 충분히 응시하지 않는다면 비판적인 식민지 연구의 길은 요원한 것임을 시사한다.
Interpreting the Legislation of Agricultural Policies and Statistics of Colonial Korea through Knowledge State Theory:
Focusing on the Implantation and Transformation of Imperial-Colonial Knowledge System

Kim, In-Soo
Department of Sociology
Graduate School
Seoul National University


This study begins with the following question: Why did agricultural politics in colonial Korea suddenly begin to stabilize in the 1930s? Radical tenancy disputes which flamed up in the 1920s began to transform into legitimate, individual, and economic ones in the 1930s. The socialist who were engaged in revolutionary movements in the 1920s had become specialists who developed intellectual arguments based on agricultural statistics, converting from their past attribution. How did these transformations take place? What were the political implications?
There have been some attempts to unravel the peculiarity of this issue. First, those studies which placed emphases on the violence and oppression by the colonial state cannot fully explain the fact that the majority of the tenancy disputes in the 1930s were settled through legal procedures based on such laws as Korea Tenancy Regulation Law (1932, Chosunsojakjojungryoung) and Korea Farmland Law (1934, Chosunnongjiryoung). Second, those studies that argue for substantive improvement of colonial economy based on macroeconomic index fail to assess the effects on the Korean ethnic society and economy. Third, those researches that apply corporatism to the colonial agricultural society and focus on the leadership change and institutionalization of the struggles are faced by the counterargument that question the degree of leadership, and fall short in explaining the momentum of such institutionalization processes.
This study attempts to provide an answer to the above question by analyzing the issue of epistemological violence that existed within the agricultural politics of colonial Korea. The research analyzes the cognitive paradigm reinforced on colonial Korea by the legislative process, investigations, and statistics, as well as the traces of criticism made by colonial intellectuals.
This study suggests a new research methodology, namely the mode of knowledge production analysis. It genealogically tracks and unravels the presupposition of knowledge production, or a priori. First, each reference must be found for theory, materials, and methods that were used in the process of knowledge production, in order to discover the traces of implantation and transformation, or chain and appropriation. Then this must be followed by the understanding of political results that were generated by the sequence of intellectual practices. The findings of this study are as follows.

First, the practice of agricultural policies by the colonial power in the late Chosun Dynasty began by forcibly implanting the idea of tenancy which was created in Japan during the Meiji period, and within this category, they engaged with the classification, investigation, and inscription of the existent Korean customs. Within this process, the idea of tenancy replaced traditional Chosuns unique land lease system, homogenizing the land lease customs altogether. The rights of the farmers which were similar to shared ownership, even though it had been expanding in the traditional society, were rejected and deprived by the legislative and investigative practices by the colonial state. Within the framework of tenancy reinforced by the colonizer, these rights were degraded down to simple obligatory land-lease or long-term tenancy under the provision of the Meiji Civil Code (1898). Furthermore, as many remaining case records suggest, the legal status of leasehold rights in colonial Korea was poorly secured comparing to that of Japan.
As a judicial counselor of Japanese Resident-General of Korea, Dr. Ume Kenjirō conducted investigations regarding Koreas land customs, and he was also one of the three figures who oversaw the drafting of Meiji Civil Code. He had a legislative framework that would attempt to create colonial law based on Koreas own customs, yet this framework was nothing but a political practice that tried to conceal the fact that these were only selected customs useful for the colonial practices. The analyses of The Collection of Civil Customs Inquiry for Trial (Minsagwansuphoedaphyjip, Minjikanshukaitoishu) reveal that the colonial state held trials based on the selected customs, and The Collection of Precedents of Japanese High Court of Korea (Chosungodungbeopwonpallerok, Chosenkotohoinhanreiroku) sheds lights on the fact that the institutionalization of Meiji Civil Code did take place in colonial Korea. The fact that these political practices were the medium for coercive implantation of the concept of tenancy within the colonial society was not only forgotten and concealed but it also soon became understood as self-evident and even necessary (naturalized concept).
The political results brought by this chain of situations were rather double-sided. On the one hand, it was a process through which the traditional rights were demolished and reconstituted
yet on the other hand, this process also gave birth to modern peasantry, enabling the politics of peasantry to take place in the 1920s. At this point, the concept of tenancy had already been converted by the colonial agricultural policies, fixated by the epistemological barrier that would not permeate any reasonable questions. The agricultural policies of the colonial state were indeed constructed upon this epistemological violence.

Second, the colonial state conducted an extensive investigation on tenant practices in order to deal with a variety of social issues, especially the proliferation and radicalization of tenancy disputes in the 1920s, which were rooted in the unbalanced power relationship between the empire and the colony. The result of this investigation was collected and published in The Tenant Practices of Korea (1932, Chosennokosakukankō). This publication uncovers the following: (1) The landlord-tenant relations in colonial Korea was quantified by simple statistical data (calculability), and the front line of social conflicts was moved from the field of struggles to a place of disputes encircled by established laws and statistics. Through this, illegal, revolutionary, and collective tenant disputes of the 1920s were transformed into legal, refined, and individual tenant disputes in the 1930s. This symbolizes the power effects of the knowledge state in colonial Korea. In addition, (2) it was thought that the agricultural politics in colonial Korea was crippled by the absentee landlords and tenant land custodians. They were increasingly seen as social evil, and the image of the colonial state changed from sovereign enemy to socioeconomic mediator who would regulate these social evils and settle conflicts. Lastly, (3) the colonial state increasingly reinforced systematic dichotomy between land-own and tenant farmers, and the agricultural projects, typified by the project of transforming tenant to landowner, were justified. In short, The Tenant Practices of Korea did not only reinforce the concept of tenancy, but it was also a priori that regulated the cognitive paradigm of the agricultural politics of colonial Korea in 1930s—in other words, it was another form of epistemological violence.
This investigation on tenant practices significantly overlaps with the one conducted in Japan in 1921, therefore it can be argued that it was merely replicated in colonized Korea. However, it was unpredictable that, after the results had been made public, the people began to pinpoint the absentee landlords and tenant land custodians as public enemy who were the source of impoverished agricultural politics as well as production inhibition in colonial Korea. In addition, while Japans tenancy laws that were written based on the result of investigations in 1921 did not include any restrictive terms against tenant land custodians, Korea Farmland Law (1934), which was enacted based on the results shown in The Tenant Practices of Korea, included tight regulations on the tenant land custodians. As a result, the colonial state who had robbed national sovereignty became a regulator/mediator of social disputes on the socioeconomic level, unexpectedly escaping from direct criticisms by the colonial society. This phenomenon can be recognized as colonial peculiarity derived from the investigation on tenant practices in colonial Korea as well as The Tenant Practices of Korea.

Third, this naturalized concept of tenancy as well as the power effects of The Tenant Practices of Korea strongly functioned within intellectual sphere of colonial Korea. Through Korea social formation controversy (Chosunsahoeseunggyuknonjaeng), socialists of colonial Korea - Park Mun Gyu, In Jeong Sik, Park Mun Byung etc. - criticized the one-sided discourse on agricultural politics of the colonial state as well as its intellectual institution. However, these criticisms only developed within a priori established by the colonial state, and were unable to overcome the epistemological barriers surrounding the concept of tenancy—their limitation was also clear in that their criticism was based on the social relations that were factored within The Tenant Practices of Korea. Along with the statistics disputes, these criticisms transformed from the agent of revolution to that of reformation, and the revolutionists became specialists. This was the process within which colonial academism was constructed, and within this framework, the colonial intellectuals internalized the academisms censorship and de-revolutionized.
And yet they continued to engage with theoretical arguments within the misguided framework of disputes. They appropriated the Marxist theories and methodologies used by Japan capitalism debate, re-interpreted and criticized the public statistics created by the colonial state, and even restored the animosity against the colonial state. In Korea social formation controversy, the colonial intellectuals did not simply bring in mere conclusion of East Asian Marxism. Surprisingly enough, within a short time frame, they adapted and appropriated the methodology of criticism, such as the small-scaled cultivation (kōzaha) and productivity (rōnōha) standards, and even constructed a new category such as deficit farms. They were not mere first-class absorbers of Marxist theories, but they comprehensively internalized and appropriated them. This is also shown by the fact that this theoretical appropriation, which was concurrent with their criticism against the statistical categories produced by the colonial state, also utilized the states statistical documents in developing their own arguments. Through this, the colonial intellectuals succeeded in uncovering the imaginariness of systematic dichotomy between land-own and tenant farmers reinforced by the colonial state.

Fourth, the theoretical accomplishment of the colonial intellectuals even went further, In Jeong Sik, who was one of the central figures among Korea social formation controversy, created his own segmentalized land productivity index for the entire farmland of colonial Korea. In this process, In Jeong Sik discarded the prior small-scaled cultivation standard, and adopted land productivity standard. Using this criterion of land productivity, he compared Japan, Korea, and China, and through these analyses of eastern agriculture, he discarded historical materialism (or the theory of Asiatic semi-feudalism) and replaced it with the theory of Asiatic mode of production (AMP). This theoretical inversion occurred concurrently with his political conversion (1938).
In Jeong Sik first developed land productivity index through domestic analyses, then, as the Sino-Japanese War began to advance, extended the comparative axis to Japan-Korea-China relations. He interpreted the Sino-Japanese war as a war between civilization (Japan) and stagnation (China), and went on to argue for the abetment and participation in the unjustified violence by the imperial power. In Jeong Sik simply ignored the neighbors who easily became the victim of such violence, and the war became meaningful as an opportunity for the development of the nation of Chosun. His land productivity index was used as scientific evidence that justified the logics of imperialism.
Within this process of establishing historical status of colonial Korea, however, he became doubly contained between historical materialism (which he applied to Japan) and the theory of Asiatic mode of production (AMP) (which he applied to China), both of which failed to fully accomplish the task on its own. In particular, even though Kasumi Moritani, a professor at Keijō Imperial University who first introduced him the theory of AMP, had repeatedly implied that the theory applies to the case of Korea, In faced a predicament of being unable to counter this argument. This proves his theoretical failures, and for he gave up on contemplating on this failure, we can require a political responsibility of conversion to him.

In short, the agricultural politics of colonial Korea in the 1930s was rapidly stabilized due to power effects of cognitive paradigm which was constructed by the legislative process, investigations, and statistics of the colonial state. This cognitive paradigm also affected discursive practices of the colonial intellectuals.
It is ironic that the controversy over the colonial modernization theory that has been in existent within Korean academia for some time takes quite similar forms in documents, methods, and theories with Korea social formation controversy of the 1930s. This implies that the critical researches on colonialism require full consideration of the power effects of the concept, categories, and factoring process that have been the premise of those documents produced by the colonial state.


Key Words:
Agricultural Policy, Agricultural Politics, Statistics, Mode of Knowledge Production, Knowledge State, Knowledge Power, Cognitive Paradigm, Epistemological Violence, Tenancy, Tenancy Disputes, Customs, Practices, Civil Code, Korea Civil Affairs Ordinance (1912, Chosunminsaryoung), Korea Tenancy Regulation Law (1932, Chosunsojakjojungryoung), Korea Farmland Law (1934, Chosunnongjiryoung), Korea Social Formation Controversy (Chosunsahoeseunggyuknonjaeng), Social Formation, Park Mun Gyu, In Jeong Sik, Park Mun Byung, Ume Kenjirō, Nomura Chōtarō, Tsumagari Kuranojō, Hisama Kenichi, Yamada Moritarō, Moritani Katsumi, Karl Wittfogel, Asiatic Mode of Production (AMP), Keijō Imperial University (Keijōteikokudaigaku), Conversion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20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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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ars in Collections:
College of Social Sciences (사회과학대학)Dept. of Sociology (사회학과)Theses (Ph.D. / Sc.D._사회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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