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blications

Detailed Information

근현대 韓國人의 터키관 : The Korean Perspective of Turkey throughout Modern History

Cited 0 time in Web of Science Cited 0 time in Scopus
Authors

크란 스벨

Advisor
김태웅
Major
사범대학 사회교육과
Issue Date
2017-02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터키관청년튀르크당개혁입헌케말 파샤6·25전쟁반공 혈맹형제의 나라
Description
학위논문 (박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사회교육과, 2017. 2. 김태웅.
Abstract
國文抄錄

본 논문은 한국 근현대 시기 출판된 터키 관련 자료를 분석하여 한국인의 터키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았다. 아울러 그 인식의 방향이 시대와 논자에 따라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근현대 국제 정세 속에서 터키의 경우를 타산지석으로 삼았던 한국인들의 세계관을 엿보았다.
한국과 터키의 교류는 6세기경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관계는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조선 시기까지 부단하게 계속되었다. 조선은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외부 세계와 직접 접촉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고, 중국의 서적 등을 통해 외래 문물을 간접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외부 세계에 대한 정보나 지식이 미흡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당시 한국인들은 19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터키를 인지하였다. 한국인들은 중국의 정치가들이 보낸 편지를 통해 터키의 국제 정세를 알게 되었으며, 특히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계기로 터키의 처지에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지적했을 때 터키의 처지를 개략적으로 언급했는데, 한국인들의 터키관은 갑오개혁과 광무개혁기를 거치면서 더 구체적으로 형성되어 나갔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는 한국의 개혁론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한국인들은 일본이 문명개화를 추진했기 때문에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보고 일본과 같이 서양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한국 정부와 문명개화론 계열의 개혁론은 서로 달랐다. 대한제국 정부와 문명개화론자들의 사상적 분열은 그들의 세계 인식 및 터키 인식에서도 나타났고 터키관에 대한 分化는 이 시기부터 시작하였다. 정부가 자국처럼 전제국인 터키를 우호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던 반면에 문명개화론자들은 터키에 대해 문명을 발전시키지 못한 야만국가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터키관에 대한 분화는 통감통치기부터 더욱 뚜렷해졌다. 문명개화론 계열과 國粹保全論 계열의 식자층이 러일전쟁 이후 변화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대한제국이 어떠한 위기에 처해 있는가를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세계 각국에서 노정한 정치외교의 변동 상황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목적을 위해 그들이 예시한 것은 모두 과거의 전제국가들이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터키를 하나의 사례로 삼았지만 터키에 대한 인식에서는 서로 다른 면모를 보였다. 즉 문명개화론자들의 터키관이 터키를 야만국가로 규정하는 것이었다면 국수보전론자들은 청년튀르크당이 애국심으로 일으켰던 정치체제 개혁에 주목하였고, 그에 따라 터키를 우호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이러한 한국인들의 터키관은 3·1운동 이후에 또 다른 양상으로 진전하였다.
3·1운동 이후 한국의 식자층은 터키인들의 입헌국가 수립 과정에 초점을 두었다. 그들은 입헌국가의 수립을 위해 필요한 것이 독립전쟁이라고 생각했으며 터키의 독립전쟁과 새로운 정치체제의 구축에 주목하였다. 이러한 사람들은 주로 국외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이었다. 그들은 국외에 있어서 독립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자유롭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민족운동의 방책을 모색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반면 국내에서 실력양성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터키의 성공을 그들의 정치 변화에서 찾았으며 터키의 입헌체제의 변화와 근대화에 초점을 두었다. 이 과정에서 터키를 입헌국가로 바꾸고 서구적 근대화를 일으킨 케말 파샤가 모범의 대상이 되었다.
1920년대 초반 한국의 식자층은 케말 파샤를 그리스와 전투에서 애국심으로 승리를 이끈 위대한 장군이자 독립 전쟁의 영웅으로 인식했다. 1924년에 새 터키의 성격을 가늠하는 공화국 헌법이 공포된 이후 한국인들은 케말 파샤를 전제정치를 무너뜨린 위대한 정치가, 서구식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획기적인 근대화를 이끈 위인으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1930년대에 들어와서 국제정세의 변화로 케말 파샤를 바라보는 시각이 바꾸게 되었다. 1929년 세계 경제공황이 발생하자 위기를 맞은 일본은 1931년에 만주사변을 도발하여 중국 침략을 본격화하면서 파시즘 체제로 변화했다. 이제 한국인들은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의 정책과 방침을 소개하고 그 통치에 협조하는 논조로 글을 써야 했다. 1930년대 한국인들은 케말 파샤를 독재자로 언급했으며 그를 파시즘의 원조로 알린 무솔리니, 히틀러 및 세계의 중심인물들과 같이 보도했다. 이처럼 3·1운동 이후 광복까지 한국의 식자층은 시기마다 케말 파샤를 다르게 인식했다.
한편 터키의 문화에 대한 인식에서도 변화가 나타났다. 케말 파샤를 통해 수립된 입헌국가 터키는 근대적 법률의 도입, 교육 체제의 규정, 문자 개혁, 일부다처제의 폐지, 여성에 대한 개혁, 성씨 제도와 같은 수많은 개혁으로 혁명적인 변화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들은 1924년 이후부터 실시되었기 때문에 3·1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터키를 야만국가로 인식했던 일부 인사들은 기존에 그들이 지녔던 인식을 고수하여 터키를 전제국가로 평가했다. 그들이 터키를 전제국가로 보았던 인식의 저변에는 기독교 사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1920년대 초반 터키 공화국의 수립과 극적인 개혁들로 인해 기독교 계열의 식자층의 터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반영한 기사들이 점차 사라지게 된 반면에 터키의 급격한 변화를 주목한 기사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여기에서는 전제국이었던 터키가 혁명 이후에 현격하게 변화했다는 점이 주목되었으며 터키 국민의 자유를 강조한 기사들도 강조되었다.
1930년대 한국의 식자층은 조선총독부의 동화정책이 진행되던 상황에서 민족문화의 보존과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그 일환으로 터키에서 여성에 대한 개혁, 문자 개혁, 교육 체제의 규정, 성씨 제도 등을 모범으로 보여주었으며 한국 문화의 발전과 독립에 대한 희망을 암시하는 기사를 수록하였다.
한국인의 터키관은 광복 후에 또 다시 변화를 맞이하였다. 터키 정부는 1949년에 대한민국정부를 승인하였고, 1950년 7월에 6‧25전쟁 참전을 결정하였다.6․25전쟁은 한국과 터키의 정부 및 국민들에게 호의와 친밀감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1957년 양국 간에 공식적인 외교관계가 수립되었고, 1958년에 터키 수상인 아드난 멘데레스(Adnan Menderes)가 한국을 공식 방문했다. 멘데레스 수상의 한국 방문은 한국 언론에서 비중 있게 보도되었으며 양국의 반공 혈맹 관계가 강조되었다.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정권에서 물러난 뒤, 공교롭게 터키에서도 멘데레스의 독재에 항의하는 시위가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터키에서 멘데레스는 이승만이 물러난 바로 그 해 5월 27일에 무혈 쿠데타로 정권에서 축출되었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정치체제의 변화에 따라 한국인들의 터키관도 바뀌어 갔다. 1960~1970년대에 한국과 터키에는 독재정권이 수립되었다. 박정희의 군사 정권 시기에는 한국의 언론사들이 심대한 언론 통제를 겪었다. 대부분의 언론들은 독재 정권에 가담하거나 혹은 언론 탄압을 받아 친정부적인 기사를 쏟아내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한국인들은 6․25전쟁 이후 멘데레스 수상에 대해 감사와 우정을 표현하던 것과 달리 1960년대에는 멘데레스 수상의 정책을 비판하고 새로운 대통령인 제말 규르셀(Cemal Gürsel)을 찬양하는 태도를 견지하였다. 제말 규르셀은 군인 출신이고 군사 쿠데타를 주도했기 때문에 역시 군인 출신으로 집권에 성공했던 박정희와 규르셀을 동일시하였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당시 터키의 군인 출신 대통령과 수상이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또한 친정부 지지자들은 터키의 근대화 발전에 주목하여 그 근대화 달성에 공로가 많은 것으로 알려진 케말 파샤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이러한 케말 파샤의 행보는 곧 한국의 박정희가 걸어가야 할 근대화의 모범 사례로 제시되었던 것이다.
한국과 터키는 6․25전쟁을 계기로 혈맹 국가로서 강한 유대감을 갖고 양국관계를 발전시켜 왔다. 양국은 정치, 경제, 문화 분야에서 긴밀한 동반자 관계를 발전시켰다. 특히 터키는 언어, 생활습관 등 역사·문화적인 측면에서 한국과 유사성을 갖고 있었다. 이에 기반하여 한국인들은 터키를 여러 분야에서 소개하고 본받아야 할 대상으로 제시하였다.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은 터키를 반공 혈맹 국가로 인식했다. 반면, 터키는 한국에 대해 역사적·문화적으로 유사점을 갖는 형제의 국가와 혈맹 국가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970~1980년대를 거치면서 한국의 언론에서도 터키와의 역사와 문화적인 친연성을 강조하는 움직임들이 나타났다. 이런 가운데 한국인들은 종래 반공 혈맹으로 인식했던 터키를 역사적·문화적·언어적으로 유사한 관계에 있는 동족, 즉 형제의 나라로까지 간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양국의 친밀한 관계와 형제의 나라 인식은 2002년 월드컵 경기를 계기로 해서 더욱 공고해졌으며, 오늘날에 형제의 나라라는 개념을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다.

주요어: 터키관, 청년튀르크당, 개혁, 입헌, 케말 파샤, 6·25전쟁, 반공 혈맹, 형제의 나라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20623
Files in This Item:
Appears in Collections:

Altmetrics

Item View & Download Count

  • mendeley

Items in S-Space are protected by copyright, with all rights reserved, unless otherwise indicated.

Sh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