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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 古代 境界 出入과 그 性格 變化-通過祭儀에서 通行許可制度로-
中國古代境界出入與性格變化-從通過祭儀到通行許可制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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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송 진
Advisor
金秉駿
Major
인문대학 동양사학과
Issue Date
2012-08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境界移動境界 出入空間 支配郡縣 支配禮物 贈與饗禮接賓 儀禮身分 證明符節官印證憑祭儀法制通過祭儀通行許可聖域宗廟封疆國境呪術的 權威世俗 君主出入 管理通行證
Description
학위논문 (박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동양사학과, 2012. 8. 金秉駿.
Abstract
中國 古代 空間 支配의 性格은 戰國時代 이후 古代國家가 성립하면서 크게 변하였다. 본 연구는 呪術的 權威와 祭儀에 기초한 初期國家의 空間 支配가 法制와 官僚 行政을 근거로 한 古代國家 등장 이후 어떻게 변하였는가를 境界의 存在 形態와 境界 出入 管理 問題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지리상에 형성된 政治的 境界는 해당 시기 空間 認識이나 空間 支配의 性格을 반영하며, 境界 出入 管理는 실질적인 空間 認識이나 空間 支配 原理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특히 境界를 出入하는 사람의 移動은 서로 다른 세계를 넘나드는 행위로서, 文化나 物資의 교류와 달리 두 세계의 실제적인 만남과 접촉을 전제로 한다. 또한 사람이 境界를 出入하기 위해 필요한 節次와 그 形式은 한 社會에 존재하는 他界와 他者에 대한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본 硏究는 中國 古代 國家 發展 段階에 따른 空間 支配의 性格 變化와 그 實際的 運營 原理를 확인하기 위해, 商周時代부터 秦漢時代까지 境界의 形態와 境界를 出入하는 사람의 移動 問題를 분석 대상으로 삼아 初期國家 단계의 空間 認識과 空間 支配의 특징이 古代國家 등장 이후 어떻게 변화·계승되었는가를 살펴보았다.
春秋時代까지 都城의 중심에는 宗廟와 宮이 위치하였고, 이 宗廟와 宮은 정치적 핵심 공간이었다. 특히 春秋時代까지 宗廟·宮의 위치와 기능은 중첩되거나 거의 혼연일치되었고 祭·政은 분리되지 않았다. 西周 및 春秋時代 宮은 宮廟라는 명칭에서 보듯이 군주의 居處이자 祖神을 모신 宗廟였다. 宗廟와 宮은 祖神과 氏族 共同體가 占卜과 祭祀를 통해 교통하는 神聖한 空間이자, 策命·接賓·出征과 出行 報告 儀式 등 國의 大事를 거행하는 정치적 중심지였다. 甲骨文 중 大邑, 天邑商, 商은 四方·四土의 가운데 위치한 區域으로서, 사실상 商王의 정치적 中心地인 王都를 의미하였다. 비록 西周 金文 중 京師의 구조를 직접적으로 언급한 내용은 없지만, 京師의 중심에는 宗廟가 위치하였다. 周 王室의 宗廟는 그 分族이 세운 諸侯國의 宗廟와 儀禮的으로 연결되었고, 諸侯國의 政治的 中心地 역시 都城의 宗廟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春秋時代 都城에도 그 中心에는 宗廟가 위치하였고, 宗廟는 國의 大事를 집행하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하는 정치적 핵심공간이었다. 특히 宗廟에서 祖神과 교통하며 그 加護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宗廟가 있는 都城은 각종 災禍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자 일종의 聖域으로 인식되었다.
春秋時代 周 王室의 권위가 몰락하고 列國 간의 대립이 시작되면서, 인접한 國 간에 邊邑의 소유를 둘러싼 분쟁이 종종 발생하였다. 당시 邊邑에 속한 토지의 境界를 의미하는 封疆은 수시로 변하였고, 封疆은 제후들이 定界하기도 하였지만 상대국을 무력으로 취한 國에서 직접 定界하기도 하였다. 春秋時代 封疆은 邊邑에 속한 토지의 범위를 정한 境界로서,西周 以來 土地나 封地의 定界 형태와 같이 자연 지형이나 溝·隄 혹은 樹木을 기점으로 定界한 境界에 해당한다. 封疆은 他國과의 관계에서 自國의 外緣으로 인식되었고, 國의 出·入을 구분하는 하나의 기준이었다. 물론 封疆 이내 지역 모두가 一國의 소유로서 단일한 관할 권역에 속한 것은 아니다. 당시 鄙邑에 대한 公室의 지배력은 공고하지 않았고, 封疆 內部 지역에는 國에 속하지 않은 집단 역시 존재하였다. 이런 점에서 春秋時代 封疆은 배타적인 支配 空間의 범위를 표시한 國境이라기 보다 邊邑에 속한 土地의 境界이자 宗廟·社稷 神의 領護가 미치는 범위로서 관념상의 國境이었다.
한편 商王은 수시로 出行하여 商에 복속하거나 동맹한 자들을 관리하였다. 商王은 商邑을 出入할 때 移動 날짜와 장소 등을 자세히 점쳐서 그 吉凶 여부를 확인했는데, 다른 사람이 商邑을 出入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商王이 商邑을 出入할 때도 神意를 묻는 占卜을 행하였던 이유는 商邑이 商王이 아닌 神이 관장하는 空間이었기 때문이었다. 商邑 밖의 지역 역시 각각의 神이 관장하는 공간으로 인식되었고, 이 때문에 商王을 포함하여 외부에서 商邑으로 들어올 때는 부정한 요소가 내부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占卜을 행하여 出入의 可否를 결정하였다. 西周時代 사람의 往來는 크게 王都와 다른 지역 간의 移動으로 구분된다. 王都의 방문은 대개 謁見·冊命·祭祀 등의 의식을 행하기 위해서였는데, 이런 의식은 주로 王都의 핵심 공간인 宮이나 宗廟에서 진행되었고 사실상 先王의 祖靈 앞에서 행하는 祭儀의 형식을 띠고 있었다. 王都에서 諸侯國에 파견된 使者와 그에 대한 儀禮 절차는 2009년 山西省 翼城 大河口에서 발견된 尙盂 銘文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周王은 霸國 伯尙의 공로를 치하하기 위해 伯考를 使者로 파견하였고, 霸伯 尙은 伯考를 賓으로 맞이하여 여러 가지 의례를 행하였다. 諸侯國에서 接賓하는 절차 역시 기본적으로 宗廟에서 행하였고 祭儀의 형식을 띠고 있었다. 이렇게 商周時代 王都와 다른 지역 간의 往來는 宗廟를 중심으로 형성된 神의 지배 공간을 祭儀의 절차에 따라 출입하며 사람뿐 아니라 宗廟에 모신 祖神을 拜謁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이 때문에 境界를 出入할 때에는 吉凶 여부를 자세히 점쳤고, 각 空間을 移動하기 위해서는 祭儀의 形式을 띤 出入 節次를 따라야 했다.
春秋時代 列國 간에는 상시적인 使臣 뿐 아니라 朝覲·聘問·會盟·饗宴 등을 위한 외교 사절단이 끊임없이 왕래하였다. 春秋時代 國外로의 移動은 天子·諸侯·卿·大夫 등 각 신분별로 정해진 목적에 한해서만 가능하였고, 사사로이 都城 혹은 國의 공간을 벗어날 수 없었다. 自國人이 國外로 出行하는 절차의 始終은 宗廟에서 이루어졌다. 즉, 出國하기 전에 宗廟에 고하고, 出行에서 돌아오면 宗廟에 復命하였다. 그리고 出行하여 他國의 境內를 지나가야 할 경우, 먼저 假道를 요청하여 해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他國을 聘問하기 위해 都城 내부까지 出入하는 경우, 郊에서 위로를 받는 일[郊勞]과 예물을 바치는 절차가 가장 중요하였다. 使者는 自國의 宗廟에서 받아 가지고 온 玉器를 主國의 祠堂에서 전달하였다. 聘問은 방문 국의 都城 안까지 들어갈 뿐 아니라, 堂上에서 玉을 授受하고 饗宴을 하였던 것처럼 해당국의 가장 중심부까지 出入하는 儀禮 節次였다.
春秋時代까지 接賓 절차에 보이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主賓에 대한 饗禮와 禮物의 贈與이다. 우선 饗禮는 외부인 혹은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사람에게 행한 일종의 淨化 儀式이었다. 西周時代 饗禮는 宗廟 儀禮를 행하기 전에 齋戒하는 절차와 같이 酒를 마심으로써 부정을 제거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周王이 의식 거행 전에 祼禮를 행하여 齋戒하였던 것처럼 賓客들 역시 宗廟를 방문한 후 饗禮를 행하였다. 商周時代 接賓 儀禮는 단순히 사람간의 만남이 아닌 神과의 만남을 전제로 한 절차였기 때문에 宗廟에서 외부인에 대해 행한 饗禮는 정치적 중심지였던 宗廟를 들어가기 위한 일종의 通過祭儀에 해당하였다. 다음으로 接賓 절차에 사용한 禮物은 神·人 공동체 간의 만남에서 神과의 만남을 매개하는 매개물이었다. 王이 파견한 使者는 王室이나 소속 宗廟의 命을 받아 두 세계를 연결해주는 매개자로서, 主國이나 主人의 宗廟에 禮物을 贈與하였을 뿐 아니라 主賓으로서 玉器나 帛 등의 禮物을 받기도 하였다. 특히 春秋時代 聘禮에 이용한 贄는 祭祀에 사용하는 玉帛이나 犧牲으로서, 그 중 珪·璋과 같은 玉器는 國을 保持하는 宗廟·社稷 神의 권위를 상징하는 信物이었다. 당시 宮廟를 출입하는 聘禮는 祭儀의 형식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聘問하는 使者는 珪·璋·璧 등의 玉器나 犧牲을 贄로써 소지해야 했다. 聘問할 때 贄로 사용한 珪·璋·璧은 宗廟에 보관하던 神物로서, 이를 상대국 종묘에 전달하는 행위는 聘問이 사람 간의 만남뿐 아니라 神·人 共同體 간의 만남임을 상징하였다. 즉, 春秋時代까지 宗廟에서 이루어진 接賓은 사람과의 만남 이상의 神·人 共同體 간의 상호 교류였고, 이 때문에 接賓 儀禮는 神과 교통하기 위한 祭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주지하듯 春秋時代까지 司祭의 성격을 지닌 君主가 呪術과 祭儀를 근거로 지배하였던 神政國家는 戰國時代를 기점으로 世俗君主가 法治와 行政을 기반으로 지배하는 君主集權國家로 전환되었다. 戰國時代 이후 국가의 성격이 변하면서, 宗廟에서 宮이 분리되었고 군주의 執政 공간인 宮은 宗廟보다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宮의 朝廷이 세속군주의 治所로 부상하면서 聘禮 역시 宗廟가 아닌 朝廷에서 이루어졌다. 戰國時代 各國의 개혁이나 郡縣 支配의 등장 과정은 다소 편차가 있지만, 各國은 小國을 병합하여 自國의 郡縣으로 삼기 시작하였다. 郡縣 支配의 등장으로 이전의 呪術的인 원리로 지배되던 國의 공간은 君主가 정한 法制에 따라 再編成되었다. 戰國時代 이후 國의 空間은 정치적 중심지인 國都 혹은 京畿와 郡·國이 집적된 형태로 구성되었다. 國의 邊境에 설치된 郡의 境界는 곧 해당 國의 國境에 해당하였다. 春秋時代까지 國과 國 간에 隙地와 같은 제3의 공간이 존재하였으나, 郡縣 支配의 등장 이후 각국은 경계를 접하게 되었다. 秦漢帝國이 성립한 이후에는 戰國時代 各國의 國境은 帝國의 내부에 속하였고 帝國의 外緣에는 하나의 國境이 형성되었다.
戰國時代 各國의 疆域이 확대되어 상호 接境하게 되면서 邊境 要地에는 徼·亭·鄣·塞 등의 수비시설과 상비병이 배치되었다. 漢代에도 匈奴 및 羌族 지역과 접하는 西北 邊境의 방비는 무엇보다 중요하였고, 西北 이외 西南夷와의 관계가 확대되면서 중국 內地에 있는 內境의 관리 역시 필요해졌다. 邊境 수비 시설은 지역별로 다소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亭·鄣·徼와 같은 수비시설이나 關塞를 설치하여 방비하였다.
邊關은 通交가 진행될 경우 兩國 교류의 門戶가 되지만, 상대국과 대치관계에 있을 때는 출입을 통제하고 방비해야 하는 일종의 國境이었다. 각국의 외교 관계는 단절과 화해가 반복되었는데, 외교 관계에 따라 國境을 출입하는 使臣의 출입 역시 변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閉關은 외교 단절을 의미하는 용어와 통용되었고, 외교 단절은 곧 상대국과 통하는 關門의 폐쇄를 의미하였다. 戰國時代 허가를 받은 商人은 國境을 넘어 他國에 가서 활동할 수 있었고, 각국의 求賢 정책 하에 游士 역시 各國을 移動하며 활동하였다. 반면 秦漢時代 帝國의 邊關·塞를 출입할 때는 공무용 통행증인 符가 필요하였고, 민간의 邊境 출입은 극히 제한되었다. 邊關을 통해 財物·黃金 등의 특수 물자를 반출하는 일이나 흉노를 비롯한 外國과의 사적인 상거래는 금지되었다. 사사로운 國外 出入이 제한된 상황에서 국외로의 왕래는 使行이나 出戰 등 공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자들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외국인 또한 사적인 국내 출입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서역 상인들은 공식 使臣들과 함께 국내로 들어와 獻納을 명분으로 삼아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였다. 懸泉 漢簡에 포함된 傳信을 보면 西域人들이 入關하면 獻納을 할 수 있도록 護送 관리를 파견하여 行在所까지 안내하였으며, 이동에 필요한 숙박 시설이나 식비는 국가에서 제공해 주었다. 이들 사절단은 때로 대규모로 장기간 내지에 머물다 돌아갔는데, 이들에 대한 禮遇는 결국 漢代에도 국가 간의 관계에는 儀禮의 原理로 境界 出入을 管理하였음을 보여준다.
한편 京畿에 속한 관직이 지방 기구와 달리 중앙에 직속된 성격을 지녔던 것과 마찬가지로 京畿의 출입문제 역시 다른 행정구역과는 다르게 관리되었다. 呂后 집권 시기 律令인 『二年律令』에는 金器·鐵·말 등의 關外 반출을 통제하고 京畿로 이주하기 위해 入關하는 개인까지도 철저하게 확인하라는 규정이 있는데, 이처럼 당시 京畿로의 출입이 매우 철저하게 관리되었다. 漢初 京畿지역에 대한 특별 정책은 당시 皇帝 權力이 여전히 京畿를 세력의 근거지로 삼아 동방의 제후국과 대치하는 大諸侯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였음을 보여준다. 內地 通行 管理에 대해 종래에는 關·津에서만 통행자를 검문한다고 이해하였으나, 漢簡에 포함된 通行證에 기록된 過所에는 關·津 외에 縣·道官 및 亭·塢辟·鄣·市·里 등이 포함되어있고, 過所로서 關·津이 언급되지 않기도 한다. 특히 최근 공개된 肩水 金關 漢簡에 長安에서 河西지역으로 私市하러 갔던 사람들의 통행증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檢問이 邊境에서의 특별 조치가 아니라 內地에서도 關·津 이외 각 通過所에서 시행하였음을 의미한다.
戰國時代에서 秦漢時代까지 國의 각 境界를 出入하며 移動하기 위해서는 君主의 命令과 許可를 證憑하는 符·節이나 官印이 찍힌 通行許可證書를 소지해야 했다. 여기서 符·節은 君主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았음을 상징하는 證憑이었고, 官印이 찍힌 通行許可證書는 君主의 권한을 위임받아 法制를 운영하는 官吏의 許可를 상징하는 證憑이었다. 春秋時代 節은 冊命된 職位를 상징하는 물건으로서, 神的 권위를 내포하고 있었다. 戰國時代 관료제가 정비되면서 瑞玉은 君主의 명령을 상징하는 符·節, 官吏의 신분을 나타내는 印章 등 다양한 형태로 分化되었다. 戰國時代 印에 璽·節 또는 符·符瑞 등의 칭호가 보이는 점은 戰國時代 官印이 瑞玉에서 점차 분화 발전되었음을 보여준다. 형태면에서도 戰國時代 군주의 命令을 상징하는 符·節은 春秋時代까지 신적 권위를 상징하였던 瑞玉의 형태를 계승하였다. 이렇게 初期國家 단계에서 神物이자 瑞玉으로 사용되었던 玉器는 世俗 君主의 集權體制가 등장한 이후 君主의 命令과 권위를 상징하는 信物로 轉化되었다. 이는 戰國時代 世俗 君主가 이전까지 神의 권위를 대변하는 매개물이었던 瑞玉을 專有하고, 그것을 매개로 종래 神의 권위에 속했던 영역을 자신의 새로운 정치적 지배 영역으로 포섭하였음을 의미한다. 비록 戰國時代 符·節에는 神의 명령이나 그에 따른 罰과 저주가 언급되지 않았지만, 神의 권위를 대행하는 군주가 발부한 符·節은 여전히 신적인 권위와 강제력을 내포하고 있었고 만약 명령을 어겼을 경우 이전보다 더 즉각적인 보응을 초래하였기 때문에 符·節은 呪術的 지배를 위한 瑞玉보다 더욱 강력한 권위를 표상하였다.
우선 符·節은 군대통수권과 외교권을 專有한 君主의 권위를 상징하는 信物로서, 君主의 命令을 받아 파견된 使者는 君主의 권위를 상징하는 符·節을 證憑으로 삼았다. 漢代 흉노에 使臣으로 갔을 때 漢의 節 대신 그 얼굴에 墨으로 黥을 하지 않으면 單于의 穹廬에 들어가지 못했고, 만약 끝까지 漢의 節을 놓지 않을 경우에는 穹廬 밖에서 單于와 대면할 수밖에 없었던 일은, 漢의 使者가 지닌 節이 天子로서의 황제의 神的 권위를 표상하였음을 의미한다. 다음으로 印章은 官僚制 등장 이후 官人의 身分을 證明하는 대표적인 證憑이었다. 갑골문의 印 字가 人과 物資의 소속과 소유를 표기하는 행위를 의미하듯이, 戰國時代 이후 官印은 관할범위에 속한 民과 物資를 관장할 수 있는 권한을 상징하였다. 官吏는 관할하는 民의 移動과 물자의 搬出·入을 管理·監督하는 책임이 있었고, 人的·物的 資源의 移動은 모두 정해진 규정에 따라야 했다. 秦 統一 이후 帝國에 속한 民과 物資는 모두 문서에 등재되어 管理되었고,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齊民支配體制는 철저한 文書 행정을 통해 운영되었다. 자연히 官에 속한 人的·物的 資源의 出入과 移動은 책임을 맡은 관리의 印章으로 그 證憑을 삼았다. 春秋時代 節이 策命의 信物로서 神的 權威를 내포하고 있었던 것처럼, 神的 權威를 가진 君主의 권한을 상징하는 官印 역시 단순히 관리의 직위를 나타내는 證憑 이상의 주술적 권위를 상징하였다. 君主가 정한 法과 制度에 따라 지배되는 古代國家에서 官印은 國의 각 境界를 出入하기 위한 필수 요건이었는데, 이 官印은 바로 이전에 각 空間을 관장하던 神의 권한 대신 새로운 권한을 위임받은 官吏의 권한을 상징하는 信物이었다. 戰國時代 이후 帝王의 일원적 法制로 지배하는 國家가 등장한 이후에도 帝王은 呪術的 思惟와 전통을 변용하여 스스로 이전시기 祭儀의 영역을 포섭하는 권위자로 등장하였음을 과시하였다. 이는 帝王이 春秋時代까지의 지배원리였던 祭儀를 法制 속에 포함시켜 활용함으로써 세속적 지배의 순조로운 관철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요컨대 中國 古代 空間 支配의 성격이 변하면서, 境界 出入의 절차와 형식은 戰國時代를 기점으로 크게 변하였다. 春秋時代까지의 空間 支配는 宮廟를 중심으로 형성된 呪術的 權威에 근거하였고, 呪術的 지배의 限界로 인식되었던 境界를 出入하기 위해서는 祭儀의 성격을 띤 通過儀禮가 필요하였다. 戰國時代 이후 世俗君主에 의한 郡縣支配가 등장하면서, 君主의 支配領域은 관할범위를 의미하는 多重의 境界로 劃定되었고 境界를 出入하기 위해서는 君主의 命令이나 官府의 許可를 상징하는 證憑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는 中國에서 戰國時代 이후 法制에 근거한 空間 支配가 시작되어, 지리상에 형성된 배타적 성격의 政治的 境界가 등장하였음을 의미한다.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2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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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ars in Collections:
College of Humanities (인문대학)Asian History (동양사학과)Theses (Ph.D. / Sc.D._동양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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