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과학 다시보기-파울 카메러의 산파두꺼비 연구에 대한 재해석

Abstract

파울 카메러(Paul Kammerer, 1880-1926)는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했던 파충류학자로서, 지난 90년간 실패한 과학자로 평가받아 왔다. 카메러는 일명 산파두꺼비 실험을 통해 획득형질의 유전을 증명하여 주목을 받았으나 표본이 조작된 것으로 밝혀진 후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자살했다. 이후 과학사에서 그는 과학적 사기의 대표사례로 언급되거나 라마르크주의의 몰락을 가져온 학자로 평가되어 왔다. 본 논문은 그러한 평가가 정당한지에 대한 질문에서 출발하여, 카메러의 책 『획득형질의 유전(The Inheritance of Acquired Characteristics)』을 분석한다. 이를 통해 그가 동시대의 이론들을 그의 연구에 적용한 방식에 대해 고찰하며 그의 과업을 재평가하고자 한다. 지금까지의 연구들은 카메러의 과학적 실패 원인이 카메러의 유대적 혈통, 사회주의에 대한 옹호, 부주의한 성격 등 그의 개인적인 배경에서 비롯된 것으로 간주하거나, 라마르크주의와 신다윈주의가 대립했던 생물학계의 정치적 싸움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시각은 과학적 실패와 과학 외의 가치를 필연적으로 연관시키며, 더 나아가 과학 외의 가치가 과학적 가치를 훼손시킨다는 시각을 반영하고 있다. 본 논문은 그의 과학연구를 분석하며 두 가지 점을 주목하고자 한다. 첫째, 카메러가 라마르크주의자였다는 기존의 시각을 재고한다. 이러한 시각은 그가 사회주의적 가치를 옹호했다는 사실과 연관하여 해석돼왔고, 이는 카메러가 그의 정치적 가치를 과학 활동에 투영했다는 견해를 뒷받침했다. 그러나 카메러는 유전과 진화에 대해 단순히 라마르크주의로 정의 할 수 없는 독특한 시각을 지니고 있던 학자였고, 카메러의 연구프로그램도 이론적 입장보다는 주로 실험적 방법론에 대해 동시대 학자들에게 비판받았다. 둘째, 카메러가 비록 실패한 과학자로 평가받지만, 과학자로서 뚜렷한 정체성을 가지고 자신만의 이론적 체계를 고민하고 완성하려 했던 학자였다는 것이다. 카메러의 연구 프로그램은 과학 외적인 활동에서만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가 동시대의 현상과 이론을 이해하는 방식과 맞물려 전개된 결과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카메러는 라마르크주의자도, 과학 외적인 가치를 위해 과학연구를 수단으로 사용하려 했던 사기꾼도 아니었다. 다른 과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자신의 이론을 체계적이고 더 설득력 있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이 과정에서 동시대의 과학 이론들, 사회적 사상들이 그의 실험과 함께 자연스럽게 구성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