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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初 東南沿海 軍事戰略의 推移
淸初東南沿海軍事戰略的推移 -为主淸朝的對鄭氏戰略(1644-16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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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채경수
Advisor
구범진
Major
인문대학 동양사학과
Issue Date
2013-08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鄭成功鄭經施琅姚啓聖鄭氏勢力福建水師海洋政策海禁遷界東南沿海臺灣
Description
학위논문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동양사학과, 2013. 8. 구범진.
Abstract



본고는 청조의 對鄭氏戰略을 중심으로 명ㆍ청 교체기 동남연해 군사전략의 변화상을 파악하고, 이를 통해 청초 해양전략의 성격을 살펴본 글이다. 명ㆍ청 교체기 청조의 주적은 내륙세력이었기 때문에 청조의 해상 군사전략은 軍事史的으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淸-鄭 대립에 대한 연구 역시 정씨세력의 활동에 편중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청-정 대립은 기본적으로 양자의 상호관계이므로 정씨세력의 활동 못지않게 청조의 입장과 정책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청조의 대표적 해양전략인 海禁과 遷界의 연구에는 세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 두 정책의 군사전략적 성격이 간과되고 있다. 둘째, 두 정책이 시간ㆍ내용적으로 對鄭氏戰略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점이 간과되고 있다. 셋째, 두 정책을 실시하는 청조의 논리에 대한 이해가 불분명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씨세력에 대한 청조의 전략을 통시적으로 분석하고, 그 맥락 속에서 해금과 천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청군은 신속하게 동남연해지역을 점령했으나 곧 鄭成功으로 대표되는 해상세력의 저항에 직면했다. 연해지역 일선 지휘관들은 수군을 양성하여 해상세력에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중앙 조정은 이를 수용하지 않고 초무 전략을 시도했다. 초무 전략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鄭成功에게 역이용 당했지만 반청활동의 중심인 남명정권을 최우선적으로 제압해야 하는 중앙 조정의 입장에서 이는 大局的 상황을 고려한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초무 실패 후 청조는 대규모 육상군을 투입하여 정씨세력을 도서지역으로 몰아내고 해금을 통해 물자 공급을 차단하는 고립화 전략을 구사했다. 그러나 고립화 전략에는 두 가지 한계가 있었다. 하나는 청군에게 정씨세력의 연해 활동을 통제할 물리적 능력이 없다는 점이었고, 다른 하나는 연해주민과 정씨세력이 이익 구조를 공유하는 경제적 유착관계라는 점이었다. 결국 고립화 전략은 오히려 정군의 세력을 크게 신장시켰고 이는 정군의 南京 침공이라는 형태로 가시화되었다.
南京 전투로 고립화 전략의 실패와 새로운 전략 모색의 필요성이 분명해졌지만 수군 양성에 대한 중앙 조정의 입장은 여전히 소극적이었다. 이에 수군 없이 해금을 달성할 수 있는 천계가 대안으로 제시되었으나 鄭成功의 臺灣 공략으로 천계의 효과는 반감되었다. 비록 鄭成功의 急死와 네덜란드의 협력을 계기로 청군은 정씨세력을 연해지역에서 축출하는 데 성공했지만 外海艦隊가 없었기 때문에 鄭經의 臺灣 할거를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臺灣으로 물러난 鄭經에 대해 청조는 천계를 통해 정치ㆍ경제적 압박을 가하고 초무를 통해 항복을 유도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그러나 臺灣에서 독자적 정권을 유지하는 것을 최우선시한 鄭經에게 청조의 조치는 위협적이지도 흥미롭지도 않았기 때문에 청조의 천계-초무전략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삼번의 난을 통해 정씨세력이 연해 활동을 재개하자 청조는 대규모 육상군을 투입하여 이들을 도서지역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정군의 연해 침탈은 막지 못하는 과거 고립화 전략의 전철을 밟았다.
강희 17년(1678) 福建總督이 된 姚啓聖은 강력한 추진력과 뛰어난 자금 동원 능력을 이용하여 정군을 효과적으로 물리쳤고 더 나아가 施琅을 제독으로 하는 강력한 外海艦隊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姚啓聖과 施琅이 활약할 수 있었던 데에는 기여슈와 강희제라는 두 만주 권력자의 지지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의 비호아래 자신들의 역량을 십분 발휘한 姚啓聖과 施琅은 강희 22년(1684) 劉國軒의 저항을 물리치고 臺灣의 정씨세력을 공략하는 데 성공하였다.
정씨세력을 제압하기 위해 청조는 약 4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적지 않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주요 반청세력인 李自成, 張獻忠, 南明政權, 三藩 등을 제압하는데 걸린 시간이 길어야 10년 안팎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정씨세력에게 40년이라는 긴 세월을 소모한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 본고의 분석에 따르면 청조의 對鄭氏戰略은 5단계로 구분되며 그 중 마지막 단계에서 구현된 外海艦隊 창설을 통한 직접 공략만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전략이 1단계부터 4단계에 이르는 시기에도 일선 지휘관들에 의해 끊임없이 제안되었고 그때마다 중앙 조정에 의해 거부되어 왔다는 점이다. 따라서 본고의 근원적 질문은 40년에 가까운 긴 세월 동안 중앙 조정은 왜 이 전략을 지속적으로 거부해 왔는가 하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이는 대개 우선순위와 재정의 문제로 귀착되었다. 물론 이 두 가지가 청조의 선택에 영향을 준 중요한 요소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永曆政權이 몰락한 후 삼번의 난이 일어날 때까지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정씨세력은 청조에 저항하는 유일한 세력이었으므로 우선순위만으로 이 시기를 해명하기는 힘들다. 또, 청조가 동남연해지역 방어 병력을 유지하는 데 사용한 엄청난 비용을 감안하면 수십만 냥에 불과한 함대 창설 비용이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해석도 석연치 않은 측면이 있다. 여기에 해금과 천계 등에 의해 발생한 연해 경제의 피해와 세수의 감소까지 고려한다면 정씨세력 문제를 조기에 해결하지 못한 것은 함대 창설 비용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큰 재정적 손실을 초래했다고 할 수 있다.
본고는 이를 보완할 세 번째 해답이 한인 군대를 불신하는 만주 엘리트의 시각에 있다고 보고 있다. 삼번의 난 이전까지 만주 엘리트에게 한인 군대란 완전히 포기할 수도 완전히 신뢰할 수도 없는 계륵과 같은 존재였다. 한인 군대에 대한 만주 엘리트의 불신은 전투력과 충성심 양 측면을 포괄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만주 엘리트에게 있어 한인으로 구성된 대규모 함대의 구성은 가급적 피하고 싶은 선택이었고, 이는 동남연해지역의 전략에서 지속적으로 수군 양성이라는 선택지가 배제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나 삼번의 난에서 녹영이 활약하여 군사적 위상이 증가하자 강희제와 기여슈 등 일부 만주족 권력자는 한인 군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데 있어 상당히 실용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결국 姚啓聖과 施琅 등은 자신들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만큼 유연하게 변화한 시대적 상황에 힘입어 外海艦隊 창설과 臺灣 정복이라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臺灣 점령 후 청조 내부에서는 臺灣의 유지와 포기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고, 결국 연해지역의 안보를 명분으로 삼은 施琅의 주장이 수용됨으로써 臺灣의 유지가 결정되었다. 臺灣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규모의 수군이 계속 유지되어야 하므로 청조의 臺灣 유지 결정은 福建水師 유지 결정과 맞닿아 있는 것이었다. 즉, 청조의 臺灣 유지는 청조가 지난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일관되게 유지해 왔던 소극적 해양전략에서 어느 정도 탈피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결정이었다. 이어지는 천계 해제, 4개 항구 개방 등의 조치는 청조가 드디어 맹목적인 대립 구도에서 벗어나 해양 세계와 정상적으로 대면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주제어: 鄭成功, 鄭經, 施琅, 姚啓聖, 鄭氏勢力, 福建水師, 海洋政策, 海禁, 遷界, 東南沿海, 臺灣

학번: 2006-20068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3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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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ars in Collections:
College of Humanities (인문대학)Asian History (동양사학과)Theses (Master's Degree_동양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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