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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치오 폰타나의 공간주의 작품(1949-1968) 연구 : A Study of Spatialism of Lucio Font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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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엄유나

Advisor
김영나
Major
인문대학 고고미술사학과
Issue Date
2016-08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루치오 폰타나공간주의이탈리아 현대미술앵포르멜현상학전후 미술
Description
학위논문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고고미술사학과 미술사학전공, 2016. 8. 김영나.
Abstract
루치오 폰타나(Lucio Fontana, 1899-1968)가 60세 되던 해에 발표한 연작은 유럽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큰 호응을 얻은 첫 번째 작품이었다. 그 결과 는 역으로 그 이전의 폰타나 작품들의 의미를 규명하는 틀이 되어왔다. 그러나 실제로 폰타나가 를 만들기까지 지나온 여정 속에는 고전주의적 석고 조각, 장식적 색채의 도자기, 연극적 연출 방법을 이용한 환경 작업, 인테리어 디자인 등 실로 하나로 정의내리기 힘든 다양성이 존재했다. 그간의 폰타나 연구는 극단적으로 보이는 폰타나의 작업 스펙트럼 중 한 축을 무시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폰타나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공간주의라는 이름으로 시도했던 다양한 실험들은 이탈리아 현대미술의 역사로부터 유리되어 해석되거나, 전쟁 이전의 유럽 모더니즘과 결부되어 작품의 동시대적 맥락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했다. 본 연구는 그간 폰타나에 대한 연구가 결여하고 있었던 이 동시대의 미술사적 맥락을 보충하고자 하는 데서 출발했다.
폰타나는 어린 시절을 아르헨티나의 로사리오에서 보내면서 묘소 조각을 주로 만들었던 아버지 루이지 폰타나(Luigi Fontana, 1865-1946)의 상업 조각 공방일을 도왔다. 그러다가 1927년 폰타나의 나이 27세에 이탈리아 밀라노로 이주해 브레라 미술학교(Brera Academy)에서 아돌포 윌트(Adolfo Wildt, 1868-1931)의 지도하에 고전주의 조각을 연습하게 된다. 이 시기 폰타나 작품 활동의 근거지였던 밀라노는 추상미술의 국제적인 흐름을 활발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폰타나는 곧 파리의 예술가들과 적극적인 교류를 시작하게 되고, 자신이 만든 석고 조각에 타르를 부어버리는 반달리즘적 행위로 고전주의 조각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이탈리아 국내의 현대미술을 해외, 특히 파리의 주요 미술 경향과 접촉시키는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던 밀라노의 밀리오네 갤러리(Galleria del Milione)와 작가 엔리코 프람폴리니(Enrico Prampolini, 1894-1956)의 국제 교류는 별다른 논쟁 없이 이탈리아에 추상미술을 안착시키는데 성공했지만 이탈리아 모더니즘을 기하학적 추상 일변도로 흐르게 했다는 문제점도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에서 기하학적 추상은 당대 파시즘의 경향과 맞물려 순수한 정신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폰타나는 이탈리아 모더니즘의 일반적인 용례와는 맞지 않는 다양한 시도들을 감행했다. 일반적으로 순수한 예술에 사용될 수 없다고 여겨졌던 장식이나 공예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은 모더니즘의 매체 순수성에 대한 의도적인 비평이나 의심으로 볼 수 있는 지점이다.
전쟁을 피해 아르헨티나로 돌아갔던 폰타나는 전쟁이 끝난 1946년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오게 된다. 당시 독재 정권으로부터 막 해방된 이탈리아는 혼란을 겪고 있었다. 특히 파시즘 정부의 통제 하에 과도하게 미술을 지배해왔던 민족주의 담론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를 놓고 작가들은 대립했다. 한 쪽에서는 해방 후 빈곤과 혼란이라는 이탈리아의 현실에 집중하여 리얼리즘으로서 파시즘의 망령을 탈피하고자 했고, 한 쪽에서는 이탈리아가 아닌 유럽적인 것으로 도피함으로써 이 상황을 타개하고자 했다. 미술의 현대화와 관련한 리얼리즘 계열의 민족주의 대 국제주의의 대립이 가져온 황폐화되고 양분된 선택지에서 폰타나는 공간을 자신의 지향점으로 삼음으로써 대안을 찾게 된다.
의 기념비적인 첫 작품은 1949년에 제작되었다. 후에 이라는 별칭이 붙게 되는 이 작품은 거꾸로 잡은 붓으로 소용돌이 모양의 구멍을 뚫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초기 의 스케치를 보면 이 작품은 기존의 캔버스 작품들처럼 벽에 걸려 있는 것이 아니라 공중에 매달리는 식으로 구상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을 대중들에게 처음 선보인 1952년 나빌리오 갤러리(Galleria del Naviglio)의 전시 브로셔에는 빛의 강렬한 효과 덕분에 거의 부조에 가깝게 보이는 의 사진이 실려 있다. 의 이와 같은 특징들은 시각을 사용해서 인지해야하는 기존의 캔버스 작품들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시도들이었으며, 주변 공간을 작품의 필수적인 요소로 인식하게 한다.
을 처음 제작하던 해에 폰타나는 (1949)이라는 설치 작업을 갤러리에서 일주일간 전시했다. 이 작품을 위해 갤러리는 검은 암실이 되었고, 천정에는 인광성 안료를 바른 파피에 마쉐 모형이 매달렸다. 또한 자외선 조명인 우드선을 사용해 구조물로부터 빛이 스스로 방출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동시에 대부분 흰 셔츠를 입고 전시를 보러왔던 관객들까지 푸른색으로 빛을 내게 했다. 보는 대상과 보는 주체를 서로 엮이게 만들어 버림으로써 비체화된(disembodied) 해석자로서 보는 이의 위치를 위협하도록 한 것이다.
한편 1951년 제9회 《밀라노 트리엔날레(La Triennale di Milano)》에서 전시된 는 응용 예술과 건축, 산업을 아우르는 응용예술 박람회인 전시의 목적에 맞게 소재로는 스스로 빛을 내는 네온 튜브를 사용하였고, 건축과 긴밀히 연결되어야 하는 작품의 특성상 건축가 및 엔지니어와 협업을 진행했다. 결과적으로 는 자율적 조각이자 건축적 배경인 동시에 조명 장식으로 기능하는 작품이 되었다. 는 의 스케일을 키운 것을 넘어 사람이 그 안과 밖을 드나들 수 있도록 만들어졌으며, 설치된 곳이 계단이 있는 곳의 천정이기 때문에 보는 이의 관점은 수평선상에서뿐만 아니라 수직선상으로도 움직일 수 있었다. 정리하자면 역시 보는 이가 움직이는 몸을 가지고 있는 불안정한 위치의 해석자라야 제대로 읽어낼 수 있는 작품이었다.
다양한 매체를 이용하여 만들어진 중 비교적 후기작인 연작에서는 유화 안료의 물성이 만들어내는 특징을 몸의 물질적 특성과 직접적으로 연결시켰다. 수성 도료를 사용한 다른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유채 물감을 사용한 가 보여주는 물성은 훨씬 촉각적이었다. 더불어 연작은 채도가 매우 높은 흰색과 분홍색을 사용하여 살결을 연상시키게 할 뿐만 아니라 폰타나가 그의 초기 구상조각에서 살결 표현을 하는 데 즐겨 사용했던 금색을 다시 등장시켰다. 이전까지의 에서 여러 개였던 구멍은 제작 시기부터 하나로 줄어들기 시작했는데 폰타나는 여기에 배꼽이라는 별칭을 붙여 가 곧 몸으로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였다.
폰타나의 공간주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두 가지의 특성, 즉 시각이 아닌 몸이 인지의 도구가 되고, 작품의 물성을 곧 몸의 물성과 병치시키는 방식은 전후 현대미술의 중대한 변화를 반영한다. 유럽과 미국의 현대미술 작가들 사이에서 몸은 예술 경험의 중요한 요소로 부상하고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전후 큰 인기를 끌었던 실존주의 철학과도 관련이 있다. 실존주의를 바탕으로 한 미술에서는 이성·상징·언어를 매개하지 않고 보는 이로 하여금 상황이나 경험을 체현케 하는 직접성을 그들 미술의 중요한 요소로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작가들이 가장 직접적이라고 여겼던 표현수단이 바로 몸이다.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에 의해 오랫동안 아방가르드와 키치의 이항대립처럼 여겨졌던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1912-1956)과 폰타나는 이 지점에서 서로 연관된다. 폴록의 전면회화(all-over painting)는 폰타나의 과 마찬가지로 올바른 방향을 정하는 것이 불가능한 회화다. 폴록의 작품도 폰타나의 것과 마찬가지로 위와 아래, 왼쪽과 오른쪽, 배경과 형상의 구분이 불가능한데 이것은 기하학과 시각적 형식을 가능하게 하는 기본적인 조건이 성립 불가함을 의미한다. 폴록과 폰타나가 회화의 관습을 깨뜨림으로써 예술의 시각적 전통으로부터 도피했다면, 장 포트리에(Jean Fautrier, 1898-1964)는 회화의 관습을 역이용하여 캔버스의 시각적 형식에 도전한다. 그는 캔버스의 네 모서리에 모두 서명을 남김으로써 어떤 방향으로 그림을 걸든 상관이 없도록 만들거나 재료들을 테이블 위에 놓고 켜켜이 쌓아나감으로써 보는 형상을 좌절시킨다. 한편 포트리에의 가장 유명한 연작인 에서 그는 파트(pâte)라 불린 혼합물의 물성을 몸의 환유로서 제시한다. 이것은 알베르토 부리(Alberto Burri, 1915-1995)가 비닐을 태우고 찢음으로써 상처로 벌어진 피부를 떠올리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즉 폰타나와 포트리에, 부리의 작품은 몸을 재현하거나 비유나 상징으로서 풀어내기보다 캔버스 표면을 직접 몸의 등가물로 만들어버린다. 이처럼 서로 다른 두 대륙에서 전후의 작가들은 몸이 예술 경험을 좀 더 직접적으로 매개할 수 있을 것이라는 비슷한 믿음을 공유하고 있었다.
본 연구는 전후 약 10년간의 시기 동안 폰타나가 제작한 다양한 경향의 작품이 당대 미술의 경향과 어떻게 관계 맺고 있었는지를 살펴본다. 전통적으로 시각에 과도하게 부과됐던 인지 기능이 몸의 인지 기능과 균형을 맞추어가는 과정에서 직접성을 추구했던 작가들은 추상화되거나 객관화될 수 없는 몰입된 경험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고 폰타나 역시 공간주의라는 이름의 작품들로 이러한 경향에 동참했다. 몸의 개입이라는 전후 예술의 맥락 속에서 폰타나의 작품을 읽어내는 일은 의 상징적 제스쳐로부터 그를 해방시키고 전후 미술사에서 폰타나의 작품이 갖는 동시대적인 의미를 회복시킨다.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3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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