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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니츠에게서 피조물의 우연성 : Leibniz on Creature's Contingen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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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김재헌

Advisor
이석재
Major
인문대학 철학과(서양철학전공)
Issue Date
2018-08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Description
학위논문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인문대학 철학과(서양철학전공), 2018. 8. 이석재.
Abstract
1686년에 쓰인 『형이상학 논고』(이하 『논고』로 약칭)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진행된 아르노와의 서신 교환은 라이프니츠의 성숙기 형이상학을 살펴볼 수 있는 핵심 문헌들 중 하나로 간주된다. 이 논문의 목표는 위 문헌들에서 라이프니츠가 피조물의 우연성 예컨대 시저가 루비콘을 건너는 것의 우연성을 어떻게 정당화하는지에 관해서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데에 있다.

2장에서 나는 라이프니츠에게 피조물의 우연성 문제가 제기되는 배경과 앞으로 해석의 대상이 될 주요 문헌들을 개관하였다. 라이프니츠는 피조물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반사실적 비-동일성을 받아들인다. 만약 시저의 완전 개체 개념에 포함된 어떠한 술어라도 결여한다면, 그것은 시저가 아니다. 그런데 이로부터 시저가 루비콘을 건너는 것이 필연적이라는 결론이 따라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만약 루비콘을 건너지 않는다면, 그것은 시저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논고』 §13에서 라이프니츠는 주어와 술어 사이의 연결이 두 종류라고 주장한다. 첫 번째는 오직 신의 지성에만 의존하는 연결로서 그 반대가 모순을 함축하기 때문에 필연적이다. 이러한 연결은 기하학이나 종(種) 개념과 같은 영원한 진리들에서 발견된다. 두 번째는 신의 자유로운 명령에 의존하는 연결로서 시저의 완전 개체 개념과 루비콘을 건너다 사이의 연결이 이에 해당한다. 이러한 연결은, 신이 명령하는 법칙에 가설적으로는 필연적이지만, 그 반대가 모순을 함축하지 않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우연적이다.

3장에서 나는 기존의 해석으로서 아담스의 견해를 비판적으로 검토하였다. 아담스는 두 가지 가능한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첫 번째 해석에서 아담스는, 시저가 루비콘을 건너지 않는 것이 시저 자신의 완전 개체 개념에 의해서 배제되는 반사실적 상황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그러한 배제가 시저의 원초적 힘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신의 지혜와 선함에 의한 것인지를 다시금 물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만약 시저가 루비콘을 건너지 않는 것이 오직 신의 지혜와 선함에 의존함으로써 불가능한 것이라면, 우리는 이러한 반사실적 상황이 그 자체로 모순을 함축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아담스에 따르면, 시저의 원초적 힘만으로 충분히 배제되지 않는 두 가지 종류의 반사실적 상황이 발견된다. 시저의 지각은 다른 피조물의 지각과 조화롭게 상응하지 않을 수 있었으며(관계의 우연성) 또한 시저는 존재하지 않을 수 있었다.(존재의 우연성) 문제는 과연 이러한 종류의 우연성이 시저가 루비콘을 건너는 것의 우연성을 적절하게 설명해줄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우선 나는 피조물의 우연성을 확보하려는 동기에 주목한다. 라이프니츠는 피조물의 행위를 도덕적으로 평가하기 위한 기본 전제인 자유를 확보한다는 취지에서 피조물의 우연성을 주장한다. 그렇기에 라이프니츠의 관심사는 기본적으로 자발적인 행위의 우연성을 설명하는 데에 있다. 그런데 피조물이 특정 지각을 갖는 것은 그의 자발적인 행위에 해당하지만, 그의 지각이 다른 피조물의 지각과 조화롭게 상응하는 것은 자발적인 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관계의 우연성은 논의와 무관하다는 점이 확인된다. 왜냐하면 시저가 루비콘을 건너는 내용의 특정 지각을 갖는다고 전제할 때, 그 지각이 다른 피조물의 지각과 조화롭게 상응하는 지의 여부가 우연적이라는 설명은 시저가 이 특정 지각을 갖는 것 자체의 우연성과 관련해서는 전혀 알려주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존재의 우연성은 시저가 특정 지각을 갖는 것 자체의 우연성과 유관한 설명을 제공해주기는 한다. 왜냐하면 시저가 특정 지각을 갖기 위해서는 일단 그가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시저가 존재하는 것이 우연적이라면, 시저가 루비콘을 건너는 지각을 갖는 것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우연적이다. 그러나 나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관찰에 근거해서 존재의 우연성 역시 지금 우리가 주목하는 피조물의 우연성을 설명해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로 라이프니츠가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단지 시저가 루비콘을 건너는 것의 우연성이 아니라, 시저가 신에 의해서 창조된다는 가정 하에서 루비콘을 건너는 것의 우연성에 해당한다. 라이프니츠가 분명한 언어로 말하듯이, 신의 자유로운 명령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시저가 창조된다는 가정으로부터 그가 루비콘을 건넌다는 결론이 따라 나오지 않는다. 두 번째로 나는 라이프니츠의 이른바 일반적인 관점 전략에 주목한다. 이에 따르면 시저가 속한 인간종의 개념으로부터 함축되는 술어들 그리고 오직 이러한 술어들만이 시저의 본질적 술어에 해당하며, 시저와 본질적 술어들 사이의 연결은 신의 자유로운 명령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런데 존재의 우연성을 통해서는 라이프니츠가 강조하는 본질적 술어와 우연적 술어의 이러한 구분을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본질적 술어이든 우연적 술어이든 해당 개체가 존재하지 않고서는 그 개체에게 참되게 귀속될 수 없다는 점에서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해석에서 아담스는 라이프니츠의 무한 분석 이론을 사용한다. 나는 무한 분석 이론에 근거해서 시저가 루비콘을 건너는 것의 우연성을 설명할 수 있다는 주장 자체에는 어느 정도 동의한다. 그러나 나는 두 번째 해석 또한 『논고』 및 서신 교환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제공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문헌들에서 라이프니츠가 무한 분석 이론을 사용하고 있다고 볼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때로는 무한 분석 이론과 명백하게 충돌하는 서술들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관찰들을 통해서, 라이프니츠가 『논고』 §13 및 관련 서신에서 제시하는 논거들이 무한 분석 이론의 논거들과는 구분되는 독자적인 것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4장에서 나는 『논고』 및 서신 교환을 이해하는 대안적 해석을 제안하였다. 우선 나는 서신의 다음과 같은 서술에 주목한다.



다수의 아담들에 대해 말할 때, 나는 아담을…일반적인 관점에서의 정황들에서 생각되는 어느 한 개인으로 고려하던 것이었다. 신이 기쁨의 정원에 살게 하였으나 죄로 인해서 떠나게 된 최초의 인간 그리고 신이 그의 늑골로부터 여성을 이끌어 낸 최초의 인간으로 아담을 이해할 때처럼 말이다.…이런 방식으로는 이 모든 것들이 들어맞는 서로 구별되는 다수의 가능한 아담들이 있을 터이다.



이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듯이 때때로 라이프니츠는 개체의 이름을 통해서 단지 몇 가지 일반적 정황들을 이해하곤 한다. 라이프니츠가 지적하듯이 이러한 일반적 정황들만으로는 그의 모든 미래가 확실하게 결정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라이프니츠는 이러한 이해 방식을으로는 무한한 수의 가능한 아담들이 있게 된다고 설명한다. 동일선상의 어느 다른 서술에서 라이프니츠는 피조물에 대한 반사실적 조건문을 묻는 맥락에서 이와 같은 이해 방식이 허용된다고 말한다. 만약 시저가 루비콘을 건너는 것의 우연성을 탐구하는 맥락에서도 이러한 이해 방식이 허용된다면, 마찬가지로 우리는 각양각색의 미래로 뻗어나가는 무한한 수의 가능한 시저들을 얻게 될 것이다. 이제 나는 이러한 무한한 수의 가능한 시저들을 통해서 우리 세계의 바로 그 시저에 대한 양상 판단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나는, 시저와 충분히 닮았지만 동일하지는 않은 시저의 상대역들에 의거해서 시저에 대한 양상 판단의 참·거짓을 결정하는 상대역 이론을 라이프니츠 해석으로서 받아들이고자 한다.

나는 앞서 살펴본 여타의 해석들이 매끄럽게 풀이하지 못한 『논고』 §13 및 관련 서신의 우연성 주장을 상대역 이론을 통해서 일관적으로 그리고 자연스럽게 풀이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상대역 이론의 적용을 정당화하고자 했다. 만약 상대역 이론을 받아들인다면, 시저가 루비콘을 건너는 것이 그 자체로 우연적이라는 주장은 비교적 수월하게 풀이된다. 만약 시저의 상대역들 중에 루비콘을 건너지 않는 상대역이 있다면 그에 의거해서 시저가 루비콘을 건너지 않을 수 있었다는 양상 판단이 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저가 루비콘을 건넌다.는 문장의 참이 신의 자유로운 명령에 의존한다는 사실로부터 이 문장의 참을 우연적으로 만들어주는 상대역이 존재한다는 것이 함축된다. 라이프니츠는 신의 자유로운 명령에 의존하는 참이 우연적인 까닭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명령들은 사물들의 가능성을 변화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덜 완전한 것이 그 자체로 가능하게 남아 있는 것을 막지는 않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거부되도록 만드는 것은 그것의 불완전성이지 불가능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대가 가능한 어떤 것도 필연적이지 않다.



이처럼, 최선의 세계와 대비되는 의미에서, 덜 완전한 세계들이 그 자체로 가능하게 남아 있다는 사실은 곧 그 세계들 내에 거주하는 시저의 상대역들이 그 자체로 가능하게 남아 있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시저가 루비콘을 건너는 것과 관련해서 그 반대가 모순을 함축하지 않는다.는 문장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풀이할 수 있다. 여기에서 반대는 시저의 상대역이 루비콘 앞에 당도하였으나 결국 루비콘을 건너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반대가 모순을 함축하지 않는다.는 말은 곧 이러한 상대역이 포함된 세계가 그 자체로 가능하게 남아 있다는 것을 뜻한다.

시저가 속한 인간종의 개념으로부터 함축되는 술어 예컨대 사유 가능하다와 같은 술어들이 시저의 본질적인 술어에 해당한다는, 일반적인 관점 전략의 주장 역시 상대역 이론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풀이할 수 있다. 우선 첫 번째로, 인간종의 개념으로부터 사유 가능하다라는 술어가 도출되는 것은, 신의 자유로운 명령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신의 지성에 의해서 파악될 뿐인, 순전한 개념적 참이다. 그렇기에 무한한 수의 완전 개체 개념들 중 그 어느 것도 사람이다를 포함하면서 사유 가능하다를 결여하지 않는다. 두 번째로, 인간 종에 속해야 한다는 조건은 어느 맥락이건 그리고 어느 대상이건 간에 그것이 도대체 시저의 상대역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만족해야 하는 최소한의 유사성 기준으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시저의 모든 상대역은, 그들이 세부적으로 시저와 어느 정도의 유사성을 갖는지 상관없이, 모두 인간이어야만 한다. 이제 시저의 모든 상대역들이 공유하는 술어가 곧 시저의 본질적 술어라는 상대역 이론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일반적인 관점 전략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마지막으로 5장에서는 나의 해석에 제기될 수 있는 한 가지 반론을 고려하였다. 윌슨과 아담스는 상대역 이론을 통해서 신의 우연성을 설명할 수는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들의 문제제기가 옳다면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첫 번째로 상대역 이론은 라이프니츠 철학 내에서 데 레 양상 일반을 설명하는 이론이 될 수는 없다. 두 번째로 신의 우연성을 묻는 맥락과 피조물의 우연성을 묻는 맥락을 구분해서 별도의 설명을 제공하고자 한다면, 그렇게 구분하는 임의적이지 않은 이유가 필요하다. 이에 대해서 나는 라이프니츠가 과연 신과 피조물의 우연성을 하나의 동일한 이론으로 설명하려는 의도를 가졌는지 의심스럽다는 점을 주장했다. 그리고 라이프니츠가 신과 피조물의 우연성을 별개의 논점으로 구분할 수 있는 합리적인 이유를 제공하고자 했다. 우선 라이프니츠는 단지 우연적 존재인 피조물과 달리 필연적 존재자로서의 신은 반사실적 동일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이 둘을 구분할 수 있다. 만약 신에게 반사실적 동일성이 인정된다면 신에게 상대역 이론을 적용하는 동기 자체가 구성되지 않는다. 또한 라이프니츠는 세계 내에서 직접적으로 마주칠 수 있는 여타의 익숙한 피조물들과 달리 신은 세계 내에서 마주칠 수 없는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존재라는 점에서 이 둘을 구분할 수 있다.

물론 아직 남은 문제들이 있다. 특히 이 논문에서 나는 1686년의 『논고』 및 서신 교환으로 탐구의 범위를 제한하고 있기 때문에 과연 이 논문의 해석이 라이프니츠의 전체적인 그리고 최종적인 입장으로 확장될 수 있는지의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이는 자연스럽게 향후의 과제로 남겨놓도록 한다.
Language
Korean
URI
https://hdl.handle.net/10371/144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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