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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사대부 초상화의 제작 및 봉안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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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이성훈
Advisor
장진성
Major
인문대학 고고미술사학과(미술사학전공)
Issue Date
2019-02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Description
학위논문 (박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인문대학 고고미술사학과(미술사학전공), 2019. 2. 장진성.
Abstract
본 논문에서 필자는 조선 후기 초상화가 가진 여러 기능들을 분석함으로써 이 시기에 초상화 제작이 성행하게 된 원인을 밝히는 것을 가장 주요한 목표로 삼았다. 이에 필자는 초상화가 조상 제례에 쓰인 奉安物이란 일반적인 인식에서 벗어나 조선 후기에 일어난 거대한 정치·사회·문화사적 변화의 흐름 속에서 다양한 기능을 가졌던 시각적 이미지란 인식을 가지고 논지를 전개하였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필자는 중국이나 일본 등 주변 국가와 그 성격을 달리하는 조선 후기 초상화 장르의 유행이 단순히 조상 제례를 강조한 유교 문화의 결과물이 아닌 조선 후기 사회에서 특수하게 전개된 문화 현상의 하나였음을 밝히고자 하였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초상화가 이전 시기보다 더욱 다양한 명목으로 제작되고 활용되었음이 여러 사례들을 통해 입증된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 후기에 초상화가 많은 기능(function)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본고에서는 조선 후기 초상화의 奉安과 制作의 문제를 자세히 분석함으로써 이 시기에 초상화가 가졌던 여러 기능들을 조명해 보았다.

조선 후기에 초상화가 가졌던 가장 주요한 기능은 단연 봉안이다. 周世鵬(1495-1554)이 安珦(1243-1306)의 嫡長孫家의 가묘에 대대로 보관되어 온 안향의 초상화를 1543년에 자신이 건립한 紹修書院 내 사당에 걸어 봉안한 이후 사대부들은 祭享 대상 인물의 초상화가 유전되는 것이 있을 경우 그의 초상화를 그를 제향한 원사에 반드시 봉안하거나 보관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초상화 봉안은 士林이나 門中 등 집단을 이룬 양반 사대부들이 그들이 추앙한 先賢이나 遠代의 공동 先祖를 기릴 목적으로 書院, 祠堂, 影堂 등의 院祠를 건립하고 그 원사 내부에 그 선현, 선조의 초상화를 걸거나 보관하는 등의 일련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17세기 후반에 이르면 학파·당파 별 사림의 분화로 이들 집단을 구성하는 양반 사대부들이 자신들의 先師 혹은 자신들의 朋黨을 대표하거나 學脈에서 중요하게 평가되는 인사들이 사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이들을 제향할 목적으로 원사를 세우고 이 원사 내부에 이들이 생전에 제작해 두었던 초상화를 봉안하는 관행이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특정 당파‧학파에 소속된 일군의 사대부들은 이 원사를 自派의 학문적 정체성을 보여주는 공간이자 자파의 활동 거점으로 활용해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하는 발판으로 삼았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원사의 건립이 증가하고 초상화가 원사 내에 둘 수 있는 봉안 대상의 하나로 확고하게 인식되면서 원본 초상화의 복제본, 즉 移摹本의 수요가 크게 증가하였다. 그 결과 안향, 鄭夢周(1337-1392), 李穡(1328-1396), 李齊賢(1287-1367) 등 고려시대의 儒賢, 孔子‧朱子 등 중국의 선현 등을 그린 초상화의 이모본이 활발하게 제작되었으며 이 중 다수의 그림이 여러 원사에 봉안되었다. 이들 유현 및 선현의 초상화를 제작한 인사들 역시 士林이나 門中의 사대부들이었다. 유현 및 선현 초상화의 이모본 제작이 활발해진 사실은 곧 이들의 초상화가 봉안된 원사의 수가 증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 후기 審院 문화의 확산으로 많은 사대부들이 원사를 찾게 되었을 때 초상화 봉안 원사의 수가 늘어난 덕분으로 이들은 이전보다 훨씬 쉽게 선현과 유현의 초상화를 접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사대부들은 초상화가 봉안된 각지의 원사를 방문하면서 초상화를 중요한 瞻拜 대상이자 有用한 그림으로 인식하였다. 당시 알 수 없었던 선현의 風貌를 직접 볼 수 있게 해주고 추모 혹은 존경의 마음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등 초상화가 가진 긍정적인 기능을 이들은 인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당시 사대부들이 사림 간에 존경을 받을 정도로 학행이나 덕행을 이룬 학자나 惠政을 펼쳐 일반 民들로부터 존경을 받은 관리라면 그의 초상화 제작도 불가할 것이 없다는 인식을 가지는데 일조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대략 17세기 말을 기점으로 초상화 제작은 큰 폭으로 증가하였다. 이때 여러 새로운 초상화 제작 관행이 등장하였다. 이 새로운 제작 관행 중 가장 우선적으로 주목되는 것은 선사 초상화의 제작이다. 성리학의 발달과 사림의 성장으로 사대부 간에는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선현과 유현에 대한 崇慕熱이 일어났으며, 이와 함께 선현과 유현의 초상화는 예배 및 첨배의 대상으로 중요하게 인식되고 다루어졌다. 이러한 현상은 곧 사대부들 사이에 자신들이 존경했던 선사의 초상화를 제작하는 관행이 크게 유행하는데 중요한 요인이 되었음을 알려준다. 사대부들은 선현과 유현의 초상화가 지금에 전해져서 자신들이 그의 풍모를 알 수 있었던 것처럼 자신들이 존경했던 선사의 모습 역시 초상화로 남겨져 後人들이 그 선사의 풍모를 알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자신들이 흠모했던 선사의 초상화 역시 후인들에게 첨배 및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이들은 기대하였다.

18세기에 이르러 일부 사대부들이 他者에 의해 자신의 초상화가 그려지기를 막연히 기다리지 않고 儒服을 착용한 모습으로 자신의 초상을 스스로 주문해 제작하는 일이 성행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성격을 갖는 유복본 초상화의 제작은 宋代 문인들이 자신들의 別墅, 書齋 등에 걸어둘 목적으로 자신의 초상화를 주문‧제작했던 관행에 그 연원을 둔다. 송대의 초상화 제작 전통은 고려에 전해진 이후 조선 후기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져 왔다. 조선 후기에 사대부들은 자신의 초상화에 自贊文 혹은 親友 등의 贊文을 적어 넣거나 자신의 철학과 사고가 투영된 상징물을 초상화에 그려 넣음으로써 자신들의 자의식이나 내면 의식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특히 사대부들은 무엇보다 隱逸의 삶에 대한 희구를 그 초상화 속에 드러내고자 하였다. 사대부들이 자신의 초상화에서 관복이 아닌 유복을 착용한 모습으로 스스로를 형상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관복을 착용한 모습의 초상화도 많이 그려졌다. 관복본 초상화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生祠 봉안용으로 그려진 지방관들의 초상화였다. 이러한 성격을 갖는 초상화는 17세기 말-18세기 초에 집중적으로 제작되었다. 이 시기 특정 지역의 향리 및 民들이 惠政을 펼친 해당 지역 관리의 초상화를 그리고 이를 봉안하기 위한 生祠를 짓는 관행이 크게 성행하였다. 생사의 건립을 주도한 향리들은 善政을 펼친 지방관에 대한 감사의 마음에서 이를 추진하였다. 한편 지방관은 자신의 이름과 모습을 남기려는 열망에서 지역 향리들이 중심이 되어 추진한 생사 조성 사업에 부응하였다. 특히 17세기 말-18세기 초에 평안도관찰사 및 평양서윤에 임명된 관리들 중 다수가 생사 봉안용 초상화를 제작한 일은 생사 초상화 제작이 평양 등 일부 지역에서는 하나의 관행으로 굳혀져 크게 성행한 사실을 알려준다.

조선 전기부터 가장 많이 그려졌던 관복본 초상화는 功臣像이었다. 조선 후기에도 공신상 제작은 지속되었다. 이 시기에 공신상은 1680년, 1723년, 1728년 세 차례에 걸쳐 제작되었으며, 1750년에는 奮武功臣의 초상화를 다시 제작하는 사업이 진행되었다. 1728년 이후 공신 책록이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공신상 제작은 1750년 이후 중단되었다. 공신 책록 횟수가 줄어들던 17세기 말 이후 국왕이 자신의 측근 신하들을 그린 초상화 제작을 빈번하게 지시하고 왕의 지시로 완성된 초상화는 해당 신하들에게 수여되거나 大內 혹은 관련 기관에 보관되는 일이 본격적으로 확인된다. 국왕은 이러한 측근 신하들을 위한 초상화 제작 및 수여를 통해 지근거리에서 자신을 보좌한 신하들에 대한 자신의 총애를 드러내고자 하였다. 공신 책록 때만 한정해서 제작되었던 초상화를 상시적으로 만들어 이를 측근 신하들에게 恩賜한 대표적인 왕은 英祖(재위 1724-1776)였다. 그는 신하들의 초상화를 빈번하게 제작하게 해서 완성된 正本을 이들에게 하사하였다. 아마도 그는 공신에 책록되었던 신하들처럼 자신에게 충심을 보였거나 탁월한 능력으로 국가 발전에 공헌한 자신의 신료들도 그 모습이 남겨져 후대 사람들에게 忠臣 혹은 良臣으로 기억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영조는 肅宗(재위, 1674-1720)의 주문에 의해 최초로 제작된 耆老臣들의 초상화첩 제작을 정례화시켜 재위 기간 동안 총 6차례나 耆社 초상첩을 제작하였다. 아울러 그는 1750년에 분무공신들의 초상화를 22년 만에 다시 제작케 하여 이것을 忠勳府에 보관하는 한편 공신들에게 하사하였다. 또한 그는 登俊試 시행과 같은 특정한 국가 행사를 계기로 신료들의 초상화첩 제작을 지시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에 초상화는 국왕이 공신이나 일반 신하에게 내린 賜恩의 표지로서, 특정 지역민들이 자신들의 지역에 惠政을 남긴 수령에 대한 報恩의 증표로서 기능하였다. 또한 이 시기의 초상화는 특정 학파‧학맥의 인사들이 선사에 대한 尊慕의 마음을 의탁하기 위해 제작한 기념물로서, 아울러 초상화 주인공 스스로가 자신의 형상을 후대에 남길 목적으로 제작한 傳記的 기록물로서도 기능하였다. 이와 같이 초상화의 다양한 기능으로 인해 조선 후기에 이르러 초상화 제작은 크게 성행하였다. 초상화 제작이 활기를 띠면서 초상화를 매우 유용한 그림으로 여기는 사대부들의 인식 역시 널리 확산되었다. 이들은 초상화를 통해 자신들이 名臣, 良臣 혹은 山林學者, 隱逸之士 등의 이미지로 후인들에게 기억되기를 희망하였다. 또한 이들은 초상화를 통해 자신들이 존경하는 인물의 풍모를 직접 볼 수 있었으며 그에 대한 추모의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아울러 이들은 초상화가 심성 도야와 학문 정진에도 도움이 된다고 여겼다. 결국 조선 후기 초상화 제작의 성행은 사림의 성장, 사림의 학파 및 정파 별 분기, 관료 문화의 확립, 국왕권의 강화 등 조선 후기 사회의 정치, 사회, 문화적 변화 속에서 국왕을 비롯한 양반 사대부들이 초상화의 다양한 기능을 인식하게 되었으며 또한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서 초상화란 회화 장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생긴 결과였다.
Language
kor
URI
https://hdl.handle.net/10371/152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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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lege of Humanities (인문대학)Archaeology and Art History (고고미술사학과)Theses (Ph.D. / Sc.D._고고미술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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