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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일본의 內地開放과 淸國人 雜居 問題
19世紀末日本の内地開放と清国人雑居問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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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조국
Advisor
박훈
Major
동양사학과
Issue Date
2012-02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Description
학위논문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동양사학과, 2012. 2. 박훈.
Abstract
內地雜居란 幕末 이래 개항장에 한정되었던 외국인의 거주 및 상공업 활동 등이 일본 內地 전역으로 확대된 전면적 개방, 開國을 의미한다. 雜居 허용 여부를 둘러싼 찬반론, 즉 內地雜居論에 대한 선행 연구는 기본적으로 雜居 대상인 외국인을 歐美人으로 설정하여 다루고 있다. 또한 당시 居留地 외국인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한 淸國人에 대해서는 歐美人 잡거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로서, 주로 하층 노동자 문제에 국한시켜 취급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본고는 淸國人 雜居論의 구체적인 전개와 雜居 정책의 성립 과정을 통시적으로 검토하여, 그동안 단편적으로 연구되었던 淸國人 雜居論을 실질적인 雜居 정책과의 관계 속에서 명확히 드러내고자 하였다. 나아가 근대 일본의 內地 개방 문제가 어떠한 맥락과 배경 속에서 논의되었는지 그 一端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內地雜居의 前史라 할 수 있는 內地旅行을 둘러싼 논란에서부터 우려되었던 것은 서구 자본의 內地 유입 문제였다. 물론 內地雜居論이 본격화되며 오히려 자본 유입이 일본의 발전을 부른다는 기대도 드러나게 되지만, 雜居 찬반론을 막론하고 이 문제가 중요한 논점이 되었던 것이다. 또한 雜居가 자본 유입만이 아닌, 외국 인종의 유입으로 인한 다양한 문제들이 상정되었음을 雜婚 문제를 중심으로 검토해 보았다. 이상의 雜居論은 조약개정 과정에서 법권회복을 전제로 한 정부의 內地開放 선언에 따라 촉발된 것으로서, 歐美人을 雜居 대상으로 상정하여 논의된 측면이 강하다.
하지만 雜居論이 본격화되면서, 在留 외국인 가운데 다수를 차지한 淸國人 문제는 또 다른 측면에서 중요하게 논의되었다. 雜居 찬성론자 가운데에도 淸國人 雜居는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았는데, 이는 일본의 법체제가 우월하다는 인식 하에 상호 영사재판권을 인정한 현 상태를 유지하고자 한 것이었다. 한편 雜居 반대론자들은 歐美人 雜居를 허용할 경우 淸國人 雜居 또한 허용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조약상의 규정 등을 근거로 한 것이 아닌, 古今으로 왕래한 道理나 이웃 나라와의 화친의 交誼로서 뒷받침되었다.
淸國人 雜居의 중요한 논점 가운데 하나는 저임금 하층 노동자의 유입 문제였다. 그러나 이는 명확한 실체가 확인되지 않거나, 현실보다 과장되어 논의되는 등, 淸國人에 대한 편견과 멸시감이 기저에 있었다. 그럼에도 淸國人 노동자 유입에 대한 찬반론은 국민 전체와 노동자 이익의 관계 설정 문제, 在日 외국인의 권리와 의무 문제, 노동 임금과 구매력 및 수출입의 관계를 둘러싼 경제 문제 등 폭넓게 논의되었다. 淸國人 雜居論은 단순히 저임금 하층 노동자 유입 문제에 국한되지 않았고, 외국인 일반의 雜居로 발생할 문제들까지 함께 다루어졌던 것이다.
이를 더욱 분명히 보여주는 사례로 淸國 상인의 內地雜居 문제를 검토하였는데, 淸國人의 뛰어난 상업 능력을 인정하는 논설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관세 문제와 같은 조약상의 이점을 이용하여 이익을 취하는 奸商으로 지목되거나, 무역을 독점할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다. 淸國 상인에 대한 경계심이 지속적으로 표출된 것은 淸國人에 대한 멸시가 바탕에 있으면서도 內地雜居의 주요 논점 가운데 하나인 외국자본의 잠식이 歐美人뿐 아니라 淸國人에게도 해당됨을 뜻하였다. 淸國人의 상업상 능력을 우려하며 支那人의 雜居 또한 歐美人과 똑같이 우리의 商權을 침해한다는 주장은 두 雜居論이 교착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淸國人 雜居가 노동자와 상인으로 구분되어 논의되고, 歐美人 雜居와 공통된 지점이 있었다는 사실은, 이후 淸國人 雜居 정책에도 반영되었다. 淸日戰爭으로 공포된 칙령 137호는 淸國人에 대한 등록제와 엄격한 입국 제한이라는 특징을 지녔다. 이는 戰時의 특별 상황에서 淸國人을 관리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1899년 칙령 352호가 제정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칙령 137호에서 352호로의 이행과정에서 居留地 이외 지역에서의 상업 활동에 대한 허락을 別記했던 勅令案(1897年案)의 존재는 주목할 만하다. 결국 칙령 352호는 각의와 추밀원 심사를 통해 수차례의 수정을 거쳐 단순 노동자의 雜居를 제한하는 형태로 귀결되었다. 그리고 칙령의 문면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단순히 노동자의 雜居를 제한하는 것이 아닌, 유입(=입국) 자체를 방지하려는 목적이 칙령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칙령의 성격에 영향을 미친 요인들은 다양한 각도에서 검토가 가능하다. 淸日戰爭의 승리로 淸國에 대한 멸시감의 확대·고착화 속에 저임금 하층 노동자 문제가 더욱 부각되었다. 일본 노동자들은 淸國 노동자 雜居 반대를 위한 조직적 운동을 전개하여 노동자 배제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였다. 한편 戰爭 이후에도 잔존하던 淸國 상인의 위협은 淸國人을 東亞의 유태인으로서, 淸國과 淸國人을 분리하는 논리 속에 표출되었다. 하지만 淸國 상인은 위협적인 동시에 현실적인 이해가 얽혀 있어 무조건 배제할 수 없는 존재였다. 뿐만 아니라 淸國 상인 스스로도 자신들의 商權을 지키기 위해 內地雜居를 위한 진정서를 제출하고 정부 인사들에게 로비를 시도하는 등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그 과정에서 이들이 노동자 문제를 자신들과 분리하는 입장을 취한 점은 淸國人 전체로 수렴되지 않는 이해관계가 雜居 문제 속에 있음을 보여준다.
淸國人 內地雜居는 淸國, 淸國人에 대한 멸시 속에서 歐美人 雜居와는 다른 문제로 취급되었다는 점에서 차별과 배제의 원리가 적용된 측면이 있다. 하지만 본고는 오히려 이러한 원리가 일률적으로 적용되지 않은 점에 주목하였다. 淸國人 內地雜居論은 아시아에 대한 침략과 제국주의적 팽창으로 나아간 일본의 대외적 행보를 투영하면서도, 淸國人이라는 단일한 단위로 이들을 취급할 수 없었던 일본 내부의 현실적 상황을 반영했던 것이다.
  内地雑居とは幕末以来開港場に限られた外国人の居住及び商工業活動などを日本内地全域まで拡大した全面的開放、開国を意味する。雑居の賛否をめぐる議論、すなわち内地雑居論に関する先行研究は基本的に雑居対象の外国人を欧米人として設定して扱われて來た。また、当時居留地の半数以上を占めていた清国人については欧米人の雑居とは異なる次元の問題として、主に下層労働者問題だけで取り扱う場合が多い。本稿は清国人雑居論の具体的な展開と雑居政策の成立過程を通時的に検討し、いままで断片的に研究された清国人雑居論を実質的な雑居政策との関係のなかで明らかにしようとした。そして近代日本の内地開放問題がいかなる脈絡と背景の中で議論されたのか、その一端を糾明しようとした。
  内地雑居の前史と云える内地旅行論から論難になったのは欧米資本の内地流入問題であった。もちろん、内地雑居論が本格化になると資本流入が却って日本の発展を齎すという期待も現れたが、雑居賛否を問わずにその問題が重要な論点になったのは確かだ。また雑居が'資本'流入のみならず、外国'人種'流入によって発生する様々な問題が想定されるのを'雑婚'問題を重心に検討してみた。ところが、このような雑居論は条約改正の交渉のあいだに法権回復を前提にした政府の内地開放宣言から始まったので、欧米人を雑居対象として想定する一面がある。しかし雑居論が本格化しながら、在留外国人の多数をしめた清国人問題もまた重要に議論された。雑居賛成論者のなかでも清国人雑居は禁止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の主張が多かったが、これは日本の法体制が優越するとの認識の下に相互領事裁判権を認めた当時の状態を維持するためであった。一方、雑居反対論者は欧米人雑居を許容する場合、清国人雑居もまた許容するしかないと主張した。これは条約上の規定などに基づいたものでなく、'古今から往来した道理'や隣国との'和親の交誼'として裏付けられた。
  清国人雑居の重要な論点の一つは低賃金下層労働者の流入問題であった。しかし、これは明確な実体が確認されなかったり、誇張されて議論したりするなど、清国人に対する偏見と蔑視があった。それにもかかわらず、清国人労働者の流入に対する賛否論は国民全体と労働者利益との関係、在日外国人の権利と義務の問題、労働賃金と購買力及び輸出入問題との関係など、幅広く議論された。清国人雑居論は単に低賃金下層労働者の流入問題に限らず、外国人一般の雑居から発生する問題まで共に取り扱われたのだ。
  これを一層明らかに示す事例として清国商人の内地雑居問題を検討してみた。清国人の優れた商業能力を認める論説を所々から確認することができる。特に関税問題のような条約上の利点を利用して利益をとる'奸商'や、貿易を独占する憂慮もあった。清国商人に対する警戒は内地雑居の主要な論点の一つであった'外国資本の蚕食'が欧米人のみならず、清国人にも該当するのを意味する。清国人の商業能力を憂慮して"支那人の雑居亦欧米人と均く、我商権を侵すことは疑ふべからず"との主張は二つの雑居論の交錯を象徴的に示している。
  清国人雑居が労働者と商人とを区分して議論される一方、欧米人雑居と共通点があったという事実は以後、清国人雑居の政策過程にも反映された。日清戦争に公布された勅令137号は清国人に対する登録制と厳格な入国制限という特徴を持った。これは戦時の特別状況で清国人を管理するためであったが、1899年の勅令352号が制定されるまで維持された。勅令137号から352号への履行過程で居留地以外の地への'商業活動'に対する許諾を別記した勅令案(1897年案)の存在は注目に価する。結局、勅令352号は閣議と枢密院審査を通じて数回の修正を経て単純労働者の雑居を制限する形態で帰結された。そして勅令の文面に現れなかったが、単に労働者の雑居を制限するのではなく、'流入(=入国)'そのものを防止しようとする目的が勅令にあったことを確認することができた。
  勅令の性格に影響を及ぼした要因は多様な角度から検討が可能である。日清戦争の勝利で清国に対する蔑視感の拡大・固定化の中に低賃金下層労働者問題がより一層浮び上がった。日本労働者は清国労働者の雑居反対のために組織的な運動を展開して、労働者排除政策に影響力を行使しようとした。一方、戦争以後にも残存した清国商人の威嚇は清国人を'東亜のユダヤ人'として、清国と清国人を分離する論理の中に表出された。だが、清国商人は威嚇的であると同時に現実的な利害が絡まっていて無条件に排除することはできない存在であった。それだけでなく、清国商人自らも自分たちの商権を守るために内地雑居の陳情書を提出しながら政府の人々にもロビーを試みるなど積極的な動きを見せた。その過程で労働者問題を自分たちと分離する立場を取った点は清国人全体で包括されない利害関係が雑居問題の中にあることを見せている。
  清国人内地雑居は清国、清国人に対する蔑視の中で欧米人雑居とは違った問題で扱われたという点から考えれば差別と排除の原理が適用された側面がある。だが、本稿はかえってこのような原理が一律的に適用されない点に注目した。清国人内地雑居論はアジアに対する侵略と帝国主義的膨張に進んだ日本の対外的な歩みを投影しながらも、'清国人'という単一な単位で取り扱われなかった日本の内部の現実的な状況を反映したのであった。
Language
kor
URI
https://hdl.handle.net/10371/154828

http://dcollection.snu.ac.kr/jsp/common/DcLoOrgPer.jsp?sItemId=000000001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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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lege of Humanities (인문대학)Asian History (동양사학과)Theses (Master's Degree_동양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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