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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평화기념공원 형성과정 비교연구
오키나와, 타이페이, 제주의 사례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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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김민환
Advisor
정근식
Major
사회학과
Issue Date
2012-02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Abstract
본 연구는 오키나와평화기념공원, 대만 타이페이2·28평화기념공원, 제주4·3평화공원 등 동아시아 세 곳의 평화기념공원이 형성되는 과정에 대한 비교연구를 수행했다. 이 세 곳의 평화기념공원은 영웅주의와 피해자 민족주의에 기대어 국민국가의 동질성을 확보하는 기존의 추모시설과는 달리 국민국가 내부의 균열을 드러내는 추모시설이다. 국민국가 외부의 적이 아닌 국민국가의 영웅들에 의해 사망한 국민국가 내부의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시설이기 때문이다. 이것 이외에도 이들 세 곳의 평화기념공원은 세 가지의 공통점을 갖는다. 평화기념공원 조성의 시기가 유사하며, 평화기념공원이 위치한 지역이 국민국가 내에서 갖는 주변으로서의 위상이 비슷하다. 이들의 마지막 공통점은 평화라는 명칭 자체에 있다.
본 연구는 이 네 가지 공통점을 낳게 한 공통의 규정력을 전제한다. 그것은 개별 국민국가 수준을 넘어서는 동아시아적 힘인데, 본 연구에서는 이를 동아시아 냉전-분단체제라고 명명한다. 본 연구에서 동아시아 냉전-분단체제의 변동은 개별 국민국가 차원에서 진행되는 평화기념공원 형성과정의 비교연구를 위한 공통의 역사적 맥락으로서 기능한다. 세 곳의 평화기념공원 성립과정에 대한 비교연구는 동아시아 냉전-분단체제의 성립 및 변동이라는 국면에 따라 수행되었다.
본 연구에서는 오키나와전, 대만2·28사건, 제주4·3사건을 식민지-제국체제 해체 이후 냉전-분단체제라는 새로운 질서를 창출한 창법적 폭력(創法的 暴力, die rechtsetzende Gewalt)으로 규정했다. 동아시아 냉전-분단체제가 첫 번째 변동기를 맞기 전까지 창법적 폭력은 이항대립적이고 상호배제적이며 적대적인 내용을 특징으로 하는 냉전-분단적 해석에 의해 지배되었다. 특히 승리자의 해석은 창법적 폭력에 대한 그 사회의 공공기억을 구성하게 되었고 과거 도전세력들의 해석이 다시 부상하지 못하도록 폭력적인 조치가 취해졌다. 대만2·28사건과 제주4·3사건은 이런 방식의 전형적인 양상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오키나와전에 대한 패배자(일본)의 기억은 비교적 빠른 시기에 부활하여 지배적 해석으로 자리잡았다. 그것은 동아시아 냉전-분단체제에서 오키나와와 나머지 두 지역이 차지하는 위상이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냉전-분단체제에서 체제의 중심인 일본은 데탕트 시대의 냉전약화-분단해소의 효과로 오키나와와의 분단이 해소되었으며, 이 때문에 오키나와전에 대한 일본의 해석이 공식화할 수 있었다. 반면, 똑같은 시기에 체제 주변인 한국과 대만에서는 오히려 냉전강화-분단심화라는 효과가 발생하였고, 이것은 승리자의 해석을 강화시켰다.
정치적 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창법적 폭력에 대한 대안적 해석들이 세 곳 모두에서 등장하게 되었다. 창법적 폭력에 대한 이런 대안적 해석은 모두 사건이 발생한 지방의 상황을 우선시하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또한, 창법적 폭력이 발생한 지역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이런 대안적 해석은 희생자들의 복잡하고 복합적인 성격을 부각하였고, 이에 따라 가해자 및 피해자의 규정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창법적 폭력에 대한 대안적 해석의 제도화에 영향을 미친 변수는, 대안적 해석을 제기하는 세력의 주체적 역량과, 기존의 지배적 해석을 지지하는 세력의 저항의 강도였다. 대안적 해석을 제기하는 세력과 기존의 해석을 지지하는 세력 사이의 힘 관계는 창법적 폭력에 대한 이행기 정의의 모델이 이 세 지역에서 각기 다르게 나타나게 했다. 창법적 폭력에 대해 대안적 해석을 제기한 세력들의 주체적 역량은, 그들이 민주화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가로 측정될 수 있었다. 민주화 운동에 주도적으로 개입했던, 대만2·28사건 평반운동 세력은 2·28사건에 대한 이행기 정의를 진실·정의 모델로 수행하려고 했던 반면, 민주화 운동이 확장시켜 놓은 정치적 기회구조를 사후적으로 활용했던 제주4·3사건의 진상규명 세력들은 진실·화해 모델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오키나와의 경우에는 지역적 차원에서 진실·정의 모델을 추진했지만, 그 방향이 오직 일본군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전쟁의 다른 가해자인 미군에 대한 진실·정의의 추구는 거의 포기되었던 것이다. 이런 특징 때문에 오키나와의 사례는 부분적 진실·정의 모델이라고 범주화했다. 이행기 정의 모델의 차이를 낳은 또다른 변수는 기존의 냉전-분단적 해석을 유지하고자 하는 세력들의 힘의 차이였다. 대만2·28사건의 경우, 기존의 냉전-분단적 해석을 유지하려는 세력들은 대안적 해석을 제기하는 세력들의 도전에 매우 취약했다. 반면, 제주4·3사건과 오키나와전에 대한 기존의 해석을 고수하려는 세력의 힘은 매우 강했다.
창법적 폭력에 대한 대안적 해석은 기존의 냉전-분단적 해석을 지지하는 두 세력과의 협동-갈등 관계를 거치면서 제도화되었다. 이 과정 속에서 기존의 정치적 연대는 해체되고 새로운 정치적 연대가 형성되기도 했다. 특히 창법적 폭력에 대한 대안적 해석이 규정한 희생자의 범주는, 기존의 이항대립적 해석에서 제시한 희생자 규정에 의해 발생한 피해자들의 연대 구조를 변화시켰다.
오키나와, 대만, 제주에서 평화기념공원 성립과정을 주도했던 세력은 창법적 폭력에 대한 대안적 해석을 제기했던 세력들이었다. 이들은 창법적 폭력에 대한 냉전-분단적 해석을 지지하는 세력들과 때로는 투쟁하고 때로는 타협하면서 자신들의 해석을 평화기념공원이라는 공간에 최대한 반영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들의 성과는 그들 자신의 주체적 역량과 도전세력들의 저항 정도에 따라 다르게 결정되었다.
오키나와전에 대한 일본군 책임론을 주장했던 세력들은 마부니 언덕 위의 일본 국가주의적 공간에 맞설 새로운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은 두 범주의 도전세력과 맞서야만 했다. 일본 국가주의를 지지하는 일본 내의 세력들과 일본과의 일체화를 주장한 오키나와 내부의 보수세력이 그들이었다. 전자에 대해 그들은 마부니 언덕 위의 공간을 그냥 방치함으로써 마찰을 피했다. 일본과의 일체화를 주장하는 오키나와 내부의 세력들은 구자료관의 전시내용을 바꾸려고 시도했으며, 실제로 그들의 시도가 일부 관철되었다. 대만 타이페이2·28평화기념공원의 구성요소들은 중국민족주의 세력과 대만민족주의 세력에 의해 순차적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타이페이2·28평화기념공원은 대만민족주의적인 내용이 우세했다. 제주4·3평화공원 형성에 창법적 폭력에 대해 폭동론적 해석을 지지하는 세력들은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비록 이들 세력이 직접 개입하지는 못했지만, 이들 세력의 강력함은 공원 조성의 모든 순간에서 확인되었다. 평화공원 조성의 모든 과정에서 아른거림(absent presence)으로써 폭동론은 제주4·3평화공원을 국립묘지 모델과 유사하게 이끌어 갔으며, 제주4·3평화기념관의 전시내용에도 영향을 미쳤다.
세 곳의 평화기념공원에서 창법적 폭력에 대해 냉전-분단적으로 해석하는 세력들이 각각 행사한 힘의 차이는 피해자를 선정하는 방식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오키나와평화기념공원에서 피해자로 선정되기 위해서는 대상자의 피해상황이 오키나와전과 관련이 있느냐 하는 점만 확인되면 되었다. 이 방식은 대만에서 피해자가 결정되는 방식과 동일했다. 반면, 제주4·3평화공원에서는 피해자로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국가에 의해 심사를 받아야만 했다. 그 때문에 심사를 통과하지 못한 무장대 관련 희생자들은 피해자로서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고 그들의 이름은 제주4·3평화공원의 위패봉안소 및 각명비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창법적 폭력 희생자들은 각각의 평화기념공원에서 다른 방식으로 재현되었다. 타이페이2·28평화기념공원에서는 희생자들은 집단주의적 방식으로 재현되었다. 희생자들의 개별성을 드러내지 않고 그들을 동일한 하나의 범주로서 집단적 주체로서 재현한 것이다. 반면, 오키나와평화기념공원과 제주4·3공원은 희생자들의 개별성을 충분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 개별성이 최종적으로 향하는 곳은 이 두 지역에서 차이가 났다. 오키나와평화기념공원에서 희생자들은 비록 개별적으로 각명되어 있지만, 개인-가족-친족-공동체가 연결되게 되어 있었고, 따라서 개별적으로 각명된 희생자들은 궁극적으로 공동체에 귀속되는 방식으로 재현되어 있다. 한편, 제주4·3평화공원의 위패봉안소나 각명비에서의 드러난 개별성은 개별성 자체로 남게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개별성을 한데 묶는 것은 국가에 의해 제공된 행정구역이었다. 제주4·3사건은 제주도 내 여러 공동체의 소멸이라는 피해를 낳았는데, 이 부분이 제주4·3평화공원 내에서는 제대로 부각되지 않았다.
동아시아의 평화기념공원의 성립 자체는 동아시아적 차원에서 냉전-분단의 해소과정을 암시하지만, 완전한 해소가 아니라는 점에서 평화기념공원은 평화기념공원이 아니라 오히려 전장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들의 명칭에 공통으로 평화라는 단어가 선택된 것은 동아시아 냉전-분단체제의 완전한 해체 과정에서 폭력적 수단이 개입되어서는 안된다는 의지의 표출로 해석해야 한다. 오키나와, 대만, 제주도는 모두 두 차례의 동아시아 체제 변화 과정에서 폭력을 경험했다. 동아시아가 중국에 의한 조공-책봉체제에서 일본에 의한 식민지-제국체체로 이행할 때, 이 세 곳은 모두 식민주의적 폭력을 경험했던 곳이다. 또한 일본의 패전 이후 동아시아가 식민지-제국체제에서 냉전-분단체제로 이행했을 때, 이 세 곳에서는 참혹한 폭력이 발생했다. 동아시아 냉전-분단체제에서 다음의 동아시아 체제로 이행할 때 평화적인 방식으로 체제이행이 이루어진다면, 이 세 곳에서 폭력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혹시라도 새로운 동아시아 체제가 또다른 창법적 폭력을 수반하여 성립한다면, 또다른 창법적 폭력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 지역은 여전히 이 세 지역이다. 개별 국민국가 차원에서 만든 창법적 폭력 희생자들을 위한 평화기념공원은, 조성을 주도했던 세력들이 의도했던 그렇지 않던, 동아시아 냉전-분단체제의 완전한 해체 및 새로운 동아시아 체제 형성이라는 앞으로의 과정에서 평화가 무엇보다도 우선해야한다는 점을 공통으로 발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This dissertation is a comparative study on the formation of Okinawa Peace Memorial Park, Taipei 228 Peace Memorial Park, Jeju April 3rd Peace Park.
Theses three peace memorial parks share similarities in that they reveal the ruptures of nation states compared to other commemorating facilities for identity building. These are the commemorating facilities of the victims sacrificed by the heroes of nation states not by external enemies. Aside from this, they share three similarities: firstly, they were built during similar times; secondly, they were located on the marginal sites of nation states; and lastly, they include peace in the title of commemoration facilities.
This study presumes common prescriptive power which yielded four similarities. That is the East Asian force, which goes beyond an individual state and I conceptualize this as the Cold War System of Divided East Asia. In this study, the changes of the Cold War System of Divided East Asia provides the shared historical context for comparing the formation of peace memorial parks. Through the comparative study on the formation of three peace commemorating parks, I analyzed the formation and transition of Cold War System of Divided East Asia.
In this study, I conceptualized battle of Okinawa, the Taiwan February 28 Incident, the Jeju April 3 Incident as the cases of founding violence(創法的 暴力, die rechtsetzende Gewalt) which produced the new order of East Asia Cold War-Division System. Before the first transition of the Cold War System of Divided East Asia, narratives on founding violence was dominated by cold war and division centered interpretation which characterized dichotomous, exclusive and hostile contents. Moreover, the interpretation of the victors dominated the public memory of the society on the founding violence and adopted violent methods of repressing other contesting interpretations. The commemoration for the Taiwan February 28 Incident and the Jeju April 3 incident epitomized such tendency. However, the memory of the loser(Japan) on Okinawa battle was relatively quickly resurrected and was replaced as dominant interpretation. This is caused by the difference of location of three places. Japan, the center of Cold War System of Divided East Asia experienced the end of division of Okinawa thanks to the weakened Cold War during the period of detente. Therefore, the Japanese interpretation on Okinawa battle could gain public recognition. However, in South Korea and Taiwan, the borderline locations on the system induced strengthened cold war and fixed division and this again bolstered the interpretation of the victors.
With political changes, three alternative interpretations on founding violence emerged in all three places. Such alternative interpretation on founding violence tended to emphasize the locality of the places. Moreover, such narrative focusing on specificity of locations highlighted complex and multiple aspects of victims and blurred the boundary between violators and victim.
Variables which affected the institutionalization of alternative narratives were firstly the capacity of agent which created alternative interpretation and secondly the depth of resistance of the groups in alliance with dominant interpretation. The power relation between the group for alternative narrative and the group for dominant interpretation showed variations of transitional justice model of founding violence in three locations. The capacity of the group for the alternative narrative on founding violence could be measured by their roles during democratization. Rehabiliating Movement at The Taiwan February 28 incident was very active in the democratization and tried to perform truth/justice model for transitional justice. However, the group for truth finding of the Jeju April 3 Incident had no choice but to follow truth/reconciliation model, since they appropriated the political structure of opportunities which were developed by democratic movements. In Okinawa, they pursed truth/justice model in the region, only centered on Japanese army. The other violator, American military did not emerge as the issue of truth/justice. Therefore, Okinawa case can be categorized as partial truth/justice model. Another variable producing the differences of transitional justice model was the differences in forces between the groups for dominant cold war-division narrative in each country. In the case of Taiwan February 28 Incident, the group for dominant cold war-division narratives were very vulnerable to the challenges of alternative narratives. However, the groups upholding dominant narratives in Jeju April 3 Incident and battle of Okinawa were relatively stronger than the former.
The alternative narratives on founding violence could have been institutionalized through both negotiation and conflicts between cold war narratives. In this process, existing political solidarities were dismantled and new political bonds were established. Especially, the category of victims written by alternative narratives on founding violence transformed the structure of solidarity between victims who suffered from the categorization of dichotomous narratives.
The groups who led the formation of peace memorial parks in Okinawa, Taiwan and Jeju were the very forces which provided alternative narratives on founding violence. They were sometimes in conflicts and other times in alliance with the groups maintaining cold war division interpretation on founding violence, only to represent their interpretations within the peace memorial park as much as possible. However, their success were varied differently determined by the capacities of agents and the backlash of dominant groups.
The group insisting the responsibility of Japanese military on Okinawa battle tried to build a new space against the Japanese nationalist space on the mabuni hill. However, they had to fight back two types of backlash. The one was the group upholding Japanese nationalism and the other was the group which claimed for the identification with Japan. The former tried to change the contents of old exhibition and their efforts partly made success. The elements of Taipei 228 Peace Memorial Park were created by Chinese nationalists and Taiwanese nationalists in succession. However, Taiwanese nationalism prevailed in the formation of Taipei 228 Peace Memorial Park. As for the creation of Jeju April 3 Peace Memorial Park, the group upholding the riot narrative on founding violence did not directly engage with the formation of the memorial park. Nevertheless, their presence could be witnessed all through the process of constructing the memorial park. The riot narrative dominated Jeju April 3 Peace Memorial Park in all the process of the construction of the memorial park in the form of absent presence and strongly affected the contents of the display of Jeju April 3 Peace Memorial Park.
The differences of forces of the groups providing the interpretation on founding violence could be also observed in the selection of victims. In Okinawa, the criterion for victims were the recognition of victims relations with Okinawa battle. This method was identical to the Taiwanese criterion for victims. However, in Jeju 43 peace park, the victims had to go through the official review process conducted by the state. Therefore, the victims who did not pass the review, especially victims related with militia could not be recognized as victims. Therefore, their names disappeared in All Soul's Altar and Memorial Tower of Jeju April 3 Peace Memorial Park.
The victims of founding violence were represented in different ways at each memorial park. The victims at Taipei 228 Peace Memorial Park were represented in collective ways, without revealing individuality of victims. They were represented as collective bodies belonging to the identical category. However, the victims of Jeju April 3 Peace Memorial Park and Okinawa Peace Memorial Park captured the individuality of victims. However, such individuality was also differently represented in each region. At the Okinawa Peace Memorial Park, the names of victims were individually inscribed revealing the connections of individual: family- relatives-community. Therefore, individually inscribed victims still held places in a community in the end. On the other hands, the individuality revealed in All Soul's Altar and Memorial Tower of Jeju 43 Peace Memorial Park did not contain the information on community. The only binding device to hold them together was the official administrative addresses where victims belonged to when they were alive. Those addresses were drawn by state power regardless of community. The destruction of many communities induced by the Jesu April 3rd incident were concealed at the memorial park.
The establishment of peace memorial parks in East Asia implicates the end of cold war and division at the level of East Asia. However, this was not the complete dismantlement that the peace memorial park should be understood rather as war sites than truly as peace memorial parks. Nevertheless, the reason why peace was included in the titles of memorials parks would epitomize the strong will against the intervention of violence at the process of dismantlement of the Cold War System of Divided East Asia. Okinawa, Taiwan and Jeju islands experienced severe violence at the process of East Asian system changes. When East Asia was transformed from Chinese tributary system to Japanese colonial/imperial system, these three regions experienced colonial violence. Moreover, after the defeat of Japan, East Asia was transformed from colonial-imperial system to Cold War system of Divided East Asia, these three regions underwent tremendous violence again. If the transfer of East Asian Cold War-Division system to the next system are managed in peaceful ways, these regions could be hopefully spared from violence. Nevertheless, if the next new East Asian system accompanies founding violence again, it will be highly likely that these regions will become the sites of founding violence once again. Peace memorial parks for the victims of each nation state send a strong message that peace should be firstly considered in the process of complete dismantlement of cold war and division system and the creation of new East Asian system regardless of the true intention of the groups leading the construction of the parks.
Language
kor
URI
https://hdl.handle.net/10371/156374

http://dcollection.snu.ac.kr:80/jsp/common/DcLoOrgPer.jsp?sItemId=000000001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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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lege of Social Sciences (사회과학대학)Dept. of Sociology (사회학과)Theses (Ph.D. / Sc.D._사회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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