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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 유인석의 국제정치관과 '중화'사상 : 毅菴柳麟锡的国际政治观与中华思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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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刘晓轩; Liu Xiaoxuan

Advisor
장인성
Issue Date
2020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Description
학위논문(석사)--서울대학교 대학원 :사회과학대학 정치외교학부(외교학전공),2020. 2. 장인성.
Abstract
本文旨在研究国际政局变动下毅菴柳麟锡的中华思想。通过分析将儒教思想进行到底的政治参与型知识分子对近代的应对态度,来展现儒教与近代国际政治相碰撞的历史形态。柳麟锡根据国内外事件的发生,不断调整着自己的对外认识,而这完全取决于其中华思想的变化。因此,要想理解柳麟锡对外认识的变化,研究并追踪其中华思想是有意义的。基于现有研究的局限性,本文将研究时期设置为1866年至1915年柳麟锡逝世,将《毅菴集》与《昭义新编》全篇作为研究材料。以政治学研究方法为主、历史叙事方法为辅,通过与同时期其他儒学家的比较来了解柳麟锡所扮演的角色。

柳麟锡在不断变化的国内外环境影响下调整着自己的华夷观,但他调整华夷观的基本前提是固守尊周论。换言之,在朝鲜被西方侵略而堕落成禽兽之际,柳麟锡的政治思想形成了两个基本轴。一是内在不变的思想轴(固守尊周论),二是外在不断变换的思想轴(华夷观的调整)。为了固守尊周论,他将中华思想从保存中华转变成了复兴中华,同时以中华思想的转变来带动华夷观的调整。即,西洋是禽兽,作为夷狄的日本则成为了比西洋还强大的禽兽。而由于清没有打破朝鲜的原有制度,因此相比日本来讲属于次恶。俄罗斯虽然存在侵略本性,亦可被当作牵制日本的因素。

1876年江华条约缔结之前,柳麟锡以尊周论为契机,将隶属于中华圈的清与日本当作夷狄,将中华圈以外的存在当作禽兽。江华条约缔结后,柳麟锡形成了倭洋一体的思想,他将外来势力对朝鲜的侵略看成对小中华、乃至中华的威胁。1894年甲午更张后,他进一步认识到了日本的侵略本性,将相比之下并没有打破朝鲜原有制度的清,从原本的夷狄身份提升为次恶乃至依靠对象。同时,他意识到日本的西方化程度甚至超越了西方,从而出现了倭洋分离的想法。1912年中华民国实施共和政体时期,柳麟锡终于意识到单凭朝鲜本国的力量难以对抗日本,于是开始出现均势论的思考方式,即提出以中国为宗主国的东洋三国连带论。

如上所述,柳麟锡在一生中多次调整过华夷观。为了救国,他对与清和中华民国相对应的概念-小中华的身份加以利用。但这完全出自于柳麟锡的慕华思想,而并非是想通过小中华来维持事大字小的礼治体系、使弱小的朝鲜从中以谋求生存。也就是说,直到最后柳麟锡依旧试图在小中华的构架内去救国。而这种小中华意识与近代民族主义是存在本质上的区别的。因为他首要守护的并非是民族国家,而是中华秩序的大一统。若以近代国际政治的角度去分析柳麟锡的中华思想,就是用以儒学为契机的中华思想去容纳近代国际法体制。
본 연구는 국제정치적 변동 하에서 의암 유인석의 중화사상을 탐구함으로써, 유교사상을 마지막까지 지키고자했던 정치참여형 지식인의 근대에 대한 대응을 통해, 유교와 근대국제정치 만남의 한 유형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가 국내·외 사건을 전환점으로 대외인식을 수정한 것은 부단히 변화하는 중화사상에서 기인한다. 그러므로 유인석의 대외인식의 변화를 파악하기 위해 그의 중화사상을 이해하고 추적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본 글은 기존연구와 달리 연구시기를 1866년부터 1915년 유인석의 작고까지, 연구 자료를 『의암집』과 『소의신편』 전편으로 선정한다. 또한 정치학적 접근을 중심으로 역사적 기술방법을 보조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당대 기타 유학자와의 비교를 통해 유인석이 처한 위치를 파악하고자했다.

유인석은 조선의 변화하는 국내·외적 환경에 의하여 화이관(華夷觀)을 수정하여왔으나, 그의 '수정된 화이관'의 근저에는 '존주론(尊周論)에 대한 고수'가 깔려있었다. 즉 조선이 서구에 의해 침입되어 '금수(禽獸)로 타락'하게 된 상황에서, 유인석의 정치사상은 내면적으로 변하지 않는 축(존주론을 고수)과 외면적으로 변하는 축(화이관의 수정)을 형성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존주론을 고수하기 위하여 중화사상을 '중화의 보존'에서 '중화의 부흥'으로 전환시켰고, 동시에 이러한 중화사상의 전환으로 화이론의 수정을 이끌어갔다. 즉 서양은 금수이고, 오랑캐였던 일본은 서양보다 더 강한 금수로 변하게 되었으며, 청은 기존의 중화질서를 타파하려 하지 않았으므로 일본보다는 차악(次惡)이고, 러시아는 침략상을 가지고 있지만 일본을 견제함으로써 이용 가능한 요소였다는 것이다.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이전 유인석은 존주론을 기반으로 중화권에 속해있는 청과 일본을 이적(夷狄)으로, 그 외를 금수로 보았다. 강화도조약 체결 후 그는 왜양일체사상을 형성하게 되면서 외세가 조선에 대한 침입을 '소중화', 나아가 '중화'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1894년 갑오개혁에서 일본의 침략상을 인식하게 된 유인석은 조선의 기존질서를 타파하려 하지 않았던 청(淸)을 오랑캐에서 '차악'으로, 나아가 '의존할 대상'으로 격상시켰다. 또한 일본의 서구화 정도가 서구를 초월했다는 왜양분리적 사고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1912년 중화민국이 공화정을 도입하는 시점부터, 그는 조선 자체적 힘으로 일본을 대적하기 힘들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어 균세론(均勢論)적 사고인 중국을 종주국으로 하는 '동양삼국연대론'을 제기하게 된다.

이와 같이 유인석은 평생 화이관을 여러 차례 수정하였고 조선을 구하기 위하여 '청'과 '중화민국'을 상대로 소중화로써의 신분을 이용하였다. 그러나 이는 그의 모화(慕華)사상에서 비롯된 것이지, 소중화를 통한 사대자소의 예치적 국제질서 유지와 그 속에서 약소한 조선의 생존을 도모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다. 즉 유인석은 끝까지 소중화의 틀 속에서 조선을 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소중화의식은 근대 민족주의와 본질적으로 구별이 된다. 그가 가장 우선적으로 수호하고자 한 것은 민족국가가 아니라 중화질서인 대일통(大一統)이었기 때문이다. 근대 국제정치적 시각으로유인석의 중화사상을 분석한다면, 유학을 기반으로 한 중화사상으로 근대국제체제를 포섭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Language
kor
URI
http://dcollection.snu.ac.kr/common/orgView/000000159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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