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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쇼 시기 多國人잡지 『亞細亞公論』의 일본인 필자의 구성과 政論 : 大正期多国人雑誌『亜細亜公論』における日本人筆者の構成と政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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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온우준

Advisor
박훈
Issue Date
2021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亞細亞公論柳泰慶大正時代早稻田大學基督教人士人類主義朝鮮觀亜細亜公論早稲田大学ヒューマニズム朝鮮観
Description
학위논문(석사) -- 서울대학교대학원 : 인문대학 동양사학과, 2021.8. 박훈.
Abstract
本研究は、在日朝鮮人柳泰慶が1922年に創刊した『亜細亜公論』における日本人執筆者の内政論、外交論及び朝鮮植民地論に対する分析と非日本人執筆者との比較を通じて、彼らの思想の在り方を検討する。大正期(1912-1926)には、多くのアジア人学生が日本へ留学して近代教育を受け、様々な学生団体の活動及びその刊行物を通じて意見を表明した。しかし初期において彼らの活動範囲は全てそれぞれの民族集団内にとどまり、他の民族との交流はなく、『亜細亜公論』の登場によって、アジア人留学生の交流空間が出現したのである。『亜細亜公論』には日本の知識人も参加しており、これにより多様な思想が一堂に会することとなった。
非日本人執筆者の構成及び思想の差異に関してはすでに先行研究があり、当時のアジア人留学生たちが属していた思想グループ、団体及び各団体間の協力関係をうかがい知ることが出来る。これらの研究によれば、大正期におけるアジア人留学生の思想交流は大変活発なものであった。彼らは『亜細亜公論』上で各自の関心事について発言を行い、日本だけでなく朝鮮、台湾、中国、インド、欧米などの情勢を読者に伝えたのである。しかしながら、先行研究の中で『亜細亜公論』執筆者陣の主体であった日本人執筆者に関する系統的な分析は無く、日本人執筆者の観点を知ることは出来ない。このため、本研究では、まず日本人執筆者とアジア人留学生との活動の軌跡に着目することで、彼らが早稲田大学とキリスト教会を通じて知的ネットワークを形成し、それによって社会各層の人々に『亜細亜公論』に投稿するよう働きかけたことを明らかにした。このことから、『亜細亜公論』にはヒューマニズムとキリスト教的思想が非常に強く現れていると言える。
第二章では日本人執筆者の外交と内政に対する見方を検討する。第一節では外交論を取り上げる。第一次世界大戦後、日本は英米の牽制を受け、またソビエト政権に対する警戒感も強まっていたことから、国際社会において日本は難しい立場に立たされていた。こうした国際情勢に接して、大正デモクラシーの中で帝国主義批判の思想が現れ、日本の知識人はやはり『亜細亜公論』の中でも帝国主義批判の態度を表明した。彼らは主に急進的自由主義者とアジア連帯論者に分けられるが、その大部分はアジア連帯論に傾倒していた。急進的自由主義者は、植民地放棄論を主張して、植民地での軍事費削減と各国との自由貿易強化を訴えた。これによって日本を経済大国に変え、また植民地を放棄することで隣国の信頼を勝ち取り、更には弱小国の民族自決運動に積極的な影響をもたらすことを企図していたのである。それ以外にも、アジア連帯論者は英米の人種差別政策に対する批判を行い、日本がアジア各国を指導して西欧諸国の侵略に抵抗することで、国際社会における孤立無援の状態を打破しようと考えた。第二節では内政論を取り上げる。1918年の米騒動によって民権運動は大きな高まりを見せ、旧来の藩閥政治を打破した。民衆の普選要求に接して、『亜細亜公論』の中で尾崎幸雄は普選による階級革命の抑制を訴えた。また、大山郁夫は当時の議会政治に対する不満を表明し、無産階級も選挙権を獲得することを希望した。日本人執筆者の意見はそれぞれ異なってはいたが、国民の政治的素養不足を憂慮し、政治教育の強化が必要だと考えた点では一致していた。また一方、戦間期の1920年代、日本の人口は増加を続け、加えて欧米各国が日本からの移民を制限したこともあり、人口問題が浮き彫りになりつつあった。これに対して安倍磯雄は産児制限論や優生学などの解決策を提示した。
第三章では日本人執筆者と非日本人執筆者の朝鮮観を検討する。第一節では日本人執筆者の朝鮮認識を取り上げる。1919年の三一独立運動をきっかけとして、日本の朝鮮統治は武断統治から文化統治へと転換した。この時から日本の知識層の視線は被植民者に対して注がれるようになり、各種刊行物においても朝鮮問題が取り上げられ始めた。同様に『亜細亜公論』においても日本人執筆者の朝鮮に対する関心が紙幅の多くを占めることとなった。しかしながら、急進的自由主義者を除けば、大部分の日本人執筆者は韓国併合正当論を支持した。彼らは朝鮮には独立の条件が備わっていないが、日本統治下での自治権は許容されると考えていた。日本人執筆者の朝鮮に対する関心は多岐に亘っている。島田三郎は朝鮮総督の統治方針に対する批判の中で、ドイツ式のやり方を模倣したのは失敗であったと述べ、日本政府が朝鮮の旧俗を尊重することを訴えた。能勢岩吉は世界各地での朝鮮人の抵抗運動に関して詳細な評論を行い、キリスト教と抵抗運動との関連性を強調した。今川宇一郎は誤った理解に基づく満鮮問題の報道が氾濫していると述べ、こうした誤った報道が全世界へと広まることに懸念を表明した。これ以外にも、朝鮮の教育や経済に関して日本人執筆者は現実的な提言を行った。内ケ崎作三郎は成人教育と労働者教育に注目し、教育の改善による日鮮融合の実現を訴えた。沢田天峰は朝鮮の天然資源活用とインフラ改善による朝鮮産品の競争力向上を提案した。第二節では非日本人執筆者の朝鮮認識を取り上げる。台湾の蔡培火にせよ、インドのラス・ビハリ・ボースにせよ、彼らの論調は全て植民地統治者である日本の立場に近いものであった。彼らは自身の民族の権益獲得には非常に積極的であったものの、朝鮮問題に対する態度は却って消極的だったのである。また、朝鮮人執筆者は朝鮮総督の統治に対してまとまった批判を行い、両班への参政権付与反対、地方警察の蛮行に対する抗議、差別待遇の改善要求、強制的な日鮮融合の拒否などの意見を表明した。
本研究は『亜細亜公論』の日本人執筆者の政論に分析の重点を置くことで、これまで日本人執筆者に注目してこなかった先行研究の不足を補った。同時に日本人執筆者と非日本人執筆者の朝鮮認識の差異を比較することで、『亜細亜公論』の多様性を明らかにした。『亜細亜公論』の全体像を理解する上で、本研究がその一助となることを切に願う。
본 논문은 1922년 재일 조선인 柳泰慶이 창간한 『亞細亞公論』에 나타난 일본인 필자들의 내정론 및 외교론을 살펴보고 나아가 조선 식민지 문제에 관한 그들의 견해를 비 일본계 필자들과의 비교를 통해 고찰해 보는 것을 목표로 한다. 다이쇼 시기동안 수많은 아시아 유학생들은 일본으로 유학하여 신식교육을 받았고 학생단체나 간행물의 형태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였다. 그러나 초기에는 유학생들의 활동범위는 각각의 민족 내부로 국한되어 있었으며 여타 민족과의 교류를 위한 기회가 마땅히 없는 것이 현실이었는데, 『亞細亞公論』의 등장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다양한 민족 출신의 아시아 유학생들에게 교류를 위한 공간을 마련해주었다. 더불어 일본인 지식계층도 여기에 참여하여 한층 다양한 사상의 공동 표출이 가능해졌다.
비일본인 필자들의 구성 및 그들 내부의 사상적 차이에 관해서는 이미 선행 연구가 이루어져 있어 당시 아시아 유학생들이 속했던 사상적 유파, 단체의 구성, 단체 간의 협력 관계 등이 이미 잘 밝혀져 있다. 이를 통해 다이쇼 시기 아시아 유학생들의 사상적 교류가 상당히 활발하였고, 그들이 『亞細亞公論』을 통해 각자의 관심사를 표현하였으며, 독자들에게 일본 이외에도 조선, 대만, 중국, 인도, 구미 등지의 국제정세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였음을 비교적 상세하게 알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일본인 필자에 관한 계통적 분석은 대체로 미비하여 그들의 관점이 어떠하였는지를 파악할 길은 여전히 묘연한 상황이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우선 일본인 필자들과 아시아 유학생들의 활동 궤적을 파악하고, 그들이 와세다 대학과 기독교 교회를 통하여 지적 관계망을 형성했음을 밝히며, 더불어 다양한 사회 각계 인사들이 『亞細亞公論』에 기고한 바가 있음을 보이고자 한다. 이러한 관계망 하에서, 『亞細亞公論』에는 상당히 농후한 인도주의적, 기독교적 색채가 깔려있음을 알 수 있다.
제2장에서는 외교 및 내정 문제에 관한 일본인 필자들의 견해를 고찰하고자 한다. 1절에서는 외교론을 다룰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일본은 영미 등 국가로부터 견제를 받고 있었고 신흥 소비에트 정권에 대해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정황들로 인해 외교적으로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었다. 이러한 국제정세를 마주하여 다이쇼 데모크라시 내부에서는 제국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사상 풍조가 싹트고 있었고, 일본 지식계층의 이러한 태도는 『亞細亞公論』에도 뚜렷이 나타나 있다. 그 외에도 아세아 연대주의자들은 영미의 인종차별 정책을 비판하고 일본이 아시아 각국을 이끌어 서방세력의 침입에 대항함과 더불어 국제사회에서의 고립무원의 지경을 타파할 수 있기를 희망하였다.
제3장에서는 일본인 필자와 비일본인 필자의 조선관의 차이를 살펴볼 것이다. 1절에서는 일본인 필자의 조선에 대한 인식을 논하고자 한다. 1919년에는 3.1운동이 발발하였고 이로 인해 일본의 대조선 정책이 무단통치에서 문화정치로 전환되었다. 이때 일본 지식인들은 피식민자들에게로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수많은 간행물에서 조선문제에 관한 논의가 나타났다. 『亞細亞公論』에서도 역시 일본인 필자의 조선 문제에 관한 관심이 지면에서 큰 부분을 차지했다. 일부 급진적 자유주의자들을 제외하면 대다수의 일본인 필자는 한일합병의 정당성을 지지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이들은 조선이 독립의 요건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하였지만, 일본의 통치 하에서 상당한 정도의 자치를 향유하도록 허용하여야 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조선 문제에 대한 일본인 필자들의 관심의 폭은 상당히 넓었는데, 이 가운데 島田三郎는 조선 총독부의 통치방식을 비판하였고 독일의 법제를 일률적으로 모방, 수용한 것이 잘못이라고 주장하였으며 일본정부가 조선의 구속(舊俗)을 존중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能勢岩吉는 세계 각지에서 조선인민이 진행하고 있는 저항운동에 대하여 상세한 평론을 제시하였고 특히 기독교와 저항운동 간의 관련성을 다루었다. 今川宇一郎는 만선문제에 관한 그릇된 인식이 만연함을 지적하였고 이처럼 잘못된 정보가 외신을 타고 전세계로 전파되는데 우려를 표명하였다. 그 외에도 조선의 교육과 경제 문제에 관하여 일본인 필자들은 실효성 있는 건의를 다수 제안하였다. 內ヶ崎作三郎는 성인교육 및 노동자 교육에 주로 관심을 두고 있었고 교육 개선을 통한 일선융합의 촉진을 주장하였다. 澤田天峰은 조선의 천연자원을 보다 잘 활용할 것과, 기초 인프라 확충을 통한 조선 상품의 경쟁력 제고를 역설하였다. 2절에서는 비 일본인 필자들의 조선관을 분석해볼 것이다. 대만의 蔡培火, 인도의 라쓰 비하리 보스를 막론하고 그들이 논조는 모두 일본 식민자 쪽으로 편향되어 있었다. 그들은 각자 자민족의 문제에 있어서는 적극적으로 권리투쟁에 임하였으나, 조선민족 문제에 있어서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그 외에도 조선인 필자들은 조선총독부의 통치에 대하여 일련의 비판을 전개하였다. 예컨대 그들은 양반 출신의 조선인들에게 대한 참정권 부여, 지방 경찰의 만행 등을 극력 비판하였고, 그 밖에도 차별대우 개선, 강제적 일선융합에 대한 거부 등에 관한 의견을 개진하였다.
본 연구는 『亞細亞公論』에 나타난 일본인 필자의 정론에 중점을 둠으로써 비일본인 필자들의 견해에 치중하고 있는 기존연구를 보완하는 것을 그 목표로 한다. 동시에 양자의 식민지 조선 문제에 관한 인식을 비교함으로써 『亞細亞公論』의 포용성과 다양성을 드러내 보이고자 한다. 이를 통해 본 연구가 『亞細亞公論』의 전체적 면모를 파악하는데 기여할 수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
Language
kor
URI
https://hdl.handle.net/10371/178857

https://dcollection.snu.ac.kr/common/orgView/000000168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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