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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批評論文> 1894년 농민군 진압자의 政局 認識과 政治的 行路의 分岐–『甲午軍功錄』 등재자를 중심으로– : The Political Awareness and a Branch of Political Course in the 1894 Peasant War Suppressor: Based on the 1894 Military Transcript (Gabo Gungongn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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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김태웅

Issue Date
2020-03
Publisher
역사교육연구회
Citation
역사교육 No.153, pp.291-320
Abstract
1894년 농민전쟁 이래 1910년 국망에 이르는 시기는 한민족 전체의 삶뿐만 아니라 국민 개개인의 삶에 영향을 끼쳤던 중요한 시기였다. 특히 농민전쟁 진압에 가담한 인물들은 공훈의 대가로 출세가도를 달릴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러나 진압자 내부 구성원들은 민족문제와 계급문제가 착종된 가운데 정치·사상적 기반과 지향 목표가 상이한 까닭에 외세와 연계되기도 하고 끊임없이 상쟁하면서 각종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었다. 민씨척족과의 관계 여부, 조세 징수권을 실질상 장악한 향리층과 조세개혁을 추진한 갑오 개화파 정권의 충돌, 위정척사파와 급진개화파의 상쟁, 근왕주의 세력과 친일파의 대립·갈등 등이 심화되면서 인간 군상의 다양한 행로를 보여주었다. 그리하여 이들 각각의 정치집단은 을미의병과 춘생문사건, 아관파천, 환궁운동 등을 거치면서 파란만장한 집단생애사를 수놓았다.
한편, 광무정권이 군인과 유생, 일반 백성들의 군왕에 대한 충성을 장려하기 위해 장충단 건립을 추진하는 가운데 1895년에 수합된 軍功經歷書類를 母本으로 1900년경에 편찬된 최종판 『갑오군공록』도 광무정권의 이러한 의도 속에서 집성된 군공자 명단이었다. 따라서 군공록에는 을미의병에서 활약한 반일 의병 지도자들이 대거 등재된 반면에 농민전쟁 진압에 공훈을 세웠음에도 을미사변에 가담한 인물들은 제외되었다. 광무정권의 정치적 기반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그러나 여기에 등재된 인물들 가운데 상당수는 일제의 배척과 탄압으로 인해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했으며 일부는 일제에 저항함으로써 대중의 뇌리에서 철저하게 망각되어야 했다. 반면에 최종판 군공록에 등재되지 못한 친일 인물들은 1907년경 복권하여 출세가도를 달렸다. 비록 이들 친일 인물이 취한 정치적 행보는 일제의 침략에서 비롯되었지만 그들 스스로가 일제의 사주를 적극 받아들일뿐더러 능동적으로 협력한 결과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그들이 근대 국가 건설과 국권 수호 과정에서 쓰러져 간 많은 민인들의 희생과 1910년 국망에 대해 책임져야 할 몫이 적지 않다.
ISSN
1225-0570
URI
https://hdl.handle.net/10371/206024
DOI
https://doi.org/10.18622/kher.2020.03.153.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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